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중요합니다
"어머? 가방이네?"
쇼핑백 안을 확인하면서 한 톤 올라간 음성으로 말을 하는 강혜선.
그 순간 난 강혜선의 얼굴에서 기대와 흥분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읽었다.
외면하기 힘들었다.
향수.
내가 이제 막 군대 전역을 하고 복학을 할 때까지 남는 기간동안 알바를 해서 백 몇십 만원이 수중에 있을 때였다.
그걸 딱 들고 삼촌이랍시고 아영이를 데리고 부산 동래 메가마트에 갔던 때가 떠올랐다.
장난감 코너에서 미미의 이층집 세트 앞에 서서 그걸 삼촌에게 사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저 빤히 쳐다보기만 하던 아영이.
분명 그걸 갖고싶어하는 마음은 백 퍼센트인데 차마 사달라는 말을 못해 내 눈치만 빤히 살피던 아영이의 어린시절 모습이 강혜선의 얼굴에 겹쳐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피곤하다. 얼른 가자."
가방과 지갑이 든 쇼핑백은 강혜선에게 빼앗긴 채, 난 슈트 케이스를 끌며 지하 주차장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 고민을 계속 했다.
비자금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이건 진짜 무조건 완전 범죄인데...
비자금.
사실 크게 필요한 건 아니다.
요즘 누가 현금을 쓰나.
다 카드 아님 모바일 결재지.
그리고 사실 스폰짜에게 가방과 지갑 선물을 받기 전엔 비자금에 대한 생각도 전혀 안하고 있었고.
삐빅!
강혜선이 리모컨 키로 열어준 차 트렁크에 슈트 케이스를 실어놓고 난 강혜선에게 키를 넘겨받았다.
"피곤할텐데 그냥 쉬어. 내가 운전할게."
"됐어."
운전대를 잡고 의자 폭을 조절하는 동안 강혜선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쇼핑백 안을 들여다봤다.
"이거도 뭐 신상 샘플같은 거야? 색깔 예쁘다."
"색깔이 예뻐?"
"예쁘네."
"진짜 색깔이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 거야, 아님 보떼가라서 그냥 무조건 다 예뻐 보이는 거야?"
"나 이 브랜드 별로 안 좋아해. 차라리 이거 살 돈이면 샤넬을 하지."
"진짜? 그럼 어쩔 수 없네. 처형 줘야겠다. 예전부터 보떼가, 보떼가 노래를 부르시더만."
그 순간 강혜선의 얼굴은 마치 꽃이 봉오리를 틔우듯 환하게 피어났다.
마치 그 시절 미미의 이층집 세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아영이에게 "와? 갖고싶나?" 라고 물었더니, 그저 고개만 흔들다가 삼촌이 "갖고 싶으면 가져가자. 삼촌이 하나 사줄게. 대신 내일부터 유치원 안가겠다고 땡깡 부리면 삼촌이 이거 다시
뺏는다?" 라고 겁을 주는 순간 행복함을 숨기기 위해 모든 입술을 안으로 숨기던 어린 녀석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내꺼야?"
정말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갈등을 했던 거 같다.
대답을 생략하고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강혜선이 다시 물었다.
"얼마 주고 샀는데?"
완벽한 거지.
이미 강혜선은 이걸 내가 무조건 돈을 주고 샀다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보여주고 있는 반응만 봐서는 진짜 돈을 주고 샀다라고 거짓말을 해도 큰 잔소리는 없을 것 같았고.
그런데 난 역시나 새가슴이었다.
"...얼마 줬을 거 같애?"
"많이 싸게 샀어? 얼마나?"
그리고 아직은 비자금을 확보하는 것 보다는 강혜선에게 인정 받는 남자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물 받았어."
비자금이라는 세 글자가 눈 앞에서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는 듯한 기분.
하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선물? 이걸? 누가?"
"거기 창고 사장이 어떻게 내가 결혼 한 걸 들었나봐. 자기네들한테 샘플로 들어온 건데, 따로 빼놨다면서 주더라고."
"아싸, 아싸, 아싸! 이 지갑도 내꺼야?"
"남자꺼다."
"여자꺼야."
"남자꺼다."
"당신 지갑 있잖아."
"넌 가방이 없냐?"
