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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19화 (119/325)

# 119

출장가기 딱 좋은 날씨네

"글쎄요...뭔가 상당히 대단한 걸 저희 쪽으로 양보하신다는 뉘앙스로 말씀을 하시는데, 그걸 듣고 있는 제 입장에선 과연 저희 홍성이 일본 시장을 떠안아서 무슨 이익이 있을까 싶군요."

토론도 마찬가지지만 협상이란 걸 하다보면 쉬운 내용을 어렵게 돌려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치고 가진 무기의 위력이 큰 경우는 별로 없다.

주로 말을 주렁주렁 늘리는 사람들일 수록 자신이 가진 무기에 대한 확신이 크게 없는 경우가 대부분.

내 기준에서 만토바 채널을 뚫어주기만 하면 일본 시장을 홍성에게 양보하겠다는 미하엘의 제안은 미하엘 본인 스스로도 머릿속으로 만토바가 뛰어든 아시아 마켓에 대한 이해와 정리가 다 되지 않은 내용을 의미없는, 하지만 그럴싸한 포장지로 감싸서 상대

를 현혹시키는 얄팍한 수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난 나크리스 측의 다급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어쨌든 내가 직접 수고를 해서 나크리스를 한국 시장에 띄워 놓았기에 그들이 죽는 모습을 가만히 뒷짐지고 지켜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미스터 양 생각은 어떠십니까?"

상대가 보는 앞에서 최소한의 매너를 지키기 위해 영어로 양 팀장에게 물었다.

"저 역시 미스터 공과 같은 생각입니다. 저희가 나크리스 일본 시장을 떠안아서 어떤 이익을 발생시킬 수 있을까요? 현재의 마진 베이스를 그대로 가져가야 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 아닐까요? 아니, 오히려 나크리스를 대신해서 약간의 커미션만 보고 일

본 시장을 대신 컨트롤해줘야 하는 책임만 떠안게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럴 에너지와 그걸 소화 시킬 맨파워로 차라리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팔리는 브랜드에 좀 더 집중을 하는 게 훨씬 더 남는 장사죠."

상대는 말이 없었다.

양 팀장의 그 말은 아직 나크리스는 그정도 레벨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둘러서 한 거다.

한 4,5년 전 쯤에 이탈리아 브랜드 '러브 모스치노' 컬렉션을 우리 홍성이 그런 식으로 일본 시장까지 함께 컨트롤했던 케이스가 있다.

모스치노는 베르사체 수석 디자이너가 독립을 하면서 새로 론칭한 브랜드인데, 모스치노, 모스치노 컬렉션, 러브 모스치노 등 가격 포지셔닝에 따른 라인이 몇 개가 있다.

러브 모스치노는 다른 라인에 비해 아무래도 가격대가 대중적이었고, 디자인이나 컨셉 자체가 두루뭉실했다.

하지만 모스치노 자체가 워낙에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를 뿌리고 있던 시기였기에 러브 모스치노를 잡는 것만 해도 큰 메리트가 있는 상황.

당시 홍성은 모스치노 컬렉션을 포기하는 대신 러브 모스치노의 일본 시장 유통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크리스는 솔직한 말로 그정도 레벨이 아니다.

"마진에 큰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희 입장에서는 별다른 재미 없이 나크리스 본사를 대신해서 나크리스가 신경 써야하는 일본 시장을 대신 컨트롤해줘야 하는 부담감과 책임감만 떠안는 거 같은데요?"

양 팀장의 말이 정확한 거다.

특정 국가에 한정된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슈를 뿌리고 있는 브랜드라면 브랜드 확보 차원에서라도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데, 나크리스를 가지고 우리가 그런 호구짓을 해줄 수는 없지.

상대는 입맛을 다셨다.

마치 자신이 준비해온 비장의 카드가 우리 홍성 입장에선 아무런 흥미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공황을 맞은 듯 했다.

그런 미하엘에게 내가 말했다.

