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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16화 (116/325)

# 116

저희는 팔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3개월 뒤...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회사 업무와 항상 알뜰하게 챙겨쓰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막상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흐지부지 보내버리는 주말.

그렇게 특별한 이슈 없이 3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집에 모기 있어."

"응. 나도 간밤에 몇 번이나 깼어."

성질 급한 모기한테 올해 들어 처음 뜯겼던 날, 퇴근 후 나와 강혜선은 아파트 단지에 들어와 있는 과일가게에 벌써부터 참외와 수박이 메인으로 진열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이 짧아지면 짧아질 수록 우린 벌써 두 계절을 건너뛰어 가을이 아닌 겨울 컬렉션을 준비해야만 한다.

진짜 돈이 되는 계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느 브랜드를 막론하고 매장에 들어가는 신상은 현재의 계절보다 무조건 한 계절 앞질러야만 한다.

그리고 매장에 상품을 밀어넣는 우리 본사 영업부는 그 다음, 다음 계절을 준비해야 하는 거고.

명품들의 특징이다.

실제 매장에서 판매가 되는 상품들은 그 계절에 딱 맞는 것들이지만, 매장은 미리미리 다가올 계절 컬렉션들을 디피 시켜서 트랜드를 예고해야 하니까.

한 계절 앞선 컬렉션들을 매장에 디피 시키기 위해 본사는 그때부터 매장 실장들을 상대로 한 계절 더 앞선 컬렉션(컬렉션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확정된 트랜드)들을 공부시켜야만 한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업무가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

특히 겨울 컬렉션을 준비할 때엔 더 많은 신경을 써야만 한다.

속된 말로 잡화 쪽을 제외하고 의류쪽은 겨울 한 철 장사만 잘 해놓으면 그 한 철 장사로 일 년을 따뜻하게 버틸 수가 있다.

아무래도 반팔 티셔츠 열 개 파는 것 보다는 단가 높은 외투 하나를 파는 게 훨씬 더 쉬운 일이니까.

그러던 어느날 정말 뜻밖의 상대로부터 서툰 영문의 메일을 한 통 받게 된다.

사실 처음 메일을 받았을 땐 스팸 메일인 줄 알았다.

Appointment in seoul

Dear Mr. Gong.

If it is OK with you, i will visit to...

제목만 보고는 이게 뭔가 싶었다.

우선 내 메일에 저장이 안 되어 있는 상대였고, 또 제목만 봐서는 비즈니스적인 메일이 아닌 공개 컨퍼런스나 박람회 같은 정보를 담은 스팸메일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그런데 뭔가 싶어 메일을 딱 열어봤는데, 첫 줄에 Dear MR. Gong. 이렇게 적혀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난 그 메일이 나크리스 쪽에서 보낸 메일일 거란 건 전혀 생각을 못하고 건성으로 쭉쭉 읽어내려갔다.

...to bring the May incentive list and to review the product situation with you.

Thanks for confirming.

Kind regards

Michael Bamberger

Sales Director

농담 아니라, 메일을 보낸 사람이 내게 무슨 의도로 이런 메일을 보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열 번, 스무 번은 더 넘게 그 몇 줄 안되는 영문 메일을 확인했다.

근데 결국 난 그 메일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나크리스의 본사 세일즈 디렉터 쯤 되는 인물인 모양이다.

나크리스 정도 규모의 브랜드에서 세일즈 디렉터라고 하면, 브랜드마다 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일반 중소기업 부사장 정도 타이틀이라고 이해를 할 수 있다.

미국쪽 브랜드들은 예외로 두고 유럽 명품 브랜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마케팅 브랜드이냐, 아님 디자이너 브랜드이냐.

물론 당연히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대형 브랜드들은 마케팅 브랜드에 속하는 것이고, 나크리스처럼 이런 브랜드가 있었는지 조차 잘 모르는 브랜드들은 디자이너 브랜드에 속한다.

명품이라고 하면 대기업, 글로벌 기업...이런 이미지들을 먼저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재정적으로 무척이나 열악한 브랜드들이 태반이다.

