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비즈니스를 가장 비즈니스 답게 만들기 위해
"출장?"
"응, 다음주 내내 바쁠 거 같네."
이런 말을 꺼낼 땐 일단 진심부터 숨겨야 한다.
진심이 탄로나는 순간 의리에 금이 가니까.
최대한 피곤한 척,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얼굴 표정을 연출시켜놓고 젓가락으로 집은 김으로 밥을 감았다.
저녁 8시 40분.
맞벌이를 하다보니 연애 시절 때와는 달리 저녁 식사 시간은 자동적으로 늦어지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연애 때야 만남이 곧 데이트다보니 밖에서 사먹는 게 당연시 됐는데, 이젠 없는 반찬으로라도 집에서 해먹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징징짜는 소리를 할 수도 없는 게 강혜선이 밥을 차리는 동안 난 수저 세트를 챙기는 게 고작이니까.
물론 설거지는 강혜선의 컨디션에 따라 복불복이다.
"월요일에도 회사에 손님이 와."
"무슨 손님."
"브랜드 업체 관계잔데, 출장 스케줄상 어쩔 수 없이 월요일에 내가 급하게 케어를 해놓고 수요일에 출장을 가야될 거 같애. 원래라면 양 팀장한테 토스하고 난 화요일에 간단하게 회사에서 미팅만 하려고 했는데, 일정이 꼬여버렸네."
"그럼 출장 갔다가 언제 오는데?"
"똑같지, 뭐. 금요일 밤 비행기로 들어올 거야."
"...피곤하겠다."
완벽한 세팅이다.
그동안 내가 강혜선을 상대로 상당히 잘해놓은 부분이 하나 있다.
전근은 있지만 출장의 개념이 전혀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강혜선.
그녀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해외출장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강혜선은 그 부분에 대해 동경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회사 돈으로 비행기표를 끊고 마일리지는 내가 챙기는, 그리고 가끔씩 가는 출장때마다 호텔 조식을 먹을 수 있고, 또 일정이 빨리 끝이나면 약간의 자유시간도 가질 수 있는 그 해외 출장, 그 중에서도 유럽 출장을 그녀는 멋이 있다고 표현했다.
그녀가 잦은 나의 출장을 부러워할 때마다 난 내가 가는 출장의 무게를 어필하기 위해, 마치 군필자들이 늘어놓는 군대이야기처럼 약간의 뻥을 섞어 쉽지 않은 업무임을 강조해왔었다.
실제로도 출장에서 복귀한 다음 날은 시차적응을 위해 하루종일 좁은 원룸 골방에서 시체놀이 하는 모습을 몇 차례나 보여줬었고.
그러다보니 이젠 내가 출장을 간다고 말을 하면 안쓰러워한다.
"나 출장가면 토요일까지 부모님 집에 가 있어. 혼자 있기 무서울 거 아냐."
그 와중에 혼자 남게 될 강혜선을 챙기는 여유까지.
"무섭긴. 내가 무슨 애야?"
"장인, 장모님도 외로우실 거 아냐. 지금까지 품고 있다가 한순간 시집가서 따로 살고 있는데, 한 번씩 나 출장갈 때라도 부모님 집에가서 애교도 좀 부려주고..."
이런 세심한 남편, 사위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식사를 하는 동안 늘어놓은 출장 이야기 때문인지, 강혜선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샤워를 하러 가지 않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렇게 정한 건 아닌데, 언제부턴가 식사를 끝내고 강혜선이 바로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그날 설거지는 내 몫이 되는 거였고, 그녀가 곧바로 설거지를 시작하면 난 잠시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담배 피러 나갈 거지?"
"응."
"잠깐만...나가는 길에 분리수거 한 번만 해줘."
"챙겨줘."
"다 챙겨놨어. 쇼핑백만 가지고 가. 쇼핑백 버리지 말고 챙겨서 와. 마트에서 천 원 주고 산 거야. 일회용 쇼핑백 아냐."
"오케이."
이정도면 선방한 거다.
어차피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는 내 몫이니까.
"잠깐, 잠깐..."
"...?"
"오는 길에 편의점 들러서 맥주 좀 사와. 수입맥주. 네 캔에 만 원 하는 거."
