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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12화 (112/325)

# 112

묻어가요

이문 본부장과 이렇게 단 둘이 마주앉아 회사 업무에 관한 이야기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화 밀도가 굉장한 시간이었다.

난 내가 해야 할 업무가 밀려있다는 것도 잊은 채 이문 본부장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가고 있었고, 그가 가진 사업 아이템에 묘한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저기 본부장님..."

중간에 전사 운영본부 직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파티션을 노크했다.

그리고 우물쭈물거리는 전사 운영본부 직원의 모습에 그제야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는 걸 인지했다.

"아차차...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이문 본부장.

"어떻게 할까요?"

중간에 흐름이 깨어지는 것 보다는 기본 골자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이문 본부장의 물음에 난 스마트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음...본부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지금 사무실에 내려가서 방금 말씀하신 Kidshub 매출표를 한 번 뽑아와 보겠습니다."

"나야 상관없어요."

"그럼 하던 이야기까지만 다 끝내고 식사를 하러 가시는 게..."

"좋아요, 그렇게 해요."

나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놓고, 파티션을 노크한 직원을 향해 웃는 얼굴로 이문 본부장이 말했다.

"우리 신경 쓰지말고 먼저 식사들 하고 와요. 난 공 차장하고 조금 있다가 갈테니까."

"네."

난 사무실로 내려가서 Kidshub 매출표를 뽑았고, 아직 Kidshub에 포함되지 못한 후보 브랜드군까지 정리를 해서 다시 이문 본부장을 만나러 올라갔다.

그때 시간이 대략 12시 20분, 25분 사이였던 거 같다.

그리고 내가 챙긴 자료들을 가지고 조금 더 높은 밀도의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이미 1시 30분이 훌쩍 넘어있었고.

아마도 내가 이문 본부장과의 회의에 그 정도로까지 몰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대화 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용적인 대화 스타일.

어려운 업무 용어같은 건 하나도 쓰지않고 날 설득하고 또 나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그의 대화 스타일.

왜 회사일을 하다보면, 특히 다른 부서지만 나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과 업무 공조 차원으로 미팅을 해야 할 때가 있지 않나.

그럴 때마다 숨이 막히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 때가 대부분이다.

대개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상대가 해오거나, 핵심이 없는 대화가 이빨나간 톱니바퀴처럼 빙빙 공회전을 하기 때문인데, 이문 본부장과의 대화는 비록 지금 당장 영업 기획부에게 매출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내용들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건설적이었고, 또 담백

했다.

허황된 숫자를 말하지도 않았고, 일방적인 도움만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마진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는 회사가 수월하게 핸들링을 할 수 있는 브랜드여야 하지 않겠어요? 결국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현장에서 실무를 보는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게 컨트롤 할 수 있는 브랜드여야지, 단순하게 이런 페이퍼에 적힌 숫자들만 놓

고 브랜드를 선택할 순 없지. 안 그래요? 그럴 거였음 내가 왜 공 차장을 불렀겠어."

한 마디, 한 마디에 상대에 대한 배려가 세심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난 그런 이문 본부장과 업무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던 거 같다.

나도 저렇게 포지션이 올라가고 싶다...

티브이나 각종 매거진을 통해 멋지게 나이가 들어가는 중년 연예인들을 볼 때마다 어느순간부턴가 그들의 타고난 외모보다는 그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놓은 기운, 에너지에 매료될 때가 있었다.

비록 훌륭한 외모는 아니지만 근사하게 자리잡은 미소 주름이나 앉아있는 자세, 말 할 때 사용하는 제스처 등이 참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기준에서는 이문 본부장이 딱 그랬다.

"그럼 제가 이 부분은 담당자를 시켜서 따로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죠. 어후...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네. 일단 우리도 밥 먹으러 갑시다. 더 늦기 전에."

"네."

"뭐 먹을까?"

"전 뭐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본부장님 드시는 거 같이 먹도록 하겠습니다."

"보자, 보자...이렇게 시간을 뺏았는데, 밥이라도 맛있는 걸 사줘야 할 거 아냐. 뭘 먹어야 잘 먹었다는 소문이 날까? 혹시 쌈밥 같은 거 좋아하나?"

"네, 있으면 먹습니다."

"그럼 양성통운 있는 쪽에 한 번씩 가족들이랑 가는 쌈밥집이 있는데, 그리러 갈까요?"

"네, 좋습니다."

그렇게 나와 이문 본부장은 다른 직원들이 점심을 다 먹고 회사로 복귀를 하고있는 시간에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그리고 회사 1층 로비에서 이제 막 전무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박 이사, 장 부장과 마주쳤다.

"..."

내가 먼저 전무 군단을 발견했다.

말이 전무 군단이지, 전무님, 박 이사, 장 부장, 그리고 재무부장이 전부였다.

"..."

그리고 그쪽에선 장 부장이 가장 먼저 이제 막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나와 이문 본부장을 발견했고.

그렇게 나와 장 부장만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한 상태로 양 쪽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는데, 전무님과 이문 본부장이 마주쳤을 땐 나도 모르게 내가 이문 본부장 옆 자리에 서있는 게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식사하고 오시는 길입니까?"

"음, 그래."

"뭐 맛있는 거 드시고 오십니까?"

"뭐 항상 똑같지."

전무님과 박 이사를 향해 이문 본부장이 먼저 고개를 숙였고, 장 부장과 재무부장이 거의 동시에 이문 본부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내가 전무 군단 전체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두 사람은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

"저희는 이제 먹으러 가는 길입니다."

기분이 참 묘했다.

저희는...