"방금 제안하셨던 그 카드는 나크리스가 홍성을 상대로 꺼낼 것이 아니라, 나크리스를 대신해서 홍성이 만토바에게 꺼내볼 만한 카드인 거 같습니다."

옆에서 양 팀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다 오픈하고 이야기 합시다. 홍성은 둘러가는 걸 잘 못합니다. 그러기엔 서로 시간도 촉박한 것 같고. 수요일부터 전 만토바 출장이 잡혀있는 상태입니다. 그 출장에서 만토바 창고 사장님들을 상대로 나크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다 되는 건 아닙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방금 미스터 밤베르그가 저희에게 했던 제안을 무기로 만토바 창고 사장님들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분명 만토바 창고 사장님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겁니다. 우리가 왜 나크리스를 해야 돼?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사실...너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

까. 만토바 입장에서도 노력 대비 어마운트가 크게 올라가는 브랜드들에 집중을 하고싶지, 팔려고 애를 써야만 간신히 팔 수 있는 브랜드를 굳이 자기네 돈 투자해가며 새로 받을 이유는 없는 거니까요. 사업 아닙니까?"

"...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이만큼의 매출이 올라오고 있는 브랜드이고, 또 일본 채널 유통권을 만토바가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그리고 현재 저희 홍성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제가 푸쉬를 조금만 강하게 해버리면 만토바 입장에서도 고민 정도는 해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네."

"하지만 번들(일종의 끼워팔기- 만토바의 스타일이다. 큰 영향력이 없는 소매업자들이 만토바에 물건을 떼러가면 상대에 따라서 브랜드 번들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매 업자들이 만토바를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마진 때문이고.) 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 부분은 예민한 부분이라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현재 저희는 그런 것까지 다 신경 쓸 처지가 아닙니다."

"자...그렇게 해서 저희가 나크리스를 대신해 나크리스를 만토바에 넣었다고 칩시다."

"..."

"저희에게 나크리스는 뭘 해주실 수 있습니까?"

"...뭘 저희가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난 테이블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려놓고 두 손바닥을 상대를 향해 내보이며 어깨를 살짝 들었다 놓았다.

사실 이정도까지 이야기가 나왔으면 난 홍성이 뭘 원하는지 다 이야기를 했다고 본다.

여기에서 모르는 척, 내 입으로 직접 민망한 마진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다면 상대는 그만큼 덜 급한 거고.

"마진 조율을 원하시는 겁니까?"

"음..."

장 부장의 말처럼 쥐를 쫓더라도 도망갈 구멍 하나 정도는 만들어줘가며 쫓아야 하지 않을까.

"나크리스에 닥친 자금난의 가장 큰 원인이 저희 홍성과 한 컨사인먼트 계약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죠?"

"거기에 플러스 겨울 컬렉션에 너무 무리한 투자를 했습니다."

"현재 홍성이 나크리스에게 해주고 있는 페이먼트 방식이 익월 정산입니다. 당월 정산으로 변경시켜드리겠습니다."

"...!"

양 팀장은 당황을 했고, 난 그런 양 팀장의 손을 테이블 아래에서 살짝 건드려놓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단 급한 불은 꺼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번달 정산은 두 달치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의류 파트, 가죽 파트에서 각각 3퍼센트씩 마진 다운을 요청드리고 싶은데...괜찮으시겠습니까?"

사업이라는 게 받을 돈은 최대한 빨리 받고, 줄 돈은 최대한 늦게 줘야 하는 거다.

하지만 여기에도 변수는 존재한다.

특히 우리 처럼 유통 쪽은 단 1퍼센트라도 마진 협상에 성공을 하면 얼마든지 익월 정산을 당월 정산으로 변경시킬 수도 있다.

그 1퍼센트가 매장 직원들 인센티브로 변해서 한 달치 매출을 더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만토바 출장 이틀 전.

난 나크리스 측 관계자들과 미팅을 끝내고 곧바로 장 부장을 찾았다.

