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여윽시, 신혼!
"아, 이거였구나! 드디어 알았어!"
스폰짜가 무릎을 탁! 치며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나와 박기태는 갑작스런 스폰짜의 행동에 잠시 당황했고.
유아복 쁘띠토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스폰짜.
그때까지도 난 스폰짜를 상대로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결혼 선물을 어떤 방식으로 강혜선에게 줄지를 속으로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잘만 하면 200에서 250만 원 정도 비자금을 만들 수도 있겠는데?
사람 심리가 그런 모양이다.
아니, 결혼한 남자의 심리가 그런 모양이다.
분명 스폰짜가 내게 준 결혼 선물이다.
지갑은 내꺼, 가방은 강혜선꺼.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강혜선과 스폰짜는 서로 만날 일이 전혀 없다.
이걸 내가 강혜선에게 그냥 주기는 좀 아까웠다.
지갑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폰짜가 강혜선 몫으로 빼놓은 가방은 일반 백화점에서 제 값 다 주고 사려면 최소 500은 줘야 되는 건데, 이걸 그냥 선물을 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말고 그냥 출장을 왔다가 갑자기 당신 생각이 나서 하나 샀다라고 하면서 건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스폰짜가 챙겨준 내 지갑도 최소 120만 원 짜리다.
분명 뭐라고 할 거다.
돈이 남아 도느냐고, 아무리 남들보다 싸게 살 수 있는 루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왜 필요없는데 돈을 쓰냐고 잔소리를 할 거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좋아하겠지.
명품 가방을 마다할 여자가 어디에 있겠나, 세상 천지에.
그렇게 출장을 와서 당신에게 잘 어울릴 거 같아 하나 질렀다는 뉘앙스로 둘러대고 한 200만 원 정도 비자금을 만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야 ATM기에서 찾으면 되는 거고, 왜 카드로 계산을 안하고 현금으로 계산을 했느냐고 꼬치꼬치 물으면 원래 만토바 시스템이 그렇다고 우기면 되는 거니까.
대량으로 사입을 할 때는 카드도 되지만, 한두 개 살 때엔 현금만 받는다, 혹은 현금을 주고 사면 조금 더 싸게 살 수 있다...는 식으로 대충 둘러대면 강혜선이 무슨 수로 확인을 할 수 있겠나.
아닌 말로 날 만나기 전까지는 만토바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강혜선이 아닌가.
드디어 완벽한 비자금 형성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에 내심 천재성 진한 나의 잔머리에 속으로만 박수를 치고 있을 때였다.
스폰짜가 무릎을 탁! 치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뭘...드디어 알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동안 내가 왜 그 많은 커스터머들 중에서도 특히 홍성에 마음이 쓰였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거 같네요."
"...?"
"사실 그렇잖아요. 지금이야 중국 관련 사업을 같이 하니까 파트너쉽으로 가고 있는 거지, 그 전까지 홍성은 내 입장에선 그저 사이즈가 조금 크게 나오는 커스터머들 중 하나일 뿐이었어요."
난 스폰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사이즈가 가장 큰 커스터머도 아니고, 그의 말처럼 홍성은 사이즈가 조금 크게 나오는 커스터머 중 하나일 뿐이었다.
"홍성은 항상 그 다음 스텝이 있어요. 그리고 그게 뭐가 됐건 홍성이 준비하고 있는 그 다음 스텝은 이상하게 날 궁금하게 만들어. 그건 미스터 장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분명 내 입장에선 일본의 긴테츠나 홍콩의 하버시티, 인타이에 비해 사입(상거래를 목적으
로 물건을 사들임)을 해가는 규모 면에서는 크게 재미가 있는 커스터머가 아닌데, 사업을 게임하듯 계속 뭔가를 연관시켜서 발전을 시키는 모습이 재미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한 번 더 눈이 가고 애가 쓰이는 상대라고 할까? 그게 홍성인 거 같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유아복 쪽은 내 입장에선 굳이 손을 대야 할 이유가 없는 아이템이에요."
"충분히 그렇게 생각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일단 한 번 들어는 봅시다."
"현재 미스터 스폰짜의 창고 뿐만 아니라 만토바엔 유아복이라는 아이템 자체가 없습니다."