"그런 건 좀 미리미리 생각해 놨다가 아버님 편의점에서 한 번에 많이 사가지고 오면 좋잖아."
"그거 사러 거기 들렀다가 집에 오자고? 체력이 남아도니?"
언제부턴가 나에게 뭔가를 시키는 게 상당히 당당하고 또 자연스러워진 강혜선.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견딜만 하다.
"후우..."
분리수거를 끝내놓고 그 근처 구석진 곳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난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하는 걸 실감한다.
그리고 하루를 정리하면서 피우는 담배만큼 맛있는 담배는 없다.
결혼 생활 3개월차.
대학을 졸업한 뒤부터 쭈욱 독립을 해서 혼자 살아왔던 나.
그리고 결혼을 통해 비로소 부모님들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강혜선.
난 결혼을 통해 스스로 내 자유를 묶은 꼴이었고, 강혜선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연애 때와는 달리 강혜선은 점점 더 내게 의지를 하기 시작했고, 난 연애 때보다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후우..."
결혼을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결혼 생활이 이렇게 밋밋하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다 책임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어차피 같은 상대와 결혼을 할 거 연애의 감정을 좀 더 누린 뒤 하는 게 어땠을까...하는 후회는 종종한다.
난 결혼이라는 구속력이 있어야만 강혜선이 내 여자가 된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구속력은 강혜선을 내 여자로 만든 게 아니라 날 강혜선의 남자로 만들어 놓았다.
월요일 오후 3시.
나크리스에서 미하엘 밤베르그와 그의 여 비서 한 명이 겨울 컬렉션 카탈로그가 든 슈트케이스를 끌고 홍성 본사를 찾아왔다.
김형찬이 나크리스에 있을 때 했던 것처럼 공항까지 사람을 보내서 직접 픽업을 해주지는 않았다.
일요일 저녁에 한국에 왔다고 하던데, 따로 챙겨준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그냥 다른 브랜드 관계자를 만나는 것처럼, 정확하게 갑의 입장에서 을을 맞이했다.
김형찬을 통해 한가지 크게 배웠다.
비즈니스에서 잘 지켜지는 갑과 을의 관계는 때론 갑을 위함이 아니라 을의 변질을 막아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공은태 입니다."
"나크리스의 미하엘 밤베르그 입니다."
우리 쪽에선 나와 양 팀장이 나갔다.
공격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미팅을 위해 장거리 비행을 해서 온 상대의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미팅은 직접적이어야 했다.
불필요한 미사여구는 나중에 양 팀장과 따로 하라고 하고, 난 미하엘 밤베르그가 직접 한국까지 온 이유를 바로 물어봤다.
"홍성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입장입니다."
상대 역시 둘러갈 형편이 못되는 거 같았다.
곧바로 이번 한국 방문의 목적이 적힌 카드를 꺼내놓는 미하엘 밤베르그.
"편하게 이야기 하시죠."
"재정적으로 큰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발주 컨펌이 모두 끝난 겨울 컬렉션 모두가 콘크리트(기대치보다 물량 회전률이 나오지 않아 곧바로 이월 상품이 되는 경우) 되기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와있습니다."
나와 양 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직 저희 쪽에서는 겨울 컬렉션을 보지도 못했는데요?"
"그냥 그대로 진행을 하면 될 거란 말을 믿었던 저희 탓이겠죠."
"뭘...그냥 그대로 진행을 하면 된다는 말씀이신지..."
"중국 진출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나와 양 팀장은 다시 한 번 눈빛을 주고받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싶어 하는 건지 맥락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홍성이 현재 만토바 아시아 마켓 유통권을 잡으면서 진행한 중국 진출에 저희 나크리스도 함께 포함이 된다라고 했었습니다."
"...누가요?"
알면서도 물어본 거다.
너무 어이가 없었으니까.
"미스터 킴이죠."
"저희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그런 말이 잠시 나왔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약속을 한 적은 없죠. 그리고..."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이번엔 나와 양 팀장 둘 다 상당히 놀란 상태에서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태생 자체가 이정도로 저자세를 보일 수 없는 애들이 바로 유럽, 그 중에서도 패션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애들이다.
특히나 명품을 취급하는 애들은 자존심이 곧 자기네 브랜드의 퀄리티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자기들이 기어들어와야 하는 입장에서도 엄한 콧대를 세우다가 피를 보는 경우도 허다하고.
