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그러지 말고 좀 내놔봐요
"이, 있습니다."
"그럼 나도 하나 줘봐요."
순간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진짜 상무보가 내 결혼식에 올까?
난 상무보 결혼할 때 안 갔으니까.
안 간 게 아니라 아예 초대 자체를 못 받았었지.
내가 잠시 우물쭈물 하는 동안 상무보는 계속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에게도 청첩장을 하나 달라고 했다.
임기응변이라고 하기 보다는 혹시 몰라 여분의 청첩장을 준비를 한 상태였고, 지금 당장은 없지만 사무실에 내려가면 내 가방안에 아직 봉투에 아무런 이름도 적지 않은 청첩장 대여섯 장이 더 있었다.
"밑에 있습니다. 사무실에..."
"그래요? 그럼 언제라도 공 차장 시간 괜찮을 때 하나 갖다줘요."
"...네."
"혹시 난 안 주려고 했던 거 아냐?"
난 그저 피식하는 웃음을 흘린 뒤 솔직한 마음에 약간의 처세를 담아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냥 이런 기분이었다.
이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 거였다.
거기다 난 어디까지나 일반 사원이다.
부장까지는 어쨌든 일반 사원이니까.
그런 일반 사원이 언젠간 회사의 리더가 될 상무보 몫의 청첩장을 미리 다 계산해서 준비해놨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 자체가 되바라진 거라고 난 생각했다.
거기다 박 이사까지 함께 자리에 있었으니까.
"아무튼 알겠습니다. 전 이만 나가볼게요. 하시던 이야기 계속 나누세요."
상무보가 박 이사와 눈 인사를 나눈 뒤 사무실을 나갔고, 박 이사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날 자리에 앉혀놓고 업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 특히 결혼 생활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다.
그리고 난 영업 기획부 사무실로 돌아와서 청첩장 하나를 더 꺼내 봉투 귀퉁이에다가 상무보의 직함을 손글씨로 정성껏 썼다.
똑.똑...
"들어오세요."
이미 노크를 하기 전, 반투명 코팅지가 붙어있는 통유리 벽을 통해 상무보와 눈이 마주친 상황이었다.
노크를 하기가 무섭게 들어오라는 상무보의 목소리가 들렸고, 난 살짝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요."
보고 있던 업무를 잠시 덮어놓고 사무책상 의자에서 일어난 상무보.
그는 소파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내게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난 그가 먼저 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리며 자리를 잡고 섰다.
"뭐 좀 마실래요?"
"괜찮습니다. 이미 이사님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오는 길입니다."
상무보는 내선 전화로 비서를 불러 커피 한 잔과 물 한 잔을 부탁했다.
"어디 한 번 줘봐요. 좀 봅시다."
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줄곧 내가 들고온 청첩장에 시선을 두고 있었던 상무보였다.
난 청첩장이 든 봉투를 뒤집어 상무보의 직함이 보이도록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봉투에서 청첩장을 꺼내 빈 봉투는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꼼꼼하게 청첩장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공 차장이 은근히 거짓말을 잘 못하는구나. 그렇죠?"
"거짓말이요?"
"아까 말이에요. 박 이사님 사무실에서."
"...?"
"그동안 내가 그런 사람들만 만나봐서 그런지, 아님 공 차장이 영업부 에이스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 그냥 툭하고 던진 말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내가 더 당황을 했어요. 난 그냥 별 생각없이 한 말인데, 그걸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더라고. 보통은 네, 준비한 게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갖다드리겠습니다...하고 넘어가잖아."
"아...그냥 뭐..."
"공 차장 순발력이면 충분히 농담으로 받아줄 거라 생각하고 먼저 농담을 던져봤던 건데, 거기서 당황을 해버리니까 내가 괜히 평소 안 하던 장난을 쳐서 공 차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닙니다, 그런 거."
"그럼 다행이고."
"거짓말...뭐 거짓말이라고 하기 보단 상무보님이 사용하신 표현대로 그정도 순발력은 저도 가지고 있는데...그냥 그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왜요?"