아니, 존재하는 명품 브랜드들의 95퍼센트 이상이 재정적으로 무척 열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브랜드들은 당연히 나머지 5퍼센트에 속하는 것이고, 그마나도 정말 굵직한 대형 브랜드가 아닌 다음에는 언제든지 95퍼센트에 들어갈 가능성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나크리스는 그나마 좀 다행인 게 홍성을 잡기 전 이미 일본에서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고, 또 작년 한 해 H.I 편집샵이 빵! 하고 터지면서 한국에서도 꽤 재미를 봤다.

비록 지금은 김형찬 때문에 내가 나크리스에 정이 뚝 떨어져있는 상태지만, 작년 한 해 우리 홍성 역시 나크리스가 맞춰준 마진 덕분에 상당한 재미를 본 게 사실이고.

근데 본사 세일즈 디렉터가 왜 나한테 직접 메일을 보냈을까?

갑자기 몇 가지 추측을 가능케하는 단서들이 머릿속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묘한 촉도 함께 발동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 지혜 씨."

난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션 너머의 기획 1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아니. 앉아서 들어요."

"네, 차장님."

"5월 달 나크리스 인센티브 요청했어요?"

"아뇨, 아직 정리 다 못했습니다."

"음..."

"지금 필요하세요? 바로 정리해서 올리.."

"아니, 그런게 아니라 지금 나크리스 쪽에서 나한테 메일이 하나 왔네."

"담당자가요?"

이지혜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가 업무를 잘 못 봐서 우리쪽 담당자인 자신이 아니라 나에게 바로 무슨 컴플레인이라도 걸렸다고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아니요. 담당자가 아니라 거기 세일즈 디렉터가 바로 메일을 보냈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내가 메일로 보내줄게요. 지혜 씨가 그쪽으로 확인 한 번 해봐요."

이지혜는 내가 전달한 메일을 확인한 뒤 곧바로 김형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왜요? 전화 안 받아?"

"...네."

추측이 확신쪽으로 한 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본사로 전화 한 번 넣어보지?"

"...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을 내려서 돌아오던 양 팀장.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나와 이지혜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봤다.

"거기 담당자...아무래도 짼 거 같네요."

"째요? 뭘?"

종이컵을 입술에 붙인 상태에서 양 팀장은 눈을 크게 뜨며 어깨를 살짝 들었다 놓았다.

그리고는 이지혜의 컴퓨터 모니터를 내려다봤다.

이지혜가 건 전화를 나크리스 본사에서 받는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추측은 이미 사실이 되어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지혜가 몸을 옆으로 살짝 비켜주자, 양 팀장은 책상 위로 몸을 구부린 채 이지혜의 컴퓨터 마우스를 내려가며 메일을 읽기 시작했고, 잠시 뒤 날 향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담당자가 지난주에 그만 뒀다고...하는데요."

어이가 없는 거지.

진짜 딱 그정도 수준의 인간이었던 거다.

나크리스를 그만두는 거야 자기 개인의 결정이니까 그걸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래도 최소한 자기가 담당하고 있던 마켓에는 어떤 성질의 언질이 되더라도 언질 정도는 해줘야 맞는 거지.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크리스를 떠나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저를 대신해 누가 제 업무를 보게 될 것이며, 그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블라블라블라...

일반 사원이었다면 모르겠지만(일반 사원이라도 맡고 있는 업무의 중요도가 크다면 절대 그러면 안되는 거지만), 그래도 명색이 아시아 마켓 총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 아닌가.

상대는 홍성이고.

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주고 가야지.

누가 봐도 나크리스에서 홍성을 상대로 만들어낸 실적을 발판 삼아 다른 브랜드로 갈아탄 거 같은데, 그동안 이정도 기본도 안 되어있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해왔었단 말인가?

바로 어제 그만뒀다고 하면 이해라도 해보겠다.

하지만 지난주에 그만뒀다고 하지 않나.