"미스터 킴의 말만 믿고 겨울 컬렉션 1차 오더를 전년대비 3배까지 올려놓은 상황입니다. 기본적으로 단가가 높은 겨울 컬렉션이라 콘크리트가 되는 순간 저희는 숨통이 막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정도 콘크리트로 재정적 위기라는 표현을 쓰신다는 게...저희 입장에선 이해가 잘 안되네요."
"그동안 홍성과 해오고 있는 계약 조건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
"현재 두 시즌 제품을 모두 홍성 쪽으로 컨사인먼트 공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상품 대금을 받아가면서 회전을 시키고 있는 게 아니라 두 시즌 정도의 대금이 묶인 상태에서 새 시즌 컬렉션을 준비하다보니 문제가 생길 수 밖에요. 저희도 처음엔 홍성에서 재
고를 대량으로 소화를 해주다보니까 이게 기회라고만 생각을 했는데...컨사인먼트의 약점이 현재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중국 시장에 대한 기대만 가지고 무리한 투자를 했고, 그게 현재 저희가 알고 있던 내용과 홍성의 생각이 다르다
는 걸 알게 된 지금은...저희 입장에선 위기입니다."
미팅을 시작한지 20분 정도 만에 내가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자고 제안했다.
사업이라는 게 난 그렇다고 생각한다.
홍성이 피해를 봐선 절대 안되지만, 그렇다고 벼랑끝에 몰려있는 상대를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거 아닌가.
양 팀장과 바로 옆 회의실에서 짧게 말을 맞춘 다음 다시 시작된 미팅.
"죄송합니다. 저희도 살짝 당황을 해서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먼저 생각을 한 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현재 중국에서 하고 계시는 만토바 브랜드들에 저희 나크리스 겨울 컬렉션이 풀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저희 홍성과 만토바는 별개입니다. 저희 홍성은 만토바의 몇몇 창고가 취급하는 브랜드들을 중간에서 대신 컨트롤해주고 있는 에이전시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브랜드 초이스에 저희가 관여할 수 있는 파워는 없습니다."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이 벼랑 끝에 서면 저런 눈빛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을 해본다.
그리고 옆 방에서 양 팀장과 나눴던 이야기, 그리고 양 팀장이 내게 보여준 자신감을 근거로 딜을 걸어봤다.
"미스터 킴이..."
"자리에 더이상 없는 사람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을 거 같고요, 만약 저희가 귀사의 브랜드를 위해 대신 만토바 측에 부탁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귀사는 저희 홍성에게 뭘 해줄 수가 있습니까?"
"흐음..."
"비즈니스를 가장 비즈니스답게 만들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에게 고맙다거나 미안한 감정을 가져선 안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필요하신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아뇨, 아니죠.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곤란하죠. 해주실 수 있는 부분을 말씀해주세요. 이상하게 나크리스와 일을 할 때마다 저희가 나크리스를 쥐어짜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항상 불편합니다. 이번 방문도 마찬가지고요. 저희 홍성은 나크리스의 입장
에서는 최고의 고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닌가요?"
"맞습니다."
슈어, 오브 코스...
그 영어에 힘을 주고 있는 미하엘 밤베르그.
그 부분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고객을 상대로 이렇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시면...그게 누구라도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중국 진출을 도와주시면..."
"정확하게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단순 중국 진출인가요, 아님 앞으로 만토바 쪽으로 물량을 대보고 싶으신 건가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러시겠죠. 아무리 중국 시장이 크다 한들, 만토바 본진을 넘을 수는 없으니까요."
"만토바에 물량을 댈 수 있게끔 중간에서 도움을 주신다면...일본 시장을 홍성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콧끝이 간질거린다.
마치 고무 타이어가 타는 듯한 냄새가 콧가에 맴돌았다.
입 안으로는 침이 고였지만, 입술은 말라가고 있었다.
정말 간만에 대어를 낚은 기분이다.
"그게 정확하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일본 시장을 홍성에게 맡기겠다는 게..."
"같은 마진으로 지금껏 저희 나크리스가 해오던 일본 물량 공급을 홍성이 할 수 있도록 일본 쪽 에이전시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