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무슨 출장을 매주 가?
"브랜드 초이스를 쁘띠토널로 최종 확정하기에 앞서 컨트롤 기업인 우리 홍성이 왜 자체 브랜드가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판을 백지 상태로 옮기기 시작하는 이문 본부장.
이 전사적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이문 본부장은 자체 브랜드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사장님을 상대로, 마치 자체 브랜드의 필요성을 처음부터 자신이 주장했던 것처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항상 유통판과 브랜드 사이에 끼어서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영업을 할 수 밖에 없는 게 우리 홍성과 같은 컨트롤 기업의 숙명이죠. 국내 1등 컨트롤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지금도 언제 그 1등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모르는
게 현실 아니겠습니까."
요점을 크게 빗겨나가고 있었다.
이번 전사적 회의의 주제는 단연 쁘띠토널.
하지만 이문 본부장은 쁘띠토널이 아닌 홍성의 원론적인 문제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의 말을 커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일전에 CGM 코리아가 우리 홍성과 국내 컨트롤 기업들을 상대로 했던 짓을 생각해 보십시오. 속수무책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내용이기는 하나...당시 만토바라는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면, 현재 우리 홍성은 CGM과 겹치게 확보하고 있
는 브랜드 모두를 잃었다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기에, 그리고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가 다 다르기에 이문 본부장이 한 그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무게 역시 다 다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난 이문 본부장이 자신을 포함한,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상대로 반성을 하자는 제안을 한 거라고 받아들였다.
불편한 진실.
한국 안에서나 국내 업계 1등 컨트롤 기업이랍시고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또 어중간한 브랜드들을 상대로 나름의 파워를 과시하지, 따지고 보면 CGM이라는 공룡이 국내에 등장을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기감을 느끼고 또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하지 않았나.
"그리고 아직 시간과 여유가 있을 때, 그때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토바가 언제까지 중국에서 홍성의 도움을 필요로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
똑같은 강도로 맞았을 때 가장 아픈 곳은 단연 약점이다.
이문 본부장은 홍성의 약점을 망설이지 않고 팩트로 때렸다.
그리고 그 팩트에 맞은 모두는 언제 끝날지 모를 침묵을 입에 걸었다.
"지금이야 홍성이 기존에 만들어놓았던 중국 법인의 유통 채널과 시스템이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에 만토바를 잡고 있을 수 있는 거지, 1년...아니 2년, 3년 뒤에도 만토바가 우리 홍성을 필요로 할지는 믿음이 아닌 의심을 품고 잘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생
각합니다. 자기들이 직접하면 중국 시장 뿐 아니라 한국 시장까지 다 먹을 수 있는데, 굳이 홍성과 함께 하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홍성이 하는 요구들을 다 들어줄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
그동안 내가 무척이나 가려워 했던 곳을 골라서 긁어주는 이문 본부장.
나 역시 그 부분에 대해 항상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 걱정을 내가 회사의 주인인 것처럼 앞장서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게 제가 성인복이 아닌 유아복쪽으로 방향을 틀고 또 시장에 나와있는 다른 유아복 브랜드들을 다 무시하고 쁘띠토널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
"홍성의 진짜 힘, 우리의 영업력을 본 게임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테스트부터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갖다놓기만 하면 알아서 팔리는 대형 브랜드들도 현재 홍성의 자본 규모라면 얼마든지 섭외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극한의 조건 속에서 빠듯
한 실전 시뮬레이션 한 번 정도는 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영업력으로 만토바를 등에 업고 띄울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한 번 해보자?"
"비슷한 맥락이긴 하지만, 그 보다는 홍성의 영업력과 만토바의 파워라면 어느 선까지 띄울 수 있는지를 파악해보자...정도로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만토바에게는 아직 우리 홍성에겐 링겐이라는 카드가 남아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노출시
키는 거죠. 이미 쁘띠토널이 유럽 시장에서 올리고 있는 전체 매출은 한국 시장 안에서도 얼마든지 다 커버가 가능합니다. 장 부장."
이문 본부장이 장 부장을 불렀고, 자리에서 일어난 장 부장에게 전사 운영본부팀 직원이 무선 마이크를 전달했다.
"유아복 관련 매출 순으로 전국에 퍼져있는 국내 백화점들의 순위를 뽑아봤습니다. 그 지점들을 중심으로 쁘띠토널 단독 매장 론칭과 동시에 Kidshub에도 쁘띠토널을 포함시킨다면 현재 유럽 시장에서 쁘띠토널이 올리고 있는 매출 규모 1.5배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리고 만토바와는 별개로 중국 시장 쪽은 Kidshub를 넣으면서 함께 들어갈 것이기에 Kidshub 명품 유아복 편집샵을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중국 쪽으로 론칭을 시킬 수 있을지를...연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가는 이문 본부장.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왜 CGM이 그다지 먹을 것도 없는 한국 시장에 들어와서 국내 컨트롤 기업들을 상대로 치킨 게임을 펼쳤나. 그리고 만토바를 등에 업은 홍성의 반격으로 국내 유통판들에게 외면을 받으면서도 왜 아직 국내 시장을 철수하지 않
고, 저렇게 미련하게 버티고 있나...아직은 중국 시장에 큰 기회가 있다고 판단을 한 거죠. 실제로도 그렇고요. 그 넓은 시장을 만토바가 독식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니까요. 기회만 엿보고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
"..."
