# 123
제가 메인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상무보와 함께 떠나는 출장.
확실히 장단점이 뚜렷한 출장이었다.
"차장님. 현지 시간 목요일 오전 11시로 미팅 잡혔습니다."
"수고했어요. 비행편은 내가 좀 알아봤는데, 여기 이걸로 예약하고 상무보님 쪽으로 디테일 넣어주세요."
"호텔 예약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건 우리가 안해도 돼요."
"...?"
"비행편 디테일만 임원 비서실로 넣어주면 호텔 예약은 그쪽에서 대신 해주기로 했어요."
"아...네, 알겠습니다."
기획 2팀 장향은이 링겐 측과의 미팅 정보를 가지고 날 찾아왔다.
Kidshub는 이미 기획 2팀의 손을 떠나 기획 1팀이 컨트롤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이번 출장에 기획 1팀의 차 대리가 아닌 장향은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 먹었고.
아무래도 링겐 측과의 접촉 횟수는 기획 2팀의 센터를 보고 있는 장향은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함께 출장을 가기로 되어있는 인물이 인물인지라 작은 것 하나까지도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안 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장향은의 스케줄을 빼는데 성공, 이번 출장의 준비를 모두 장향은에게 부탁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출장 당일 공항에서 비행 좌석이 바뀌어버린다.
"그럼 먼저 수속 밟으시죠.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난 상무보와 그를 따라 나선 여비서에게 비즈니스 수속 라인을 안내해놓고, 장향은과 함께 일반석 수속 라인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니, 아니...잠깐만."
"...네?"
상무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불렀고, 나와 장향은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저 고개를 돌려 상무보를 쳐다봤다.
"좌석이 달라요?"
너무나 당연한 걸 물어봐서 순간 당황을 했다.
회사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인 테이블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나.
이건 나도 다른 회사를 다녀본 게 아니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대기업의 임원은 그 어떤 출장을 가더라도 회사로부터 비즈니스 좌석을 제공받고, 또 상황에 따라 임원을 바로 옆에서 수행하는 비서도 업무의 중요도에 따라 비즈니스 좌석을 제공
받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일반 사원의 경우는 항공사의 사정이나 운이 따르지 않는 다음에는 출장을 가면서 비즈니스 좌석을 이용할 기회가 전혀 없다.
그건 부장 역시 마찬가지이고.
상무보가 "좌석이 달라요?" 라고 물어보는데, 거기서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네."
"거 참 신경 좀 쓰라니까..."
자신이 데리고 온 비서를 향해 나무라듯 인상을 쓰며 상무보가 말끝을 흐렸고, 그 순간 나와 장향은은 상무보의 비서에게 죄 지은 것 하나 없이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상무보의 비서 역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이리와. 같이 들어가요."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하는 상무보.
나와 장향은은 설마설마 하는 마음으로 상무보 옆으로 섰다.
그리고 바로 수속 창구 앞으로 선 상무보는 자신의 비서에게 나와 장향은의 좌석을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 시키라고 지시했다.
"다행히 비어있는 좌석이 두 개 있긴한데, 떨어져 있습니다."
"상관 없어요."
창구 직원을 향해 상관없다고 대신 대답을 한 다음, 상무보는 나와 장향은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자신이 한 대답에 확인을 받았다.
"떨어져서 앉는게 더 편하지 않나?"
"...네, 뭐 저희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제 값을 다 치루고 업그레이드를 시킨 건 아니었다.
항공사 입장에서도 충분한 융통성을 발휘해주었고.
어차피 한 번 뜨면 더이상 팔지도 못하는 좌석이 비행 좌석 아니겠나.
수속을 다 끝내놓고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그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비즈니스 라운지를 이용했는데, 그곳에서 상무보는 자신의 비서에게 아까 창구 앞에서 짜증 아닌 짜증을 내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고, 그의 비서는 어색한 억지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
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생각을 좀 해봐요. 가까운 중국 출장을 가는 것도 아니고 12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하는 출장인데, 가는 동안 멍하니 뭐 할 거야? 내 입장에서 이런 출장은 시간이 돈이에요. 가는 동안 공 차장한테 이런저런 출장 노하우도 좀 듣고,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쪽으
로 협상을 진행할지 설명을 듣는 게 훨씬 더 남는 장사라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써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서 일도 참 못할 짓이겠구나...싶었다.
자기는 그동안 해오던대로 했을 거 아닌가.
그동안 자신이 케어를 해왔던 임원들 중 어떤 임원이 일반 사원들과 출장을 가면서 자기 사비로 비행 좌석 업그레이드를 시켜주겠나.
거기다 별도의 정확한 지시가 없었다면 내가 비서라도 내가 케어해야하는 임원의 비행 좌석만 챙겼을 거 같다.
그렇게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비행기에 올랐는데, 거기서 난 상무보의 지시로 그의 비서와 자리를 바꿔 앉아야만 했다.
상무보와 나란히 앉아서 출발하게 된 출장이었다.
분명 비즈니스 좌석은 140도까지 눕힐 수가 있어서 무척이나 편한 자리였는데, 이상하게 일반석보다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이겠지.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상무보는 내가 불편해하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비행기가 이륙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조잘조잘...마치 첫 수학여행을 떠나는 초등학생처럼 쉬지않고 말을 걸어왔다.
"음료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약간 의외였다.
"위스키 한 잔 안 할래요?"
"위스키요?"
"한 잔씩 마시고 잡시다. 이번 출장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 해봤자, 공 차장 컨디션 관리 밖에 더 있겠어요?"
그 이후부터 상무보의 옆자리가 편해졌던 거 같다.
안주로 나온 연어 까나페.