"음...난 남자가 이런 지갑 들고 다니는 거 딱 별로더라. 괜히 막 허세 부리는 거 같고..."
"그래서 뭐 지갑까지 다 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뭐 그런 뜻이야?"
"아냐, 됐어. 이건 그냥 당신 가져."
이럴 줄 알았음 그냥 비자금을 만드는 거였나?
하지만 아직은 신혼이니까.
아직은 잘 보이고싶은 마음이 더 크니까....
그렇게 위안을 하며 난 운전을 하는 내내 조수석에 앉아 가방을 살펴보는 강혜선의 행복에 만족을 했다.
새벽 1시가 넘어 도착한 집.
샤워를 끝내고 나올 때까지도 강혜선은 침대 위에서 내가 얻어다 준 가방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인터넷으로 같은 컬렉션의 가격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거 아직 한국에 안 들어온 컬러인가봐. 검색이 안돼."
"곧 들어올 거야."
"가격은 같은 컬렉션 다른 컬러랑 같지?"
"아마 그렇겠지? 왜? 또 그거 매고 회사 가서 자랑하게?"
"와이 낫?"
"아서라...사람들 욕한다."
"설마 내가 진짜 하겠니? 진짜 내가 딱 싫어하는 짓인데...아무튼 땡큐. 잘 쓸게."
"자자. 피곤하다."
침대 옆 협탁 스탠드를 켜놓고 방에 불을 껐다.
그리고 강혜선은 가방과 지갑을 다시 쇼핑백 안으로 넣어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내 품에 깊게 안겨왔다.
"우리 신랑 고생이 많네."
막무가내로 내 가슴 안쪽으로 파고 들어오는 강혜선이었다.
난 애써 피곤한척을 하며, 하지만 얼굴 표정과는 반대로 그녀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속옷 버클을 풀었고, 내 팔베개를 하고 누운 강혜선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간지러..."
"크크크..."
출장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 쫌! 간지럽다니까? 아, 그냥 해."
"으흐흐흐..."
그래, 이 맛에 신혼 하는 거지.
그렇게 주말이 가고 월요일이 시작됐다.
그동안 가라앉아 있던 긴장감이 사장님 참관 하에 미팅이 열리게 될 거란 한 마디로 모두 되살아나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예정에 없던 스케줄로 사무실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마치 불시에 찾아온 사단장의 부대 방문과도 같은 느낌.
장 부장은 아예 영업 기획부 사무실로 내려와서 내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했고, 난 간이 의자를 하나 가져와서 장 부장과 같은 책상 머리에서 전사 운영본부와 통화로 출장 내용을 전달하기에 바빴다.
"무슨 소립니까? 만토바 현지 시각으로 목요일 저녁 8시에 미팅 결과 정리해서 메일로 다 보내줬구만. 수신 확인까지 했네."
-그래요?
"그래요는 뭐가 또 그래요라는 거예요? 임 대리 옆에 있어요?"
-...네.
"좀 바꿔봐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공 차장님. 제가 실수를 했나봐요. 여기 자료 있네.
"진짜, 씨...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계속 이럴 겁니까?"
-진짜 죄송합니다. 수요일까지 정리하라고 하셔서 거기 맞춰 준비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오늘 오후 미팅까지 준비를 하라고 오더가 떨어지는 바람에 현재 저희 부서 모두 멘탈이 나가 있는 상태예요.
"나도 죽겠다, 씨...아무튼 필요한 거 있음 다시 연락 줘요."
-넵넵! 요거 다 끝나면 따로 소주 한 잔 사겠습니다!
"맨날 말만..."
-이번엔 진짭니다.
"자료 불충분, 유관부서 업무 방관 이야기나 안 나오게 해줘요. 기껏 출장까지 다녀왔는데, 나중에 가서 그런 이야기나 나오면 우리 영업부나 재무부 입장에선 얼마나 허탈하겠어요."
-아이고, 걱정 하지 마세요.
"그동안 전사 운영본부한테 당한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암튼, 조금있다가 회의실에서 봐요."
오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고, 나와 장 부장은 당일 벼락치기만 대충 하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학생들처럼 점심도 거르고 사장님 참관 하에 열린 전사적 회의에 참석했다.
발표와 회의 진행 모두 이문 본부장이 직접 맡았다.
"발표...시작하겠습니다."
