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내껀 없어요?
홍성 인터네셔널에 완전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저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무심한 듯 하지만, 전무님을 중심으로 이사진, 부서장들이 똘똘뭉쳐 회사로 복귀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사장님.
그리고 그런 사장님을 향해 아끼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전무님.
나와 양 팀장은 워낙에 멀리 떨어져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기에, 정확하게 어떤 대화가 오고가는지 까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사장님의 근엄한 얼굴에는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스며있었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트는 전무군단의 모습엔 마땅함, 그리고 당연함이 깔려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를 하던 전무군단이 양 쪽으로 갈라서며 사장님이 걸어갈 길을 만들었고, 그 사이로 사장님과 이문 차장이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전무님이 사장님 오른편으로 나란히 서서 뭔가 농담을 주고받는 듯 가벼운 웃음을 흘리셨다.
놀랍게도 사장님의 왼쪽편 빈 자리는 상무보가 아닌 여전히 이문 차장님이 지키고 있었다.
사장님을 중심으로 오른편으로는 전무님, 그리고 왼편으로는 이문 차장님이 보좌를 하듯 사장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으셨고, 그 뒤로 상무보부터 시작해 타이틀 순으로 긴 대열을 만들어 본사 로비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대열의 가장 끄트머리에 장 부장이 끼어있는 걸 보며 난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확실히 우리 부장님이 제일 젊네요."
그 순간만큼은 양 팀장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장님, 전무님, 이문 차장, 상무보...그리고 박 이사까지는 최소한 회사 안에서는 우리와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느껴졌지만, 그 대열의 가장 끄트머리에 끼어있는 장 부장의 모습 만큼은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양 팀장의 말처럼 그 올드 군단에서 가장 젊고 세련된 맵시를 풍기는 건 상무보를 제외하고는 단연 장 부장이었다.
타 부서장들에 비해 나이는 어리지만, 그래서 부서장으로서의 연륜은 부족할지 몰라도 나와 양 팀장은 저 젊은 나이에 전무 군단에 들어간 장 부장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그렇네요. 제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세도 우리 부장님이 제일 잘 나오는 거 같지 않나요?"
"그러니까요."
"...?"
"그러니까 차장님도 얼른 들어가셔야죠, 저기에."
더이상 꿈같은 이야기는 아닐 거 같았다.
물론 "제가 무슨 수로요?" 라는 말로 겸손한 척 굴었고.
"우리 부장님이 저기에 저렇게 끼어있으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네요."
난 양 팀장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전무님이 선두에 선 전무군단은 그렇게 회사 정문까지 사장님을 배웅하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와 양 팀장은 그들의 눈에 붙잡히지 않도록 재빨리 비상계단 안으로 숨어들어갔고.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나와 장 부장은 순두부 집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스타벅스 커피를 하나씩 손에 들고 천천히 회사로 복귀를 했다.
그리고 오후 업무를 보기 전에 마음을 다잡을 생각으로 17층에 들러서 담배를 한 대씩 피웠다.
"아까는 김 차장님이 계셔서 따로 말을 못했는데, 조만간 날 한 번 잡자."
"무슨 날이요?"
"왜 그때 내가 한 번 말했잖아. 제수 씨 될 사람 얼굴 한 번 보여달라고. 나도 집사람 데리고 나올테니까 말이야."
"아..."
나는 그냥 인사차 지나가는 말로 한 소리인 줄 알았다.
지난 달 사장님으로부터 직접 금일봉을 전달받았던 날, 장 부장이 금일봉과 함께 선물받은 회사차로 드라이브를 시켜주며 다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제 집 사람이 한 번 물어보라고 하더라고. 두 사람 언제 시간 괜찮은지."
"에이...저희가 맞춰야죠. 형수님이 편한 날로 날짜만 주십시오. 제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으음..."
장 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사람 편한 날로 날짜 줘. 집으로 초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하는 건데 대접을 하는 쪽이 맞춰야지."
"대접을 하는 쪽이라니요?"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장 부장이 말했다.
