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14화 (114/325)

# 114

뭐 어때, 이게 내 아버지인데...

"신랑 입장."

신랑 입장이란 사회자의 말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난 결혼식에 대한 실감이 크게 나지 않았던 거 같다.

본 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양가 어머님들의 화촉 점화 순서 때에도 난 초에 불을 붙이는 어머니, 장모님의 모습을 지켜보기 보다는 하객들, 특히 내 쪽으로 온 하객들의 모습을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누가 오고, 누가 오지 않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어떤 사람들에게 나란 사람의 성장 배경을 고백하게 될지...그걸 더 크게 신경 썼던 거 같다.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웨딩홀 소속의 행사 진행 직원 한 명이 다가와 꽃길 쪽을 손짓하며 지금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생각보다 짧은 길이었다.

양가 하객들을 향해 최대한 침착하게 고개를 숙이며 입장을 했고, 상무보와 박 이사가 나란히 앉아있는 테이블과 눈이 마주쳤을 때엔 더 의젓한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허리를 바로세웠다.

"신부 입장."

내가 이상한 놈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장인 어른의 손을 잡고 꽃길 위를 걷고 있는 강혜선의 모습이 특별히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아슬아슬했던 거 같다.

입장을 하는 동안 긴 드레스를 밟아 넘어지지는 않을까, 왜 저렇게 천천히 걸어오지? 그냥 내가 몇 발 다가가서 얼른 손을 넘겨받을까? 하는 생각만 했던 거 같다.

그러다 딱 한 순간.

내가 서있는 곳과 강혜선이 걸어오는 곳의 거리가 약 10미터 정도로 좁혀졌을 때, 난 비로서 강혜선이 오늘따라 유달리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웨딩홀 조명을 제대로 받은 지점이 아니었을까.

새벽부터 같이 일어나서 설쳤다.

풀 메이크업을 하는 모습, 올림머리를 트는 모습 모두를 옆에서 다 지켜봤었고.

그런데 웨딩홀 조명을 완벽하게 받고 있는 강혜선의 모습은 그 순간 만큼은 정말 아름다웠다.

"..."

당신의 막내딸 손을 내게 넘겨주시며, 장인어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웃으셨다.

그런 장인어른께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현한 후 강혜선의 손을 잡고 연단 위로 올라갔다.

주례 없는 결혼식.

고민을 많이 했었다.

돈을 주고 주례를 봐주실 분을 섭외할 것이냐, 아님 그냥 내가 사회를 봤던 지현이 녀석의 결혼식처럼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할 것이냐.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하자니 아버지가 걸렸다.

귀가 잘 안 들리시는 아버지.

주례를 대신해서 양가 아버님들이 덕담과 축사를 해야하는데, 그걸 과연 내 아버지가 잘 하실 수 있을까란 걱정이 날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돈을 주고 주례를 섭외하지 않고 주례 없는 결혼식을 선택한 이유는...더이상 내 아버지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뒤늦은 반성 때문이었다.

뭐 어때.

이게 내 아버지인데.

내 아버지가 이런 분이신데...

근데 뭐?

그동안 왜 그렇게 아버지의 귀가 잘 안들린다는 것에 대해 의식을 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귀가 그렇다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로또에 당첨이 되기 전까지의 난 나란 사람 자체에 대한 자격지심이 대단했었고, 그러다보니 귀가 약하신 아버지까지 내가 가진 약점 중 하나로 생각을 해왔었던 거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그런 약점들이 하나씩, 하나씩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 어때.

이게 내 아버지인데.

그런 아버지가 날 이렇게까지 키워주셨는데...

아버지 귀가 잘 안들리는 게 아버지 잘못도 아니고, 귀가 잘 안들려서 가장 피해를 입고 계신 건 내 아버지인데, 내가 왜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 해야 돼?

아니...어떻게 부끄러워했었지?

...죄송합니다.

"신랑, 신부 양가 부모님들 앞으로 가서 인사 드리세요."

