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그 꽌시라는 걸 지금 사용하고 싶지는 않네요
참 애매하다.
직장 생활, 그리고 인간 관계.
안 팀장이 걸어온 딜은 내 개인적으로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의 명분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난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낼 말은 아니란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됐다.
"이모님! 여기 막창 2인분만 더 주세요!"
모든 상황이 완벽하다는 듯, 안 팀장은 시끄럽게 떠들며 막창 2인분을 새로 시켰고, 난 얼굴에 가면을 걸어놓고 속으로 안 팀장이 걸어온 딜에 대해 생각해봤다.
"..."
꼭 이런 자리에서 박기태의 대리 승진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던 것일까.
아님 이 자리가 그 이야기를 꺼내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일까.
"기태야, 뭐하냐. 차장님 술 없다."
"아, 네."
박기태가 술병을 드는 순간 난 웃는 얼굴로 술잔을 들었고, 술을 받는 동안 나와 박기태는 다시 눈이 마주쳤다.
분명 하반기 인사때 대리 승진을 같이 한 번 노려보자고 내가 말을 했었다.
말이 같이 노려보자는 거였지, 사실상 그때쯤 자연스럽게 대리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그 한 시즌 더 기다리는 게 그렇게까지 힘든 일이었을까?
가능하면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해보려고 했지만,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부정적인 결론만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 온 막창 2인분과 술을 마시는 동안 안 팀장이 화장실을 간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난 박기태가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 웃는 얼굴,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안 팀장님은 전혀 모르고 계시는 모양이에요?"
"..."
"하반기 인사 때 대리 승진을 같이 한 번 노려보자고 했었잖아요."
"아, 그게...알고 계실 겁니다."
알고 있다라...
"제가 그때 지나가는 말로 차장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걸 말해드렸는데..."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대리 승진 티오 한 장이야 영업부 입장에선 크게 부담스러운 티오가 아니다.
아닌 말로 인사부가 제대로 일을 안해주고 있는데, 자체적으로 대리급 맨파워를 늘려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다.
인사부를 압박할 명분은 충분하니까.
다만 안 팀장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지금처럼 박기태가 있는 자리가 아니라 나와 둘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다음날.
전날 술자리에서 했던 약속대로 정말 점심 시간이 되기도 전에 안 팀장은 현재 중국 법인을 상대로 영업 기획부가 푸쉬하고 있는 각 프로젝트 별로 마케팅 기획안을 만들어 내 자리로 찾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솔직히 긴가민가 했었다.
안 팀장이 준비해 올 기획안의 퀄리티를 의심했던 게 아니라, 안 팀장이라는 사람 자체의 무게에 대한 의심이었다.
정말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가지고 있는 단점 하나가 너무 커서 정이 안가는 사람이 있고, 또 반면에 트집잡힐 단점이 참 많은데, 가지고 있는 장점 하나가 너무 막강해서 이상하게 정이 가는 사람. 그래서 가지고 있는 단점들이 크게 거슬리지 않는 사람.
공교롭게도 내게 안 팀장은 아직까지는 그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딱 걸려있었다.
그런데 그가 준비해온 기획안을 딱 보는 순간 그때부터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흐음..."
트집잡힐 단점은 참 많은데...가지고 있는 장점 하나가 너무 막강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가 가진 막강한 장점에 포커스를 두고 그를 보기 시작하자, 트집잡힐 단점들 못지 않게 많은 장점을 가진 사람이란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팝업 스토어를 고려하시기에 좋을만한 백화점 리스트를 따로 뽑아봤습니다."
"...!"
"크흐...사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리스트는 제 몸값이나 다름없는 리스트 입니다. 그동안 제가 센젠 법인에 있으면서 법인 물량을 대신 핸들링해주는 에이전시들이랑 틈만 나면 술자리를 가지면서 뽑아낸 액기스들이거든요."
"무슨 액기스가 이렇게 많아요?"
"추리고 또 추린 게 이정도 입니다. 땅덩어리 면적, 인구 수만 놓고 봐도 몇 배가 차이나는 시장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대략 200개 정도가 되는 백화점 리스트를 뽑아와놓고, 그걸 액기스만 뽑아온 거라고 하니 내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수 밖에.