"나랑 집 사람이 두 사람 대접하는 거야."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말이 안되긴, 당연한 거지. 은태 네가 이렇게까지 치고 올라와줘서 지금 내가 얼마나 편하게 일하고 있냐? 어디 그뿐이야? 홍성 역사상 부장이 회사 차 받은 건 중국 법인 근무자들 제외하고는 내가 처음이래. 이게 너 없이 가능했겠냐?"
"낯간지럽게 왜 그러십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네 체면 좀 살려줘볼까 한다. 제수 씨 보는 앞에서 말이야."
"..."
"생각해보면 내가 차장 달았을 때 지금 이사님도 그렇게 해주셨던 거 같다."
"어떻게요?"
"당시엔 부장님이셨지. 박 이사님이 부부 동반으로 같이 식사나 한 번 하자고 하시는 거야. 이게 은근히 불편한 자리잖아. 너도 지금 살짝 걱정하고 있지?"
"아뇨."
"아니긴...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
"..."
"나만 가는 자리라면 그냥 업무의 연속이라 생각하고 이사님이나 사모님 앞에서 살살거리면 되는 건데, 집 사람 보는 앞에서 회사에서 하는 것처럼 이사님 비위를 맞추는 모습을 보여주자니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 거기다 틀림없이 집사람도 남편 내조한답시고 이사님 내외한테 살살거릴 수 밖에 없잖아."
정확하게 내가 하고 있던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사님이랑 사모님이 너무 편하게 대해주시더라고. 편하게 대해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와이프 보는 앞에서 내 기를 확실히 살려주시더라고. 마치 내가 없으면 우리 영업부가 안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야. 이번엔 내가 한 번 해줄게."
그냥 차라리 식사 자리를 안 만드는 게 도와주는 거 같은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그냥 한 번 그렇게 편한 분위기 속에서 자리를 가지고 나니까 나같은 경우는 그 뒤로도 이사님 내외하고 사적인 자리에서 왕래가 잦아지더라고. 이제 막 부장 타이틀 달고 이런 말 하려니까 살짝 민망하긴 한데...어차피 은태 너는 내 라인 아니냐?"
재빨리 대답했다.
"그럼요."
"이사님이 내게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천천히 부부동반 자리를 키워나가보자는 거야. 또 기회되면 제수 씨 될 분이랑 우리 집사람이 이사님 사모님을 모셔서 따로 시간을 가질 수도 있는 거고...결국 아직은 그게 중요해, 우리나라 직장 문화 안에서는."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서 강혜선과 함께 장 부장 내외를 만나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됐다.
<한솔음> 이라는 한식집이었는데, 장 부장의 와이프가 미리 자리부터 메뉴, 마실 술까지 예약을 다 해놓은 상태라 나와 강혜선은 말 그대로 대접을 받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 자리에서 장 부장은 정말 사람이 민망해질 정도로 강혜선에게 내 칭찬을 계속 늘어놓았다.
"아이고...그만. 그만 좀 해요."
결국 장 부장의 와이프가 적당한 선에서 주야장천 회사 이야기만 하고 있는 장 부장을 말렸다.
"가만히 보면 나랑 결혼을 한 게 아니라 그냥 회사랑 결혼을 했어. 일 마치고 집에 와서도 회사 이야기, 쉬는 날도 회사 이야기...거기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회사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 사람도 그래요."
강혜선이 장단을 맞췄고, 그에 장 부장의 와이프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 회사는 이 두 사람이 다 먹여살리는 줄 알겠어."
강혜선이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장 부장의 와이프는 장 부장에게 눈을 흘기며 농담을 이어갔다.
"난 이 사람이랑 결혼한 이후부터 남자들 군대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더라.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는 줄 이 사람이랑 결혼하고 나서 처음 알았잖아."
"...?"
"이 사람이 하는 회사 이야기에 비하면 말이에요."
그 순간 강혜선은 웃음을 참다가 사래에 걸려버렸다.
나 역시 그동안 내가 강혜선을 상대로 얼마나 회사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지 되짚어보게 됐고.
