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17화 (117/325)

# 117

어떤 무기가 필요하십니까?

-미하엘 밤베르그입니다.

독일권 태생인 모양이었다.

메일에 적힌 정보만 봤을 땐 마이클 밤버그 정도로 부르면 되나 싶었는데, 자신을 미하엘이라고 소개를 하는 걸 보니 독일권 사람이 확실했다.

영어발음 역시나 웅얼웅얼거리는 프랑스식 발음이 아니라 딱딱 끊어지는 독일식 발음이었고.

"한국 방문을 준비중에 있다고 하셔서 혹시 무슨 이벤트가 있나 싶어 연락드려봤습니다."

-미스터 공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정만 조율이 된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저희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가 편하십니까?"

-다음주 월요일은 어떠십니까?

"음...잠시 스케줄 확인 좀 해보겠습니다."

잠시 시간을 벌어놓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리고 비어있는 월요일과 화요일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우선 월요일은 그대로 비워놓고 화요일에만 '나크리스 미팅' 이라고 표시를 해뒀다.

내가 상대를 만나기 전 양 팀장을 먼저 보내는 게 아무래도 좋을 거 같았다.

상대는 날 직접 만나고싶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크리스는 양 팀장의 기획 1팀 담당이다.

"혹시 통화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들인 건가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데, 특별한 이벤트도 없이 미팅만을 위해 여기까지 오신다는 게 저희 입장에선 조금 부담스러워서요."

-한국 일정을 끝내놓고 일본을 경유해서 복귀할 계획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 거라면 부담이 조금 덜하네요. 한국에는 얼마나 계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미스터 공과 약속을 잡았으니, 이제 일본 에이전시 측과 약속을 잡아봐야 될 거 같습니다.

"그래도 생각하고 계신 대략의 일정이라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한국에 계시는 동안 제가 계속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될 수도 있어서 미리 여쭤보는 겁니다."

-2,3일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루 정도는 저희 회사로 오셔서 인사를 나누고, 다른 일정은 나크리스 단독 매장 몇 군데와 H.I 편집샵 두어군데 둘러보시면서 매장 상황을 체크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미스터 킴이 나크리스와 헤어졌다는 소리를 조금 전에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미리 정보를 공유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워낙 급하게 결정된 사안이었고, 또 저희 나크리스 입장에선 미스터 킴이 설마 진짜 이렇게 무책임하게 등을 돌릴 줄 몰라 그의 포지션을 유예시키고 있었습니다.

"...?"

내가 영어가 부족한 건 절대 아닌데, 어째서 무슨 말인지 다 들어놓고도 이해를 못하겠지?

김형찬이 나크리스를 떠나게 된 게 급하게 결정된 것이라는 건 대충 이해가 됐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김형찬의 포지션을 계속 유예시키고 있었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만나서 물어봐도 되는 부분이지만, 이상하게 궁금했다.

"무책임하게 등을 돌렸다면..."

-일방적인 계약 파기였습니다. 처음 그가 더이상 출근을 하지 않았을 땐 소통상의 문제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실례가 안된다면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홍성 입장에서도 나크리스를 받은 가장 큰 이유가 미스터 킴이었기에 상당히 당혹스럽습니다."

-이해합니다. 바로 어제까지 저희 모두가 그랬으니까요.

"어제요?"

-미스터 킴의 계약 기간은 항상 1년이었습니다. 비자 문제도 걸려있고, 본인 역시 그걸 원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조금씩 조건을 업그레이드 시켜서 계약을 다시 했고, 지금이 3년차 계약인데, 아무리 좋은 기회를 잡았어도 계약 기간은 다 소화를 해주고 옮길 줄

알았죠. 그런데 바로 어제 미스터 킴이 옮기기로 한 회사 쪽에서 그의 계약 파기에 관한 비용 전부를 대신 지불하겠다는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정도 실력자는 아닌데...

물론 박 이사를 통해 홍성에 나크리스를 밀어넣고, 작년 한해 홍성이 나크리스를 그만큼 띄울 수 있게 만든 게 나크리스의 입장에선 김형찬의 능력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나.