강혜선은 나보다 강한 사람이 확실했다.

처가 부모님 앞에 서서 강혜선이 고개를 숙이는 동안 난 큰절을 한 번 드렸다.

그렇게 절을 올리고 난 뒤 혹시 몰라 고개를 돌려 강혜선을 쳐다봤는데, 그녀의 얼굴엔 미소만 번져있었지, 눈물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문제였다.

우리 부모님 앞에 절을 하는데...그냥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벅차오르면서 눈가가 간질거렸다.

그렇다고 촌스럽게 울었다는 건 아니고.

좁은 수선실 안에서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내고 계시는 내 부모님.

원래라면 지금쯤 조금은 편하게 노는 삼아 수선실을 나가셔도 될 분들이신데, 몇 년 째 우리 집안을 괴롭히고 있는 매형의 사업실패 그림자로 인해 아직까지 그 좁은 수선실을 마음놓고 나오지 못하고 계신다.

참 열심히 사신 분들인데...

어머니가 먼저 눈물을 보이셨는데, 난 그 눈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누나 때와는 너무 다른 결혼식 아닌가.

누나 때엔 그때 당시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었다.

첫 자식 결혼을 시킨다고 어머니가 신경 썼던 것들도 내가 알기로만 상당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 형편은 나름 괜찮은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위가 집안을 홀라당 다 말아먹고 하나 있는 아들은 부모 도움 일절 받지 못한 채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갔다.

그리고 그렇게 올라간 서울에서 가족들에겐 관대하지만, 본인에겐 자린고비 보다 더 짠 생활을 강행하며, 마침내 당신들의 마지막 남은 숙제를 해결해줬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짠하실까.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셔서 그랬던 건지, 아님 나도 뭔가 울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어머니의 눈물을 봐서 그게 촉매가 되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눈가가 계속 간질간질 거렸다.

정말 다행이었던 건 그냥 웨딩홀 천장을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를 보고 있는 혁재 이 놈이 엄한 걸 시킨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이랑 며느리 한 번씩 안아주세요."

그 큰 마이크 울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혁재가 뭘 주문했는지 제대로 잘 못알아듣고 계셨고, 어머니만 강혜선과 날 차례대로 안아주셨다.

그리고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아버지를 안았을 땐...생각해보니까 난 아버지를 처음 안아본 거 같았다.

안기기야 많이 했겠지.

너무 어려서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고.

그런데 내가 이렇게 아버지를 안아드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거 같다.

잠시 후 아버지가 연단 위로 올라오셔서, 결혼식에 와준 하객들을 상대로 감사의 인사, 그리고 축사와 덕담을 진행하셨다.

"제가 귀가 잘 안들립니다."

아버지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왔던 말.

제가 귀가 잘 안들립니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그 말씀을 하객들 전체를 상대로 하시고 난 이후부터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

"귀가 잘 안들리다보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하고 있는지 목소리는 괜찮은지...그걸 제가 확인을 하려면 제 목소리가 쪼메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근데 거기다 마이크까지 대고 말을 하면, 다들 괴로우실 거 같아서 고마 마이크 없이 한 말씀드리겠습

니다."

아버지가 하객들을 상대로, 그리고 나와 강혜선을 상대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도 잘 안난다.

듣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냥 난 아버지의 모습만 보였고, 마치 내가 귀가 잘 안들리는 사람이 된 것처럼 말씀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만 지켜봤던 거 같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옆에 있던 강혜선이 내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잘하시네."

그동안 내가 했던 염려에 대한 위로였다.

강혜선이 그렇게 말을 해주니까 난 또 그냥 그런가보다...했던 거고.

"은태야, 니 시간 좀 괜찮나?"

결혼식이 끝이 난 후 매형이 날 잠시 불렀다.

폐백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였다.

"네, 괜찮아요."

"조금 있다가 손님들 식사 다 끝나면 정신 없을 거 같아가지고..."

"...?"

"자, 일단 이거."