"하하하...상무보님은 입발린 소릴 잘하는 사람보다 솔직한 사람을 더 좋아하신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 말은 뭐 진짜 난 초대를 할 생각이 없었다는 말?"
상무보가 뻔히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다시 장난을 걸었다.
"아뇨."
그래서 나 역시 함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았던 거 같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았다?"
"네, 제 결혼식날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십사...하는 말을 과연 누구한테까지 해도 되는 건지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아...그런 뜻이구나."
"막상 해보니까 청첩장 돌리는 이 일이 결혼 준비하는 것들 중 특히 가장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사실 상무보님께는 청첩장을 드릴 엄두 자체를 못내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으로야 백 번이라도 더 드리고 싶었죠.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상무보님께서 직접 참석을 해주시면...하지만 저같은, 저희같은 일반 사원들의 입장에선 부탁을 드리기가 쉽지가 않죠."
"하긴, 그건 또 그렇겠다."
"박 이사님이야 영업부에서 함께 보낸 시간도 길었고, 또 예전부터 참석하겠단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몇차례나 해주셔서 당연하게 전달을 했던 거지만...사실 박 이사님께서 직접 참석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전 제 와이프 될 사람이나 처가에 체면을 크게 세우는 겁니다."
"나도 갈게요."
상무보는 청첩장을 가볍게 흔들며 결혼식에 진짜로 참석을 하겠노라 흔쾌히 약속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공 차장님 결혼식인데 당연히 가서 축하를 해줘야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커피와 물이 너무 늦게 도착했다.
청첩장도 전달을 했고, 또 필요한 이야기는 이미 다 끝이 났는데, 그제야 사무실 문이 열리며 커피와 물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비서가 들어왔다.
하는 수 없이 마땅히 나눌 대화거리가 없음에도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셔놓고 상무보와 계속 마주앉아 있게 된다.
"그럼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나요?"
상무보 역시 어지간히도 물어 볼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색한 침묵 탓에 급하게 만들어낸 질문이 분명했다.
"캐나다로 갑니다."
"캐나다?"
"네. 처음엔 유럽 쪽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쪽으론 출장을 너무 자주 다니다보니까 신혼 여행까지 유럽으로 가고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아내분은 그게 아닐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이 시즌엔 유럽만한 곳이 없지 않나?"
"와이프 될 사람이 대학 다닐 때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잠시 했었답니다. 그 이후로 사회 생활 시작하면서 10년 넘게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하네요. 해외 여행이라고 해봤자, 가까운 동남아가 전부였다면서...이 참에 한 때 자기가 생활을 했던 동네를 저와 함께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또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긴 하겠네요."
그리고 또 시작된 어색한 침묵.
내가 물을 빨리 다 마셔버리면 그 핑계로 상무보가 내게 그만 돌아가서 업무를 보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급하게 다 마시지는 못하고 최대한 상무보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물 잔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물잔을 삼분의 이 쯤 비웠을 때였다.
"근데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2주 전에 분명히 박 이사님께 부탁을 드렸거든요."
"..."
"며칠 전에도 확인을 한 번 했었고."
"무슨..."
"중국 법인 말이에요."
"...네."
"아이디어가 그렇게 없나?"
순발력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거지.
난 미간을 좁히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도통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업 기획팀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 말이에요. 공 차장 일 쳐내는 스타일상, 그리고 장 부장님 성격상 그냥 대책없이 돈 될 거 같은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중국 법인에 무턱대고 떠넘기려고 하지만은 않았을 거 아니에요. 틀림없이 중국 법인이 어떤 루트로 현지 영업을 하는 게 좋을 거라는 레이아웃 정도는 가지고 진행을 하지 않았느냔 말이지, 내 말은."
"...네, 맞습니다."
"난 개인적으로 장 부장님은 조금 어려워서 그래요. 그래서 이 기회에 공 차장한테 물어보는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박 이사님이 딱 이거다! 할 만한 아이디어를 못 뽑아내고 있는 거 같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사실 이 부분은 저희 영업 기획부 입장에서도 상당히 예민한 부분입니다."