스폰짜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기태는 스폰짜를 상대로 설득을 시도하는 나의 모습을 도둑 청강하듯 힐끔힐끔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현재 저희 홍성은 Kidshub라는 명품 유아복 편집샵을 한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론칭을 시켰고, H.I 편집샵의 후속타로 중국 시장에 진출시킬 계획을 잡고 있는 중이고요."
"문제는 현재 그 물량 대부분을 CGM의 루가노 폭스타운 쪽에서 받고 있다는 거고..."
"만약 폭스타운이 일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홍성과의 사건을 이유로 더이상 홍성에게 물건을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백퍼센트 링겐 쪽으로 갈아타야 하는 입장이긴 합니다."
"그런데 링겐 그 쪽은 사실 브랜드만 다양하지 쓸만한 물건은 별로 없잖아."
"하지만 저희가 만들어 놓은 시장 규모를 설명해주고 그 만큼의 재고를 확보해달라고 미리 요청을 보낸다면, 그정도 물건 맞춰주는 거야 링겐 쪽에서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 부분에선 스폰짜 역시 인정을 했다.
도매건 소매건 유통 채널이 문제지, 재고가 없어서 못 파는 경우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 좋은 아이템을 저희가 왜 백 퍼센트 링겐과 같이 해야하나...라는 의심이 드는 거죠. 만약 같이 한다고 하면 만토바가 훨씬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만토바와 함께 한다면 미스터 스폰짜에게 가장 먼저 제안을 드리는 게 도의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폰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마치 지금 누굴 상대로, 어디에서 약을 팔아? 하는 식의 내 속내를 다 파악하고 있다는 미소였다.
그리고 난 그런 스폰짜를 가만히 쳐다봤다.
난 내 할 말을 얼추 다 했으니 일단 반응을 보여달란 의미로.
"홍성 정도면 브랜드 측과 다이렉트로 컨텍을 해도 되지 않나? 굳이 우리처럼 1차 밴드를 낄 이유가 있을까 싶네요."
"그러기에 CGM은 저희 홍성 입장에선 여전히 넘기 힘든 산이죠. 저희가 한국에서 CGM을 상대로 한 게 있는데, 만약 저희가 브랜드 업체들과 다이렉트로 컨텍을 해서 자기네가 취급하는 브랜드를 땄다는 걸 그쪽이 알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입에 거
품을 물고 저희를 죽이겠다고 브랜드 업체들을 압박하겠죠. 결과가 뻔히 보이는 모험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니까요."
"판매할 채널은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는데, 판매할 물건이 없다?"
"그게 저희같은 컨트롤 기업의 가장 큰 약점 아니겠습니까. 그 약점을 한 번 보완해보자고 저희 브랜드를 만들어보려는 거고요."
"음...그 Kidshub에 들어가고 있는 브랜드 리스트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박기태가 재빨리 노트북 화면을 스폰짜 쪽으로 돌렸다.
"딱 반반이네. 이탈리아 브랜드, 프랑스 브랜드."
"이탈리아 브랜드 쪽만 미스터 스폰짜가 물량을 확보해주신다면, 나머지 프랑스 쪽 브랜드는 링겐 쪽에 의뢰를 해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합시다. 종목 하나 더 추가시키는 거야 일일까 어디. 이렇게 되면 우린 진짜 CGM과 전면전을 하게 되는 건가?"
"싸움은 그쪽에서 먼저 걸어온 거 아니겠습니까. 아닌 말로 CGM이 중국 시장을 혼자 다 먹겠다고 한국에서 그런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시장 판도가 이렇게까지 갈릴 이유는 없는 거였죠."
"하긴 만토바가 CGM 놈들 눈치를 살핀다는 것도 우스운 거고. 그런데 아까 그 뭐라고 했죠? 쁘띠 뭐?"
"쁘띠토널입니다."
