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그게 당신 진심인 거야
박 이사와 장 부장이 각각 30만 원씩 넣었다.
사실 난 그것 역시 너무 많이 넣었단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나.
우리가 어디 뭐 가족이나 가장 친한 친구들도 아니고 돈 벌겠다고 모인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 아닌가.
그것도 매일같이 물고 빨며, 또 때론 지지고 볶는 사이.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형편과 월급을 빤히 다 아는 사이였기에 특히나 장 부장이 넣은 30만 원도 난 솔직히 이 양반이 좀 오버했네...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업 마케팅, 영업 기획부 전체를 통틀어 영업부 직원만 몇 명인가.
50명이 넘어간다.
아무리 내가 자신을 받쳐주는 차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고 해도 확실히 30만 원은 장 부장이 평소 그가 하는 일반적인 경조사비에 비해 많이 넣은 게 맞다.
한 직장을 같이 다니는 사람들끼리는 비록 같은 부서가 아니더라도, 그걸 꼭 규칙으로 정하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다같이 따르는 기본 경조사비 테이블이라는 게 있다.
일반 사원일 때에는 상대가 누구든 한 5만 원 정도 넣다가 대리를 달면 사람에 따라 5만 원을 넣기도 하고 또 10만 원까지도 넣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다 팀장 쯤 달면 10만 원으로 통일이 되는 거고, 차장, 부장을 달면 20만 원씩은 해야 된다고 들었다.
팀장 연봉은 얼마에서 얼마 사이라는 식의 연봉 테이블이 있듯, 경조사비 역시 포지션에 따른 테이블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게 없으면 무슨 수로 대기업에서 차장을 달고 또 부장을 달겠나.
타이틀이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챙겨야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지는데...
월급받는 사람들 입장에선 경조사비에 들어가는 비용만큼 부담스러운 게 없는데, 그런 경조사비 테이블 조차 없으면 포지션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많이 내야한다는 인식 때문에 우리처럼 기본 세팅 맨파워가 많은 부서장들은 피땀흘려 받아가는 월급, 경
조사비로 싹 다 사라질 수 밖에.
우린 홍성 인터네셔널에 돈을 벌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친목 도모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개인 사업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최대한 안하고 안받는 게 가장 깔끔하지만, 또 그럴 수는 없으니 가능하면 암묵적으로 정해진 테이블 안에서 주고 받는 게 가장 현실적이다.
물론 박 이사와 장 부장이 넣은 30만 원은 그 나름의 명분이라는 게 있을 거다.
누가 뭐래도 난 지금 홍성 인터 영업부의 에이스니까.
그리고 회사가 가장 난처한 상황이었을 때 한 방을 크게 터뜨려 영업부의 위상과 자신들의 체면을 세워주기도 했고.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충분히 넣을 수도 있는 금액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상무보가 넣은 100만 원은 말이 다르다.
진짜 아닌 말로 내가 상무보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난 그의 결혼식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었다.
한 게 없는데, 받기만 한다?
그것도 이렇게 큰 금액을?
그가 상무보니까?
사장 아들이니까?
그건 진짜 아니지.
100만 원.
크다면 큰 돈이고, 또 상황에 따라 해야 한다면 나 역시 충분히 할 수도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무보가 내게 축의금으로 100만 원을 넣었다는 건 상당한 부담이었다.
상무보가 사장 아들이고, 또 언젠간 홍성을 이끌어갈 사람이라 미리미리 자기 사람을 챙기기 위함이라는 해석 역시도 그 금액을 이해하기엔 부족함이 컸다.
동네 구멍가게가 아니다.
사장 이하 임원들이 직원들 경조사에 일일이 다 참석을 하며 얼굴을 비추고 또 성의를 다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사부에서 포지션에 맞는 경조사비를 별도로 다 보내주기도 하고.
그리고 난 이미 그걸 받았다.