"만토바라는 초대형 공룡이 자기들 때문에 한 발 앞서 중국 시장에 들어갔는데, 그 중국 시장에서 만토바와 전면전을 펼칠 수는 없겠죠. 이미 한국에서 먼저 꼼수를 쓰다가 된통 당한 상태라 최대한 만토바의 눈치를 살피면서 돌아서 갈 겁니다. 만토바에는 없
는, 만토바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지만 CGM은 주력을 하고 있는...그리고 아직 중국 시장에선 큰 메리트가 있는 부문. 바로 아동, 유아복 부문이죠."
"...!"
"이미 공 차장이 지난주 만토바에 직접 넘어가서 이탈리아 브랜드들을 만토바가 확보해주도록 이야기를 다 끝내놓고 돌아왔습니다. 아직 만토바는 모를 겁니다. 그들이 섭외해주는 브랜드들로 우리 홍성이 뭘 어떻게 할지. 우선은 만토바와 중국 시장의 힘을
빌려서 CGM이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명품 유아복부터 잘라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Kidshub 안에서 프랑스 브랜드의 비율을 조금씩 높혀가며 링겐쪽에 힘을 실어주도록 하겠습니다. 링겐 정도라면...홍성이 중국 시장에 Kidshub만 제대로 상륙시키
면, 이탈리아 쪽 브랜드를 모두 잃게 될 CGM을 상대로 한 번 해볼만 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이문 본부장이 잠시 말을 끊는 타이밍에 비로소 난 숨을 쉴 수 있었다.
이 내용이 도대체 뭐라고 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의 발표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 링겐을 조금이라도 키워놓아야...만약 나중에 만토바가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 홍성이 링겐을 적절하게 컨트롤해가며 잘만 이용을 한다면 만토바가 최소한 중국 시장 안에서만큼은 다른 생각을 할 이유
가 없겠지만 말이죠."
"아직 링겐 쪽과는 접촉이 안된 상태인 거고?"
전무님의 질문에 이문 본부장은 장 부장을 쳐다봤다.
"이번주 안으로 접촉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가나?"
사장님의 질문.
이문 본부장의 표정을 봐선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장 부장이 해야하는 것 같았다.
"아직 영업부 안에서는 전체 그림을 다 알고 있는 게 저랑 공 차장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시간 부로 국내 유통판들을 상대로 쁘띠토널 단독매장을 만들 수 있는 자리 확보를 시작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럼 공 차장 갈 때 상무보도 같이 가지?"
사장님의 지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하는 상무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직 링겐은 한 번도 안 가봤을 거 아냐."
"업무 관련해선 아직..."
"그럼 안 가본 거지. 그래, 이참에 갔다가 와. 그게 좋을 거다. 맨날천날 책상 자리에 앉아서 올라오는 숫자확인만 하는 거 보다는 우리 직원들이 어떻게 지금의 홍성을 만들었고 또 유지시키고 있는지를 직접 봐야 이런 회의 자리에서 뭐라도 한 마디 낄 수 있는
거야."
좋다가 말았다.
상무보를 모시고 가야하는 출장이라...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내가 메인이면 전 일정 자체를 내 마음대로 짤 수가 있는데, 이건 뭐 그럴 수가 없게 생겼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난 지금 상무보의 지지와 많은 배려를 안고 있는 상태라는 점.
회의가 다 끝이나고 상무보가 날 따로 불렀다.
예상하고 있었다.
이젠 상무보의 스타일을 대충 알겠다.
그리고 난 상무보의 사무실에서 그가 현재 나 못지 않게, 아니 나보다 훨씬 더 링겐 출장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정신없을텐데, 나까지 거들게 생겨서 참 미안하게 생각해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만토바나 링겐과 같은 1차 밴드들과 협상을 하러 갈 때 준비해야 할 거나 따로 신경 써야 할 게 뭐가 있을까요?"
너무나 인간적이고 또 솔직하게 다가와줘서 마음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부분이 상무보의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홍성이 고객입니다, 상무보님."
"...?"
"전 항상 만토바를 가거나 예전에 폭스타운을 갈 때에도 물건을 주문하러 간다는 생각으로 다녔지 뭔가를 요구하러 간다는 생각으로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습니다. 링겐 역시 마찬가지고요. 홍성은 항상 돈을 주고 물건을 사왔습니다. 그랬기에 링겐은
언제나 홍성에게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이번 출장에서도 홍성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링겐 측의 모습을 보게 되실겁니다."
"그래도..."
"음...그럼 제가 지금 사무실에 올라가서 그간 정리되어 있는 링겐 관련 출장 보고서를 확인해보고 최대한 요약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바쁠텐데..."
"별 내용이 없다고 이게 뭐야? 하는 반응만 안해주시면 됩니다."
난 최대한 겸손하게 미소를 지었고, 그런 날 향해 상무보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라는 말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리고...
"또? 아니 무슨 출장을 매주 가?"
"와...나 지금 눈에 다크써클 내려온 거 보여?"
수요일에 다시 링겐 출장이 잡혀버렸다고 말을 하자 강혜선은 결국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불만을 터뜨리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자니 불만이 아니라 자기 혼자 뭔가 기대를 하고 있는 거였다.
"거기 창고 사장도...당신 결혼 한 거 알고 있나?"
"거긴 만토바랑 달라. 대형 아웃렛이야, 말 그대로. 거기 사장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거기 담당자를 만나러 가는 거야."
"에이...쩝. 좋다가 말았네."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