이래서 그 비싼 돈을 주고 비즈니스 좌석을 사는구나...싶었다.
개인 접시에 세 개씩 담겨 있는 연어 까나페를 먼저 받고, 뒤늦게 나온 얼음 담긴 온더락 잔을 받는 순간 내가 그의 옆자리를 불편해하면, 내가 불편해하는 만큼 상무보가 불편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내가 공 차장한테 그런 말을 한 번 한적 있잖아요. 공 차장이 기억을 하려나 모르겠다."
"무슨..."
"공 차장이 뭘 원하는지를 모르겠다고. 그래서 내 입장에선 참 어려운 사람이라고. 뭘 원하는지가 눈에 보이면 원하는 그걸 걸 해주면 되는데, 내 눈엔 공 차장이 뭘 원하는지가 전혀 안 보여. 그런데..."
"...?"
"내가 공 차장한테 그런 내 속에 있던 말을 했던 당시를 떠올려보면 뭐랄까...내가 공 차장에게 참 겉넘는 말을 했구나...하는 후회가 들어요. 그 생각 속엔 이미 난 공 차장이 뭘 원하든 난 그걸 다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더라고."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은 안해봤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고. 그냥 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요즘 난 한 번씩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에 사장님의 모습이 들어있다는 걸 참 자주 느껴요. 난 사실 아버지를 별로 안 닮은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어가다 보니까 피는 못 속인다
고 마흔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내 얼굴에서 이제야 조금씩 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요."
참 너무나 당연한 건데, 상무보가 사장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니까, 이상하게 어색했다.
"내가 그렇게나 혐오하고 질색을 했던 아버지의 방식을 나도 모르게 공 차장을 상대로 사용하고 있더라니까? 뭐 필요하냐, 얼마면 되냐...이걸 내가 해주면 넌 뭘 할 수 있겠냐...이게 사장님 스타일이에요. 아들이 왜 이게 필요하고, 또 뭘 하고싶어 하는지는 중
요한 게 아니었죠. 그저 당신이 어떻게 해주면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결정을 따라오게 만들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한 분이셨거든."
"..."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의 방식을 공 차장을 상대로 똑같이 따라하고 있더라고. 일전에 법인 본부장이 한국에 잠시 왔을 때 말이에요. 분명 내가 공 차장한테 부탁을 했던 내용이 법인 본부장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공 차장한테 화가 났는데, 잠
시 뒤에 그 화가 나한테 오더라. 공 차장은 그냥 공 차장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방식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화가 났던 거더라고. 내가 그 일이 있은 후로 한동안 공 차장을 보는 게 조금 불편했어요. 못 느꼈나?"
"느꼈죠."
"앞으로는 주제 넘게 공 차장에게 뭘 원하는지는 묻지 않으려고. 대신 앞으로는 홍성 안에서 뭘 하고 싶은지를 물어볼게요. 그정도는 해도 되잖아."
"물론입니다."
"나는 공 차장이 내게, 사장님의 이문 본부장님과 같은 사람이 되어주길 바랐던 거 같아요. 난 그런 쪽으로는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전무님이 작년 언제쯤인가 내게 그런 말씀을 먼저 꺼내셨죠. 잘 한 번 지켜보고 옆에 둘 수 있음 가능한한 옆에 두라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건 너무 구식이야. 사장님, 전무님, 이문 본부장님...이 세 분의 관계는 그 시절이니까 가능한 관계였고, 요즘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저는...음...그런 것 까지는 사실 잘 모르겠고, 그냥 언제부턴가 안전한 길 보다는 조금 리스크가 있더라도 제가 하는 행동과 판단, 선택이 도덕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행동하고 싶어졌습니다. 그게 회사 일이든, 아님 사적
인 일이든."
나의 솔직한 욕심 앞에 상무보는 미소를 지었다.
"이문 본부장님...분명 제게 제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계기가 없었다면, 전 아마도 이문 본부장님을 제 워너비로 놓고 출근을 하고 있을 겁니다. 분명 지금의 이문 본부장님은 많은 홍성맨들의 워너비로 자리잡고 계십니다. 하지만 전...언제부턴가 절 위해
출근을 하고싶고, 또 절 위해 퇴근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누군가의 옆자리를 든든하게 지키는 묵직한 포지션도 분명 매력적이지만, 전...제가 메인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요. 내가 봐도 공 차장은 그런 게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비록 난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용기 있게 선택하지 못했지만, 그래서인지 공 차장 같은 캐릭터가 옆에 있으니까 이상하게 대리만족이 되는 느낌이에요."
"그럴리가요. 지나가는 사람 백 명을 잡고 물어보십시오. 상무보님과 저. 만약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지."
"그 백 명이 뭐라 대답을 하든 난 공 차장이 참 부럽고, 또 그래서 가능하면 쭉 같이 있고 싶어요. 메인 한 번 해봐요. 지지는 내가 할 테니까. 나한테 크게 해주는 건 없는데 이상하게 응원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네, 몇 명 있습니다."
"나한테 그런 사람이 바로 공 차장이에요."
"...!"
"참 이상해. 예전에 내가 영업 지원팀에 있었을 땐 그냥 공 차장을 보면서 일 참 스마트하게 잘한다 정도만 생각을 했지, 공 차장이 이렇게까지 다이렉트인 줄은 전혀 몰랐거든. 오히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지나치게 신중하고 또 조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
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공 차장이 팀장을 달고나서부터 부쩍 공 차장의 가치가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 같아요. 사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지나치게 신중하고 조심하는 사람보단 그냥 시원시원하고 솔직한 사람한테 더 끌릴 수 밖에 없는 거 같
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