결혼식 3일 전에 인사부에서 내 폰으로 축의금 얼마가 들어갔을 거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그런데 상무보라는 사람이 직접 화환까지 보내고 축의금으로 100만 원을 넣었다?
내가 상무보가 한 축의금이 부담스러웠던 건 금액 때문이 아니라, 이걸 어떻게 갚아줘야하나...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양주 한 병 사야될 거 같은데..."
"양주? 무슨 양주? 집에 많잖아."
"그게..."
당연히 신혼 여행을 하는 동안 그 부분에 대해 강혜선에게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어차피 받은 돈 다시 돌려줄 게 아니라면 평생에 한 번 밖에 없을 신혼여행 기간 동안은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한국에 가서 생각을 하자고 마음 먹고 있었고.
그런데 신혼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면세점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양주 한 병은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만 원을 넣었다고?"
"거기다 그날 화환까지 보냈더라고."
"흐음..."
강혜선 역시 의아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다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바꾸며 이렇게 말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그 밑으로 넣기도 애매했을 거야. 안 왔으면 안 왔지, 사장 아들씩이나 되는 사람이 당신이 먼저 초대를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참석을 하겠다고 청첩장을 달라고 해서 온 건데, 내가 그 사람이라도 그 정도는 했겠다. 딱 적당하게 한 거 같구만,
뭐."
"여러모로 신경 쓰이네..."
"난 요즘 한 번씩 당신 보면 재밌어."
공항 면세점 안이었다.
난 뒤로 매는 가방과 기내용 슈트케이스를 들고 있었고, 강혜선은 회사 사람들에게 나눠줄 메이플 쿠키가 든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에 뭔가가 묻었던지, 손으로 그 뭔가를 떼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뭐가?"
"맨날 말은 이제 좀 편하게 당신 꼴리는대로 직장 생활을 하겠다고 하면서, 이럴때 보면 전혀 아닌 거 같아? 나보다 더 조심스러워."
"...?"
"로또에 걸리기 전엔 이것보다 더 했나? 이것보다 더 사람 관계에 신경을 쓰고, 계산하고...그랬어?"
"...!"
"난 뭐 그 전에 당신이 어떻게 회사에 다녔는지 모르니까."
강혜선이 하는 말을 듣고 보니까 진짜 그런 거 같았다.
오히려 로또에 걸린 이후부터 난 더 많은 욕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거 같다.
이게 사람 심리라는 걸까?
"마치...그런 거 같네. 왜 당신 마포 아파트 청약 떨어졌을 때 말이야. 어차피 우린 이미 충분한데, 충분하지 않은 거 같고, 또 충분히 마음을 비워도 되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되서 나도 모르게 아쉬웠던 느낌적인 느낌?"
"그럼 사. 제일 좋은 걸로."
바로 눈 앞에 양주 면세 코너가 있었다.
강혜선은 그 양주 면세 코너를 턱짓하며 뭘 고민하느냐는 식으로 얼른 들어가서 제일 좋은 걸로 하나 사서 나오라고 했다.
"한 번씩 당신이 나한테 그 상무보라는 사람 이야기를 할 때 있잖아. 그냥 내가 느끼기엔 당신은 지금 당신이 로또에 걸렸다는 걸 너무 의식하면서 그 사람을 대하는 거 같아. 그래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여. 굳이 안그래도 될 거 같은데, 일부러 그 사람과
힘들게 일하고 있단 생각이 드네? 그냥 원래 당신이 하던대로 해. 우리같은 은행에서야 끽해봤자 지점장이 최고니까 난 잘 모르지만, 그 상무보 정도 되면...사실 당신은 그냥 그 사람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하는 거 아냐?"
"...그렇지."
"나는 있잖아."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강혜선이 말했다.
"처음 당신이 로또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푸히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강혜선은 자신이 생각을 해봐도 우습다는 식으로 웃음을 흘렸다.
"완전 순한 양이 됐어. 회사에서 말이야."
"...?"