아닌 말로 작년 한 해 내가 팀장을 달고 처음 맡은 나크리스, 당시 내게 나크리스를 띄워야하는 절실함이 없었다면, 나크리스는 아직까지 홍성 입장에선 그냥 있으나마나한 브랜드 목록에 들어있을 수 있을 수 밖에.

"미스터 킴이 옮기기로 했다는 회사가 혹시..."

-이미 옮겼습니다, CGM 독일 본사 해외 파트로요.

"...!"

-그에 관한 이야기와 그가 빠지고 난 뒤 앞으로 어떻게 저희 나크리스와 홍성이 지금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에 관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나누고 싶습니다.

상대와 통화를 끝내고 난 한참동안 멍을 때렸다.

우와, 이럴 수도 있는 거구나...

하긴, 도의적으로야 말이 안되는 거지만, CGM이 계약 파기에 관한 비용 전부를 대신 지불하고 스카웃을 했다면...

그런데 진짜 이해가 안된다.

김형찬은 그정도 대우를 받고 스카웃을 받을 정도의 실력자가 절대 아닌데...

계약 파기에 관한 비용이라고 해봤자, 그가 무슨 유명 스포츠 선수도 아니고, 개인이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수준이겠지만,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 입장에선 정말 푼돈 중에 푼돈일 것이다.

하지만 포인트는 이미지.

나크리스 안에서의 김형찬 포지션이면 회사 운영에 깊게 관여된 포지션인데, 그런 포지션에 있는 인물을 그렇게 매너없이 빼돌려도 되는 걸까?

하긴...한국에 들어온 CGM이 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신경을 안쓰는 기업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하게 마음이 짠해졌다.

어쨌든 내겐 내가 팀장을 달고 처음 단독으로 준비했던 브랜드 아닌가.

내가 얄밉게 보고 있었던 김형찬이 빠진 지금의 나크리스.

이상하게 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날.

거진 보름 가깝게 프랑스 출장을 떠나 있었던 이문 본부장이 드디어 회사로 복귀를 했다.

그의 복귀와 동시에 전사 운영본부와 영업부, 그리고 영업 지원부, 재무 리스크팀이 회의 장소로 모였고, 상무보의 참관 하에 상당히 밀도가 높은 회의가 진행됐다.

밀도가 높을 수 밖에 없었던 게 회의 내용이 상당히 간결했다.

그만큼 이문 본부장이 프랑스 출장에서 가지고 온 결과물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몰 폰트 같은 경우는 현재 중국 자본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는 기업이었습니다. 보니까 베이비 크림 제작 유통 자체가 애초에 중국 시장을 겨냥해서 진행됐던 거 같아요. 시장에 나도는 정보만 가지고 밖에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직접 가서 접촉을 해보니

까 우리가 지분 매입을 통해 경영에 참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더라고요."

이문 본부장의 설명에 자리에 모인 모두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브랜드 매입이라는 게 돈만 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 거면 아무리 싼 값에 나왔더라도 우리 홍성 입장에선 투자를 할 의미가 없는 거죠."

상무보가 말했다.

그리고 그에 이문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죠. 반면에 쁘티토널의 경우는 우리가 그쪽에 지분 10퍼센트만 약속을 해준다고 하면 언제든지 넘겨받을 수 있을 거 같고요."

"지분 매입이 아니라요?"

상무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뇨, 그냥 시장에 나와있습니다, 현재. 제가 가서 몇 번이나 접촉을 해봤는데 패밀리 비즈니스입니다. 자식들이 회사 경영을 넘겨받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 부모 입장에서도 굳이 강요를 안하려고 하는...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지분 10퍼센트 정도는 손에 쥐고

있고 싶다는 입장을 말하더라고요."

"얼마에 나왔나요?"

"조율이 가능합니다."

"...?"

"재고를 다 안고 가느냐, 재고를 다 털고 가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지죠."

"그쪽에선 당연히 우리쪽에 재고를 다 안겨서 넘기려고 할 거 아닙니까."

"그건 이제 그쪽 입장인 거고, 우린 또 어떻게 해서든 최소의 투자로 브랜드를 잡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필요한 건 그들이 미리 만들어 놓고 팔지 못하는 재고가 아니라 그들의 브랜드,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운영 시스템 아니겠습니까?"