그만두기 전까지의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기가 찼다.

그리고 파티션 건너편에선 양 팀장의 사인을 받은 이지혜가 나크리스 본사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지혜의 압박 내용은 단순했다.

담당자가 지난주에 그만뒀는데, 그걸 왜 아직까지 우리 홍성 측에 전달을 안해줬냐는 것.

나크리스 본사를 압박하는 이지혜의 모습을 보며 난 그냥 기계적으로 상대에게 답장 메일을 보내준 뒤 장 부장을 찾았다.

"웃긴 양반이네..."

장 부장의 첫마디였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뭐라고 답장 보내줬는데?"

"그냥 유감이라고 말해주면서 양 팀장 메일 주소 링크 하나 걸어줬어요."

"그래도 거기서 한국에 오면 공 차장 네가 나가봐줘야 하는 거 아냐?"

"상황봐가면서 조율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겨울 컬렉션 같이 푸쉬 해달라는 의미도 포함시켜서 겸사겸사 직접 찾아오는 거 같은데...어쩌면 저나 부장님이 안 나가고 그냥 양 팀장을 보내서 적당한 물량만 오더해주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나크리스...슈

즈 말고는 현재 딱히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도 나크리스만한 마진 주는 브랜드도 없다."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알았어. 가서 일 봐. 아참, 잠깐, 잠깐..."

"...?"

"어제 저녁 술자리에서 따로 들은 이야기 없어?"

어제 저녁 상무보와 단 둘이서 술을 한 잔 마셨다.

내 결혼식 이후로 난 상무보와 부쩍 가까워졌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꼭 상무보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갔고, 상무보와 개인적인 술자리를 가진 것도 몇 번 된다.

어제 저녁도 그랬고.

내가 상무보와 가까워지는 동안 장 부장은 박 이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인해 전무군단에 깊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장 부장은 내가 상무보에게 호출되어 가는 걸 상당히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었다.

자신이 수집하지 못하는 내용들을 내가 상무보를 통해 건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가벼운 마음으로 상무보와 가까워질 수 있었고, 또 이문 본부장이 예전에 말했던 것 처럼, 특정 개인에게 하는 충성이 아닌 내가 하는 일에 충성을 하며 회사를 다닐 수 있게 된 거 같다.

"아마도 '몰 폰트' 나 '쁘티토널'. 이 둘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은 거 같습니다."

"무슨 유아복 브랜드 네임이 아기아기 하지 못하고 이렇게 고상해? 난 유아복 브랜드는 하나도 모르겠다."

"몰 폰트는 사실 옷 보다는 아기들 크림이 상당히 유명한 브랜드입니다. 옷만 취급을 할 때엔 크게 뜬 브랜드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아기들 크림에 손대고 난 이후부터 급하게 인지도를 쌓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브랜드를 우리가 매입을 할 수 있어?"

"그야 뭐 이문 본부장님이 총대를 매신 거니까요. 우린 그냥 지켜만 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뭐가 됐든 저희는 팔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훗...하나 더는 뭔데?"

"그건 저도 공부를 좀 해봐야 될 거 같습니다."

"별로 안 유명한 브랜드야?"

"대충 검색을 해보긴 해봤는데, 아직 한국에는 안 들어와 있는 거 같더라고요. 나름 유럽 현지에서는 인지도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대충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 부장이 말했다.

"뭐 다음 회의 자리에서 무슨 말이라도 이야기가 나오겠지. 내일 돌아오시지? 이문 본부장님."

"네,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경 써서 서포팅해드려라. 결국은 너희 기획부 매출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 부장을 만나고 다시 돌아간 사무실.

메일이 또 하나 와 있었다.

상대는 아까 확인한 메일을 보냈던 나크리스 세일즈 디렉터였고.

나랑 통화를 하고싶다고 했다.

언제든 내가 편한 시간대를 알려주면 거기에 맞춰서 전화를 걸겠다고.

"흐음..."

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채 메일을 띄워놓은 모니터 화면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홍성 인터네셔널 공은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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