금강제화 쇼핑백.

그 안으로는 축의금 봉투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축의금을 낸 사람의 이름과 그들이 한 액수를 적은 방명록도 함께 들어있었다.

"혼자 식권 줘가며 받는다고 제대로 했는가 모르겠다. 내 혹시 몰라가 봉투에 돈 안 뺐다이. 나중에 니가 한가해지면 따로 다시 확인해봐라."

"맞겠지요, 뭐."

"그라고 이거..."

그리고 매형이 자켓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뭔데?"

"하이고, 마...좀 더 많이 넣어야 되는데..."

"아, 됐다. 뭔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라노. 고마 넣으소."

"자, 자..."

"아, 됐다고. 뭐 이상한 짓을 하고 있노."

하지만 매형은 한사코 내 주머니 속으로 그 봉투를 쑤셔넣고 부산에서 올라온 손님들을 챙기러 가보겠다고 했다.

백만 원이 들어있었는데, 그 순간 난 매형의 자존심까지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이걸 어떻게해야 할까 참 많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아, 씨이...쩝."

"왜?"

잠시 뒤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온 강혜선이 표정이 왜 그렇냐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거...매형이 주고 가네."

"뭔데?"

"...돈."

"그냥 받아. 여유 많네?"

"...?"

"난 지금 손님들 챙길 정신도 없는데.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아영이 용돈 따로 챙겨주면 되잖아. 부산 손님들 버스 가기 전에 얼른 뷔페 식당 내려가서 인사 해야지, 여기서 뭐하고 있어?"

버스 한 대를 대절해서 가족들부터 내 친구들까지 그 버스 한 대로 다같이 올라왔었다.

난 정신을 차리고 따로 준비해 놓은 봉투 몇 장을 챙겨 부페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현이, 혁재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뒷풀이는 우리 신혼여행 갔다와서 부산에서 하자."

"됐다, 넣어놔라. 우리 부페 먹는다이가."

"그래도 그런 게 아이다. 일단 요거 가지고 가서 오늘 저녁에 조금 피곤하겠지만 예림이 가게 가서 술 한 잔 팔아주라."

그리고 다른 한 장은 양 팀장에게 건넸다.

"근데 부장님하고 이사님...은 안 보이네요?"

"상무보님이랑 같이 식사하러 내려오셨다가 테이블이 부족해서 그냥 바로 가셨어요."

"아..."

이런 실수가...

"이거 가지고 회식 한 번 해요."

"이런 걸 왜 따로 챙겨주십니까? 우리가 차장님 친구들도 아니고..."

"이번에 매장 실장님들한테 따로 다시 한 번 내 결혼식 이야기 해주셨다면서요."

"그야 뭐..."

"저도 손님들이 이렇게 많이 오실지 몰랐어요. 음식이 이렇게 까지 부족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민망해 죽겠네, 정신도 없고. 시간 있는 사람들만 따로 해서 한 잔씩 하고 들어가라고."

정신없이 결혼식 뒷정리를 다 끝내놓으니 벌써 오후 3시.

부산에서 올라오신 분들이 타고 온 버스는 이미 웨딩홀 정문 앞에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중이었다.

나와 강혜선은 그 앞에서 버스에 오르는 손님들, 친척들 한 분, 한 분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그 버스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웨딩홀 잔금을 치루고 강혜선의 몇 안되는 친구들이 오리고기 집에서 하고 있을 뒷풀이 장소로 옮기기 바로 전이었다.

신혼 여행은 밤 비행기라 시간은 충분한 상태였고.

잠시 여유가 생겨서 강혜선이 잔금을 치루는 동안 웨딩홀 예약 사무실 한쪽 테이블에 앉아, 들어온 축의금 방명록을 쭈욱 한 번 훑어봤는데...

"...!"

이 액수의 의미는 도대체 뭘까.

식사도 못하고 갔는데...

상무보 이름으로 백만 원이 적혀 있었다.

이거 좀...개오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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