"그렇겠지. 아무리 박 이사님이 중국 법인까지 총괄을 하고 계신다고 해도 현지 법인 영업 레이아웃을 영업 기획부를 통해 쥐어짜내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니까. 거기다 영업 기획부가 중국 현지 법인의 영업 디테일까지 다 간섭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공 차장도 알다시피 현재 거기엔 인물이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박 이사님한테 따로 이야기를 했던 부분이고."
"현재 저희가 마무리 진행중인 프로젝트들 모두, 초기 시안은 중국 법인에 전달을 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손 차장이 그에 맞춰서 유통 채널을 확보하고 있는 중인 걸로 알고 있고..."
"그러지 말고 좀 내놔봐요."
"...!"
"아끼지 말고 말이에요. 그거 아껴서 뭐하게? 어차피 타이밍 놓치면 짬 되는 것들이잖아."
"하하하, 그, 그게 무슨."
"거 봐. 공 차장 거짓말 잘 못한다니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공 차장 지금 뭔가 아끼고 있는 한 방이 있을 거란 말이야."
"없습니다, 그런 거. 있었음 진작에 풀었죠. 현지 법인의 매출이 곧 저희 영업 기획부의 실적인데 제가 그걸 왜 꽁꽁 묶어놓고 있겠습니까?"
"흐음...아쉬워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공 차장이 욕심내고 있던 자리에 전사 운영 본부장을 보내서 아쉽냐고."
"무슨 그런 말씀을...제가 본사 차장 자리를 놔두고 왜 그 자리를 욕심내겠습니까?"
"전무님이 잘못 보셨을리는 없는데?"
"...!"
"전무님이 그러시더라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 짧은 기간동안, 그것도 현지 법인의 매출에만 집중되는 프로젝트들을 몇 주 간격으로 계속 터뜨릴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제야 아차싶은 거지. H.I 편집샵 브랜드를 중국에 가지고 가자고 했던 것도 박 이사님한테 들어보니까 예전에 공 차장이 던졌던 아이디어였다면서요."
"...네."
"내가 일부러 공 차장은 안된다고 그랬어. 여기서 내가 필요하니까."
"...!"
"난 공 차장이 최소한 내 입장에선 쉬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
"쉬운 사람이라는 게 그냥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내가 알 수 있도록 시그널을 제때 제때 보내주는 사람이었음 좋겠단 뜻이에요. 내가 그때 한 번 공 차장한테 프로포즈를 했었잖아. 내 사람이 되어주지 않겠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란 뜻만은 아니었어요. 바로 옆에서 도와주면 좋겠지만, 그게 힘들 거 같음 그냥 지금 공 차장이 있는 자리에서라도 내가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뭔가를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달란 뜻이 포함되어 있었단 말이야. 근데 전혀 그래줄 기미가 안 보이네? 뭘 원하는지를 알아야 내가 그걸 주면서 딜을 걸 거 아니에요? 지금이 어디 쌍팔년도도 아니고 회사가 어떻게 에이스 직원을 상대로 보상 없는 열정만 강요하나. 그건 내가 공 차장이라도 싫을 거 같다."
얼마 남지 않은 물을 깔끔하게 비워내고 상무보를 쳐다봤다.
"나는 꾸준히 공 차장한테 내가 원하는 걸 이야기 하고 있는데, 공 차장은 언제쯤 내게 그래줄까?"
"...그렇게 해도 됩니까?"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우리 또 어렵게 가는 거 별로 안좋아하잖아. 쉬운 길 놔두고 왜 어렵게 가요?"
"..."
"지금 당장은 내가 여기서 공 차장이 필요해. 그러니까 중국 법인 쪽은 천천히 내가 여기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기다려주는 걸로 하고...다른 거 필요한 거 있음 망설이지 말고 나한테 시그널을 보내줘요. 그리고 이거."
다시 한 번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던 청첩장을 집어들며 상무보가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경조사 있을 때 나 빼먹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