"대대로 이 왕푸징 백화점 같은 경우는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백화점 브랜드 입니다. 상당히 올드한 컨셉을 유지하면서도 매장 분할 운영을 하는 걸 보면 상당히 진보적입니다. 특히 여기 이 톈진 2호점 같은 경우는 7층에 아이스 링크가 있습니다. 얘네들이 진짜 웃긴게, 한 번씩 이 아이스 링크에 바닥 정리를 싹 다 해놓고 그냥 팝업 스토어를 열어버립니다."
"아이스 링크장에다가요?"
"네."
"그게...말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이 안되는 짓들을 합니다, 걔네들이."
"아니...얼음 같은 거 안녹나?"
"어떻게 하는 건지 자세한 방법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하더라고요. 예전에 저도 출장차 한 번 가서 그 넓은 공간 전체를 코카콜라한테 준 걸 보고 기겁을 했습니다."
"코카콜라요?"
"네, 한 달 정도를 코카콜라한테 그 링크장 자리를 대여해주더라고요."
"거기서 뭐 콜라를 팔았단 말이에요?"
"웃기려고 하신 말이죠?"
"콜라 회사가 콜라 말고 더 팔게 있나?"
"코카콜라 캐릭터 상품들을 전시해놓고 파는 거죠."
"그게 돈이 돼요?"
"그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만큼 팝업 스토어 자리 확보가 한국과 비교하면 수월하다는 거죠. 딱히 큰 인테리어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당일 매출 6퍼센트만 자릿세로 지불하고 그런 아이스 링크 같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면 무조건 해야 되는 거죠. 거기다 팝업 스토어 세팅할 때 들어가는 인테리어 소품들...여기 이 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200군데 매장에 다 한 번씩 넣는다고 계산하시면 아무리 고급으로 세팅을 해도 본전은 뽑고도 남죠."
"무슨 수로 이 200군데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다 팝업 스토어를 깝니까? 그 전에 정식 매장 확보해야죠."
"아니죠."
안 팀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국적인 시각으로만 보시면 아깝게 놓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
"그 넓은 땅덩어리, 그 많은 인구수...한국처럼 유행이 한 번에 쫙! 풀렸다가 또 한 번에 물갈이가 되듯 쏵! 다 빠지는 곳이 아닙니다, 중국은. 물론 요즘은 워낙에 인터넷, 위쳇같은 SNS가 발달을 해서 몇 년 전에 비해서는 유행이 빨리빨리 동시다발적으로 변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한국 보다 유행의 텀이 길고, 또 지금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 국내 중저가 브랜드들 같은 경우는 대형 브랜드들에 비해선 가늘고 길게 뽑아먹을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죠. 베이징에서 한 달 정도 뽑아먹고 톈진으로 옮겨도 아직 톈진에선 새로운 브랜드가 되는 겁니다."
"아..."
"여기 제가 정리한 리스트에 든 백화점들 중에 여기 이거, 또 이거..."
안 팀장은 형광펜으로 몇몇 백화점 이름을 긋기 시작했다.
"이런 백화점에 팝업 스토어를 넣는다고 계획하시고, 한 달까지도 필요 없습니다. 2주 정도만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음 게임 끝나는 겁니다."
"게임이 끝이 난다면...?"
"2주 장사해서 괜찮은 매출만 뽑아내면 매장 임대료 장사하는 백화점 입장에선 당연히 정식 매장으로 같이 해보자고 먼저 제안을 하겠죠. 한국이랑 크게 다른 게 한국은 입점시킬 매장이 부족한 거고, 중국은 갖다 팔만한 괜찮은 브랜드가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괜찮은 제품 브랜드 보다 대형 백화점 브랜드가 더 많은 나라가 중국입니다."
"정말 다르네요."