그리고 나크리스로부터 약속 받은 3퍼센트 마진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고, 그들에게 해주고 있는 정산 방식을 변경해주자고 제안했다.

"일단 만토바 넘어가서 정확하게 나크리스를 연결시켜놓고 와. 뒤에 이야기는 갔다와서 다시 하자."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헷갈리지 마라."

"...?"

"만토바 출장...쁘띠토널 건으로 가는 거지 나크리스 때문에 가는 거 아냐."

"물론이죠."

그렇게 떠나게 된 만토바 출장.

"차장님!"

"어, 박 대리! 천천히 와, 천천히."

인천 공항 국제선 청사.

기내용 슈트 케이스를 끌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는 박기태.

보조를 해줄 인원이 한 명 정도 필요했는데, 박기태 말고는 딱히 데리고 갈만한 인원이 없었다.

안 팀장에게 부탁을 해서 박기태를 출장길에 데리고 갔다.

"어휴, 진짜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너무 막혀서..."

"괜찮아요. 나도 이제 막 왔어. 그러게 내가 그냥 공항철도 타고 오라니까."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거 타고 오려면 세 번을 갈아타야 합니다."

"아침 밥은 먹었어요?"

"아뇨, 아직..."

"수속 빨리 끝내놓고 안에 들어가서 커피 부터 한 잔 하자."

"네, 가방 이리 주십시오."

"아, 됐어. 그냥 가."

출장 길이 이렇게 설레는 게 과연 얼마 만일까?

처음 홍성에 입사를 하고 바닥 일만 죽어라 하다가 처음으로 당시 팀장이었던 장 부장이 "야, 너 이번 주말에 뭐하냐? 마땅히 할 거 없음 금요일에 나랑 같이 출장 한 번 안갈래?" 해서 갔던 게 나의 첫 해외 출장이었다.

당시 난 주말을 반납하는 게 손해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드디어 나도 해외 출장을 간다는 들뜬 마음만 있었던 거 같다.

쇠도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갖추고 있었던 내가 아닌가.

주말 정도 반납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난 이번 출장길에 당시 첫 해외 출장길에 오르던 때와 비슷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터가 나의 개인 시간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일을 하는 순간이...내 개인 시간인 것만 같다.

그리고 출장은 그냥 휴가를 받은 기분이다.

"아...출장가기 딱 좋은 날씨네..."

"...?"

"박 대리."

"네, 차장님."

"만나고 있는 여자 있다고 했죠?"

"네."

"천천히 해요. 천천히..."

"...뭘요?"

"뭐든."

그렇게 떠난 만토바 출장.

"하이, 미스터 공!"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스폰짜!"

"컴, 컴...빨리 이쪽으로."

"...?"

날 보자마자 미스터 스폰짜가 어딘가로 날 데리고 갔다.

그의 창고 한쪽 귀퉁이었다.

"늦었지만, 정말 너무너무 축하해요."

"...네?"

"결혼."

"아..."

"이거 미스터 공한테 주려고 내가 따로 빼놓은 거예요. 신상이야."

창고 한 쪽에 흰색 천을 덮어 놓은 좁은 원탁 테이블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원탁 테이블 위로는 장미꽃 한 송이가 들어간 꽃병이 있었고, 그 꽃병 앞으로는 보떼가 장지갑 하나와 그 지갑과 같은 컬러의 여성 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내가 주는 결혼 선물."

"어후...이건 너무..."

"으으음...부담 느낄 건 없고. 우리가 물건 오더하기 전에 브랜드 업체들한테 받는 샘플 있잖아. 디피용으로. 이게 제일 괜찮은 거 같아서 따로 빼놨어요."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건지..."

"언더 더 테이블 아니에요. 내가 미스터 공 상대로 언더 더 테이블 해서 뭐하려고? 사업 파트너 이전에, 그냥 친구 개념으로 주는 거예요."

스폰짜는 박기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박기태는 그런 스폰짜를 상대로 자기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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