깔끔했다.

그의 말에 누가 반박을 할 수 있겠나.

"현재 그들이 확보하고 있는 유통 채널 정보를 받아왔습니다. 재무 리스크팀이 일을 좀 많이 해줘야 할 거 같은데..."

이문 본부장의 말에 재무 리스크 팀장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이거 가지고 밸런스 좀 맞춰봐요. 그리고..."

이문 본부장의 시선이 장 부장에게 고정되는 순간, 난 상무보를 바라봤다.

"영업부가 내게 무기를 좀 만들어줘야 할 거 같아요."

"..."

"우리쪽에서 재고를 떠안지 않아도 그쪽이 브랜드를 팔 수 밖에 없도록. 그 무기만 만들어주면 내가 그 무기 들고 넘어가서 바로 계약서에 도장 찍어버릴게."

"...?"

"어쨌든 그쪽은 지분 10퍼센트를 남기고 팔려고 해요. 그정도 배려는 해줘야지. 어차피 우리도 애초에 지분 매입 방식으로 접근을 했던 거니까. 그 지분 10퍼센트의 가치가 그쪽이 현재 제시하는 브랜드 가격보다 더 커질 수 밖에 없다는 확신만 주면...가격 깎

는 거야 일이겠어요?"

"어떤 무기가 필요하십니까?"

"만토바만 책임지고 뚫어줘요. 만토바에서 쁘띠토널을 받아준다는 약속만 있으면 끝나는 게임이야."

정말 깔끔한 미팅이었다.

미팅을 제안하기 전 이미 자신이 필요한 내용, 요구할 내용을 미리 다 정리를 해서 참석한 이문 본부장에게 박수를.

비록 30분 만에 후다닥 끝나버린 미팅이었지만, 각 부서별로 이번 공동 프로젝트에 어떤 도움을 줘야할지가 모두 명확해진 상태로 헤어질 수 있었다.

사무실로 복귀하는 동안 장 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우리가 프라다 빼앗겼을 때, 아니구나 빼앗긴 게 아니라 자기들이 이제부턴 직접 하겠다고 가져갔을 때."

"네, 기억납니다."

"그때 사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전투에선 질 수도 있지만, 전쟁 자체를 져선 안된다. 우리 사실 그때 프라다는 날라갔지만, 그쪽에서 얼마나 많이 배려를 해줬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재고들 원래 우리가 받아왔던 환율보다 더 높겨 쳐주고 또 매장 직원들

도 다 그대로 안고 가줬잖아."

"진짜 젠틀했죠."

"결국 우리 입장에선 프라다를 지키는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서 이긴 거란 말이야. 프라다 내주고 대신 프라다가 발망이랑 헤즈너를 우리쪽에 연결시켜줬잖아."

"...네."

"그거...이문 본부장이 했던 거야."

"...!"

"나도 얼마 전에 박 이사님한테 들은 이야기야. 질 거 같은 전쟁엔 절대 안나가는 분이지. 대단해. 그나저나 만토바...네가 정리할 수 있지?"

"껌이죠. 다음주 나크리스 미팅 끝내고 바로 만토바 출장 한 번 다녀오겠습니다."

"신혼인데, 출장 보낸다고 제수 씨가 나 욕하는 거 아냐?"

"그런 걱정 하지 마시고 출장 보낼 일 있음 앞으로 저한테 몰빵해주십시오. 이젠 뭐 저한테 출장만이 유일한 자유시간 아닙니까."

"...?"

"이제야 알겠습니다. 결혼 전에 합쳤던 그 한 달이 제게는 제 인생 마지막 자유시간이었다는 걸. 그걸 제가 제 발로 걷어찼다는 걸요."

"식 올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그런 소릴 해? 한창 깨만 쏟아져도 시원찮을 시기에.."

"하하하...그냥 웃자고 한 번 해본 소립니다."

"근데 너 입은 웃는데, 눈은 울고 있다?"

"하아..."

"쩝...뭐 다 그런 거지. 조금만 더 지나봐라. 밤 늦게 와이프 샤워하는 소리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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