내가 필요 이상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결코 아닌데, 그 상황에서 내가 박 이사, 장 부장이 아닌 이문 본부장과 함께 엮이고 있다는 건 생각할 건덕지가 있는 부분이었다.

"점심이 너무 늦다."

"회의가 조금 길어졌네요."

전무님과 대화를 주고받는 이문 본부장을 향해 박 이사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가벼운 농담을 날렸다.

"이 시간까지 붙잡혀 있었음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야겠네."

"...하하..."

난 업무적인 미소를 억지로 얼굴에 띄우며 조심스럽게 박 이사와 장 부장의 표정을 살필 수 밖에 없었다.

"알았어. 식사 맛있게 해."

전무님이 먼저 가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고, 난 이문 본부장과 함께 회사를 나서며 나도 모르게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

그 순간 난 나처럼 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장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전무님과 박 이사를 따라 엘레베이터 복도 쪽으로 들어가던 장 부장.

난 무의식 중에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넸고, 그런 내게 장 부장은 숟가락질 하는 흉내를 내며 입모양만 움직여 "많이 먹어." 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 부장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시익하며 내게 지어보여줬는데, 이문 본부장과 함께 회사를 나서면서도 난 내가 지금 왜 이문 본부장과 함께 나가고 있는지, 회사 내에서 나란 사람의 정체성이 살짝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장 부장, 저 친구..."

마치 내가 장 부장을 의식하고 있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전히 앞만 보고 걸음을 옮기며 이문 본부장이 말했다.

"참 빡센 친구지. 어때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장 부장 말이에요. 밑에서 같이 일하기 빡세지 않나?"

"아뇨.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참 시간 빠르다. 저 친구가 벌써 부장을 다 달고...난 한 번씩 장 부장, 저 친구를 볼 때마다 전무님 젊었을 때를 보는 착각이 들어요."

"아...전무님 젊었을 때랑 스타일이 비슷한 모양입니다."

"눈에 독기를 봐. 부장 씩이나 달고도 아직까지 저런 눈빛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거든. 목적이 대단히 뚜렷한 사람이에요, 장 부장 저 친구가. 저 나이에 벌써 부장 달고 전무님 모시고 식사까지 다닐 정도면...언젠가 크게 한자리 한다고 봐야겠죠.

이래서 사람 보는 눈은 다들 비슷비슷 한 가봐요."

"...?"

"장 부장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사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신입사원 면접에 사장님이 직접 참석을 하셨을 때니까. 독한 놈이 하나 들어올 거라고 하시더라고. 보통 천지분간 못하는 신입을 상대로, 그것도 면접만 보고 그렇게

섣부르게 판단하긴 힘들잖아요."

"...네, 그럴 거 같습니다."

"그런데 진짜 딱 들어왔는데, 내가 봐도 하는 게 전무님 젊었을 때 판박이인 거야. 생긴 것도 좀 닮지 않았어요?"

"전무님이랑요?"

"응. 하는 행동이 비슷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 눈엔 생긴 것도 살짝 닮은 거 같더라고."

"전무님 젊었을 때는 어떠셨습니까? 많이 빡세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빡세다는 표현을 써버렸다.

거기다 그 표현을 전무님을 향해, 그것도 이문 본부장 앞에서 써도 되는 건가 하는 염려에 아차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표현을 먼저 썼던 이문 본부장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크흐, 그걸 말로 해서 뭐하겠어요? 내가 당시에 회사 출근하면 전무님 피해서 도망다니는 게 일이었던 사람이에요."

"푸흡..."

"진짜라니까. 얼마나 무서웠다고. 어딜가나 고춧가루 한 명씩은 꼭 있잖아요. 우리 회사 초창기땐 전무님이 그 역할을 다 하셨지. 내 입장에선 전무님만 피할 수 있음 거기가 사장실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들어갈 정도였다니까. 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당시엔 사장실 문턱이 그리 높지가 않았거든.  회사 직원이라고 해봤자 다 합쳐서 몇 명 되나? 사장님이랑 다같이 날 밤까고 사우나 갔다가 해장하고 전날 입었던 셔츠 그대로 입고 다시 출근하는 게 일상이었을 시절이니까. 딱 보고 전무님 컨디션이 조

금이라도 별로다 싶으면 무슨 이유를 동원해서든 사장실 문 노크하는 거예요. 사장님이랑 같이 있음 또 안 건드리니까. 하하하..."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거 아닙니까."

"음...그건 그렇죠."

"본부장님은 어떠셨습니까?"

"나?"

"네, 본부장님은 당시에 어떤 스타일이셨습니까?"

"음...난 그냥 공 차장 같은 스타일이었던 거 같아요."

"...저요?"

"네, 가만히 보면...장 부장은 전무님 쪽이고, 공 차장은 살짝...내 과야."

"..."

"공 차장 집에서 막내죠?"

"...네."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그렇지만, 막내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랑받는 본능 같은 게 있나봐. 뭘 조금만 잘해도 위로 크게 미움을 산 게 없는 사람들은 크게 칭찬을 받고 또 챙김을 받거든. 거기서 지금 공 차장처럼 운때만 맞아떨어지면 꾸준히 인정도 받게 되는 거

같고, 상대적으로 승진도 빨리 하는 거죠.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묻어가요."

"...네?"

"지금 하는 것처럼 열심히 하면서 요령껏 장 부장한테 묻어가라고. 직장 생활이라는 게 뭐 특별한 게 있나, 어디. 다 그렇게 하는 거지. 나 봐요. 사수 하나 잘 만나서 내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잖아."

"그 사수라면..."

"당연히 전무님이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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