"평소 그렇게 짜증났던 홍 과장이 나한테 뭐라고 하건, 트집을 잡건 그냥 네...이거 알지? 아, 네...그래요? 알겠습니당...하는 말투."
"푸흡..."
"진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니까? 내가 그렇게 태도를 바꿔버리니까 홍 과장도 날 괴롭히는데 흥미를 잃어버렸나봐. 이젠 나한테 잘해줘. 이 인간이 미쳤나 싶을 정도로 날 막 챙겨. 당신도 그렇게 해. 말만 당신 꼴리는대로 직장생활 하겠다고 하지 말고,
정말 그러고 싶으면 나처럼 해. 당신 성격상 그게 안될 거 같으면..."
"..."
내 등을 양주 면세 코너 쪽으로 밀어넣으며 강혜선이 날 도발했다.
"그냥 차라리 더 욕심을 부려. 그게 당신 진심인 거야."
"...!"
"실은 당신도 궁금하잖아. 당신 회사 안에서 당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그래서 계속 나한테 하는 말과 회사에서 하는 행동이 다른 거 아냐? "
"아, 밀지마, 좀. 내가 가. 안그래도 한 병 사려고 했어."
"제일 좋은 걸로 사. 이번엔 상무보 그 사람이 부담스럽게. 그리고 그 사람이 당신에게 안심을 할 수 있게끔."
"근데 이사님이랑 부장님 것도 한 병씩 사야하지 않을까?"
"일 인당 한 병씩 밖에 못 들고 들어가. 그리고 집에 아직 박스도 안 뜯은 양주 많잖아. 그 두 분한테는 집에 있는 거 한 병씩 갖다 드려. 그래도 돼."
"근데 양주 사서 선물이랍시고 상무보 방 찾아가면 또 사람들이 뭐라고 뒤에서 수근거리지 않을까?"
"또 봐라. 뭘 그렇게 남의 시선을 신경 써? 받은 게 있는데 성의 표시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혹시라도 주위에서 좀 수근거리면 또 뭐 어때? 상무보라는 사람한테도 개기는 사람이..."
신혼 여행에서 복귀를 하고, 월요일 출근날.
난 영업부 직원들이 다같이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영업 마케팅부 탕비실과 영업 기획부 탕비실에 각각 메이플 쿠키 박스 두 통씩을 준비해놓고, 그 옆으로 비타민 음료를 인원수대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공항 면세점에서 산 양주 한 병을 들고 상무보 방을 찾았다.
박 이사와 장 부장은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서 따로 선물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똑, 똑...
난 조심히 상무보 사무실 문을 열었고, 상무보는 내가 들고 있는 쇼핑백과 내 눈을 번갈아쳐다가 보고 있던 업무를 잠시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혼 여행 잘 다녀왔어요?"
"식사도 못하고 그냥 바로 가셨다고...들었습니다."
"어후...손님들 많이 왔더라."
"제가 좀 더 신경 써서 챙겼어야 했는데...죄송합니다."
"으으음..."
상무보는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어디 뭐 거기에 부페 얻어먹으러 갔어요? 공 차장 결혼식 축하해주러 간 거지."
"...이거."
난 소파에 앉기 전에 준비해온 양주를 건넸다.
"뭘 또 이런 걸..."
"마땅히 뭘 사야할지 몰라서..."
"근데 이런 술은...혼자 마시면 맛 없지 않나요?"
웃음이 나왔다.
나에 대한 상무보의 마음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모든 술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 그날 밥도 못 먹고 그냥 갔는데, 언제 나한테 밥 한 끼 사야하는 거 아니에요? 공 차장 결혼식에 가서 축의금은 축의금대로 내고 박 이사님과 장 부장님 모시고 식사하러 갔다가 나만 또 눈탱이 맞았어."
"물론이죠. 편하실 때 언제든 말씀만 주십시오."
"으으음...공 차장이 날을 잡아요. 맨날 내가 공 차장 귀찮게 만드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좀 그래."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