"근데...이 사람이랑 결혼해서 애 낳고 살다보니까, 그래서 이 나이가 되어보니까 이 사람이 왜 그러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는 거 같아요. 나한테 말고는 밖에 나가서 자기 속에 있는 회사 이야기를 꾸밈없이 다 토해낼 상대가 없거든."
"그렇죠."
강혜선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췄다.
"젊었을때 그렇게 죽고 못살던 친구들도 다들 결혼해서 자기 가정 꾸려 살기 시작하니 만날 기회가 있나, 어디. 기회가 생겨서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돼도 이젠 뭐 먹고사는 세상이 다르니 대화가 잘 안 통하지. 서로 이해를 잘 못하잖아요, 서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그러니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슬슬 피곤해지는 거지."
"...네."
"그러니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만 잡고 하소연을 하는 거야. 그 모습이 짠해서 난 또 같이 소주잔 기울이며 들어주는 거고. 내 성격상 일 마치고 돌아와서 이 사람 혼자 혼술을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더라고."
나 역시 크게 다를 건 하나 없지만, 순간 장 부장이 짠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나와 다른 게 하나 없기 때문에 그의 퇴근 후 모습에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도 애 낳고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뒀다가, 작년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형수님이 하시던 일이야 뭐 형수님만 하겠다고 하시면 얼마든지 개인 사업을 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안 그래요."
내 말에 장 부장의 와이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지. 요즘같은 시대에 뭐하러 스트레스 받아가며 내 장사를 하겠어요? 확실히 나이가 드니까, 일에 대한 마인드도 바뀔 수 밖에 없는 거 같아요. 젊었을 때야 꿈이라는 게 있고, 또 열정, 체력이 받쳐주니까 욕심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나이가 드니까 돈을 떠나서 그냥 계속 일을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고마워요. 어디가서 일만 하면 되는 거지. 두 사람도 사십줄 넘어가면 조금씩 느끼겠지만, 어제의 직장과 오늘의 직장의 의미가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 수록 달라지는 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혜선 씨는 참 좋은 직장을 가졌어. 나처럼 중간에 긴 공백기 만들지 말고 열심히 다녀요."
식사 자리 내내 장 부장 내외가 많은 배려를 해줘서 그런 거겠지만, 나와 강혜선의 입장에선 상당히 유익한 자리였다.
특히 이제 막 결혼을 앞두고 있는 우리였기에, 장 부장 내외가 해주는 현실적인 조언은 우리들의 계획을 조금씩 구체화시키는데 큰 도움을 줬던 거 같다.
강혜선은 장 부장의 와이프가 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로 가끔씩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 부장 내외에 관해 물었고, 청첩장이 나왔을 때도 장 부장 내외 몫을 가장 먼저 챙겼다.
"부장님."
"응."
"이거...청첩장 나왔습니다."
"드디어 나왔네. 이사님한테는 드렸어?"
"이제 드리러 가야죠."
"얼른 올라가봐. 아직 사무실에 계실 거야. 나도 금방 거기서 오는 길이야."
나 역시 박 이사까지는 청첩장을 돌려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한 영업부 기간이 있으니까.
직접 오시든, 아님 장 부장에게 축의금을 대신 전달만 하시든 그건 알아서 하시겠지만, 직접 찾아가서 청첩장은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상당히 민망했다.
청첩장을 준비할 때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막상 청첩장이 나와서 초대할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을 하려니까 괜히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것만 같았다.
똑.똑...
조심히 박 이사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챙겨온 청첩장을 공손하게 전달했다.
"가야지. 당연히 가야지. 어디 보자...다음달 27일이라...그래, 결혼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네, 준비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이젠 뭐 따로 준비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박 이사와 마주보고 앉아 커피 한 잔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
난 고개를 돌렸고, 나보다 먼저 박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일로 상무보가 박 이사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거, 아까 전무님이 피드백 하라고 했던 거...어? 공 차장도 있었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상무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상무보가 박 이사가 들고 있는 청첩장을 눈짓하며 말했다.
"청첩장 나왔어요?"
"...네."
"내꺼는?"
"...네?"
"내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