"크게 다르죠. 팝업 스토어로 현금 만들고, 그 현금으로 정식 매장 인테리어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중국 법인이 굳이 가능성 없는 브랜드들의 매장 인테리어 비용을 직접 댈 필요가 없는 겁니다. 팝업 스토어에 먼저 깔아보고 반응을 보는 거죠. 그게 바로 팝업 스토어의 가장 큰 장점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1차 시장 반응을 본 다음에 거기서 올라오는 매출로 정식 매장 인테리어를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림만 놓고 보면 그게 맞는 거긴 한데...장사라는 게 어디 그렇게 말처럼 딱딱 다 되는 거겠습니까?"
"큰 변수는 없을 겁니다."
"...?"
"제가 현지 법인에 있을 당시에 국내 유아복 브랜드를 중국에 가져가서 론칭해보려고 했지 않습니까? 딱 이 루트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방법을 모색해봤겠습니까? 국내 유아복 브랜드를 가지고 들어만 가면 무조건 팔리는 건데, 기획안을 올릴 때마다 짬이 됐으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오기가 생겨서 투자금 하나 들지 않는 방법을 만들어내자. 이거까지 짬 당하면 진짜 중국 법인은 노답이다...라고 생각하며, 이 팝업 스토어 아이디어를 만들었던 거거든요."
"흐음..."
"제가 한국 직장 생활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습니다. 저 나름 적응하고 또 익숙해지려고 애는 쓰고 있는데, 한 번씩 제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하는 행동들이 제 의도와는 달리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또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경우가 아직 종종 있더라고요."
"..."
"하지만 중국 쪽은 정말 자신있습니다. 제가 법인 생활 4년 동안 만들어 놓은 꽌시. 장담하는데, 그 정도 꽌시를 가지고 있는 직원...현재 중국 법인에는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차장님이 필요하시다면, 어제 술자리에서 말씀드린 거 처럼 제 꽌시들 다 빌려드리겠습니다."
난 안 팀장이 준비해준 기획안은 덮어놓고 대답했다.
"갚아야 되는 거라면서요?"
"크크크..."
"갚아야 되는 거라면 당연히 갚아야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 좋은 일 시켜주는 일에 그 꽌시라는 걸 사용하고 싶지는 않네요. 일단 킵 해놓죠. 나중에 정말 제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따로 부탁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팀장이 자리로 돌아간 후 난 다시 그 기획안을 펼쳐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상상을 해본다.
만약 내가 이 기획안을 들고, 이 기획안의 내용을 가지고 중국 법인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점심 시간이 끝난 후, 난 장 부장을 찾아가 안 팀장이 준비해준 기획안을 전달했다.
그걸 한 번 쓰윽 훑어본 후 장 부장은 뭘 이런 걸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준비를 해왔냐고 물었다.
어디까지나 법인에서 알아서 해야 할 일, 법인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결과를 못 만들어내더라도 우린 그 부분에 크게 관여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일단 우린 컨펌 받은대로 물량을 밀어넣기만 하면 돼. 그 다음 일은 거기서 알아서 해야지. 우리가 무슨 수로 법인 살림까지 다 챙기겠어? 법인 쪽 맨파워는 박 이사님이 알아서 판단을 하시는 거고..."
"박 이사님이 조금이라도 쉽게 결정을 내리실 수 있도록 부장님께서 도와드려야죠. 저는 부장님이 이사님을 도우실 수 있도록 옆에서 이런 식으로 서포팅을 하는 사람이고."
"...?"
"이렇게 본사 영업부가 밥상을 차려주는 걸로도 부족해 숟가락으로 밥까지 떠먹여주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 받아먹고, 소화를 못 시키면 진짜 문제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뭐 네 말은 이 기획안을 줘도 법인 쪽에서는 소화를 못할 거란 말이야?"
"해주면 좋죠. 결국엔 저희 영업 기획부 매출과도 직결되는 거니까. 하지만..."
"..."
"이렇게 밥까지 다 떠먹여주는데, 그것도 못 받아먹으면 진짜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중국 쪽 사업 비중이 높아진 저희 기획부 입장에서는 법인의 영업력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거지 않습니까. 최대한 방법을 같이 연구해주고, 그럼에도 기대하는 만큼의 어마운트가 안나오면...어마운트를 만들어줄 수 있는 상대를 붙여달라고 징징거려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