스크린 옆으로 서있는 이문 본부장.
그런 이문 본부장을 향해 사장님이 농담을 한마디 던졌다.
"거기 그렇게 서 있으니까 잘 어울린다."
거기에 한마디 보태는 전무님.
"얼마 만에 거기 서 보는 거야?"
이문 본부장은 그저 웃기만 했다.
회의 테이블에 양쪽 팔꿈치를 올려놓고, 사장님과 전무님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사장님을 대신해 전무님이 이문 본부장을 향해 발표를 시작해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자네가 거기 그렇게 서있으니까 뭔가 모든 게 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들처럼 새록새록하네...시작하자."
"...네."
이문 본부장의 신호로 회의실엔 불이 꺼졌고, 난 스크린에서 번지고 있는 환함을 등진 이문 본부장의 얼굴에서 묘한 자신감과 여유를 읽을 수 있었다.
따다다다닥...
임원석 옆으로 빙 둘러져 있는 배석 여기저기에서 노트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한 방에 압도하며 이문 본부장이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입을 열었다.
"쁘띠토널. 1978년 시작한 브랜드로..."
앞뒤를 다 자르고 본론부터 시작한다라...
난 이문 본부장의 발표를 지켜보며, 발표의 내용 보다는 발표 스타일에 더 집중을 했다.
그리고 나였으면 같은 내용으로 어떻게 다른 발표를 준비했을지 상상해봤다.
확실히 이문 본부장의 발표엔 흡입력이라는 게 있었다.
자신감이 만들어주는 힘이겠지.
눈치를 봐야하는 상대가 딱히 없으니까.
"다음은 재무 리스크 팀에서 뽑아준 밸런스 입니다."
"됐어."
이문 본부장의 발표 내용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사장님.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문 본부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꽤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는데, 확인 안해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남의 브랜드 대신 팔아주는 거 아니잖아. 우리 브랜드 한 번 만들어보자고 하는 거 아니냐고. 당연히 리스크야 있겠지. 리스크가 약하다고 진행하고, 리크스가 크다고 접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여기까지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 부분 패스 하
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
"네, 알겠습니다. 송 팀장 미안하게 됐네. 자료 준비 잘해줬는데, 써보지도 못하게 생겼어."
부러웠다.
그 와중에 재무 리스크팀장을 상대로 저런 드립을 칠 수 있다니.
이문 본부장에겐 지금 저 자리와 순간이 비록 사장님 앞이라지만 숨을 쉬는 것 만큼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그럼 영업부에서 확보해준, 그리고 확보 예정인 시장 상황에 대해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장 부장은 자세를 바로 잡고 허리를 세워 다시 앉았고, 임원석에 앉은 박 이사는 회의 패드 위로 펜을 내려놓으며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그동안 CGM의 루가노 폭스타운 쪽에서 받아오던 Kidshub 브랜드 일부를 앞으로는 만토바 쪽에서 대신 소화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링겐 쪽으로 오더 물량을 높혀서 만토바가 커버치지 못하는 브랜드들은 링겐 쪽에서 확보를 할 예정입니
다. 그리고 링겐 쪽엔 오더 물량을 높여주는 조건으로 쁘띠토널을 밀어넣어볼 계획을 잡고 있습니다."
"그 부분이 중요한 부분인가?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길게 설명해?"
"중요합니다. "
이문 본부장에게만 집중되고 있던 조명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클을 걸고 있는 전무님을 향한 이문 본부장의 두 눈에서 빛이 쏟아지는 걸 봤다.
"영업부에서 이번 기회에 쁘띠토널을 유통시키면서 동시에 CGM의 유아복 유통 부문을 전멸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올려왔습니다. 사실..."
회의장 안을 한 번 쭈욱 훑어본 뒤 이문 본부장이 말을 이었다.
"일전에 저희 홍성과 국내 컨트롤 기업을 상대로 CGM이 했던 도발. 그런데 저희는 그 도발에 대한 응징을 CGM측에 직접한 게 아니라 국내 유통판과 브랜드 업체 기업들에게만 분풀이를 하듯 했던 거죠. 저희가 어떤 기업인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줄 필
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장님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회의 의자 깊숙히 등을 기대셨고, 전무님은 턱끝을 매만지며 회의 테이블 앞으로 몸을 숙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