"그래, 쁘띠토널. 그걸 뭐 어떻게 해달라는 거예요, 정확하게? 그걸 알아야 돼요, 미스터 공. 홍성이 필요로 하는 브랜드와 아이템을 섭외해서 물량을 맞춰 주는 건 우리 전공이라서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예요. 그냥 해주면 돼. 그건 일도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유아복 관련된 커스터머가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브랜드를 떠안고 그걸 영업하는 건 별개의 문제지. 유아복 이건 번들도 어려워. 만토바에 물건을 사입하러 오는 사람들 열이면 열 모두 다 성인복을 취급하는 소매업자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유아
복을 번들치는 건 마피아나 할 짓이지."
"받아 주겠단 약속만 해주시면 충분합니다?"
"...?"
"어차피 물량 소화는 저희가 한국과 중국에서 다 할 겁니다. 그런데 현재 그쪽 오너가 브랜드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지분 10퍼센트는 쥐고 있기를 원하고 있고, 저희 홍성은 현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고를 떠안지 않고 회사 시스템과 브랜드 가치만 매입하길
원하는 상태죠. 중간에 만토바를 세우면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매입이 가능한 상태라 부득이 하게 귀찮은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런 거라면야 뭐..."
"그리고 한가지 더...나크리스 말입니다."
"...?"
"중국에서 같이 풀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한다고 했다가 사정이 생겨서 취소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계속 말을 바꿔서 죄송합니다."
"뭐 사업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 커피 한 잔 더 할래요?"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그럼 점심이나 먹으러 갑시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박기태가 속삭이듯 스폰짜 몰래 물었다.
"벌써 다 끝난 건가요?"
"뭐가요?"
"이야기 말입니다."
"아...뭐 그렇다고 봐야하지 않겠어요?"
"..."
"왜요?"
"아니...이렇게 쉽게 끝날 일을 가지고 굳이 출장을 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어서요."
"나랑 기태 씨가 직접 여기까지 온 수고를 보여주는 게 이번 출장의 목적인 거예요."
"아..."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매 출장마다 잠도 못자고 일만 하나. 한 번씩 출장 핑계로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는 거지."
"푸흡..."
"근데 박 대리."
"네, 차장님."
"그럴 수 있으려면 먼저 회사에 미리미리 박 대리 이미지 세팅을 잘 해놔야 되는 거예요."
"명심하겠습니다."
"요즘 박 대리가 너무 잘해주고 있어서 따로 덧붙일 말은 없는 거 같고."
그렇게 2박 3일 일정을 널널하게 끝내고 다시 돌아간 한국.
비행기 안에서 박기태가 공항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기 차로 날 집까지 태워다주겠다고 말을 했다.
늦은 밤.
"됐어요. 피곤할텐데 바로 들어가요. 난 택시 타고 가서 영수증 처리하면 돼."
"어차피 가는 길인데요, 뭘."
"진짜 괜찮겠어요?"
"괜찮습니다. "
그 마음이 기특했다.
가는 길은 뭐가 가는 길일까.
내가 서울 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일단 말은 알았다고 했지만, 서울까지 들어와서 중간에 내려 택시를 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인천 공항에 도착을 딱 했는데...
비행기가 착륙을 하고 12시간 40분 만에 스마트 폰을 켰을 때였다.
카톡, 카톡카톡카톡...
밀려있던 카톡 알림이 성가실 정도로 쉬지않고 울렸다.
"...!"
그리고 난...역시 결혼을 참 잘했단 생각을 하게 됐다.
-나 잠이 안와서 공항에 당신 데리러 가는 중. 썬
여기서 썬은 내가 강혜선을 폰에 저장시켜놓은 일종의 애칭이다.
-혹시 모르니까 도착하면 바로 전화 해. 썬
-공항 도착. CU 편의점 쪽 게이트에 있음. 썬
강혜선의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는 동안 난 알 수 없는 이유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박기태에게 말했다.
"집 사람이...픽업을 나왔다고 하네?"
"크흐...여윽시, 신혼!"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입국장 게이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강혜선을 보는 순간, 마치 신혼이 아닌 다시 연애를 하던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주차를 시킨 위치가 달라서 박기태와는 입국장 게이트 앞에서 헤어졌다.
"그건 뭐야?"
"아, 이거..."
스폰짜에게 받은 결혼 선물.
난 그걸 강혜선에게 빼앗기는 마지막 순간 까지도 갈등을 하고 또 갈등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