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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03화 (103/325)

# 103

외탁을 한 거예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복귀하는 거예요? 매장에서 퇴근 바로 하는 거 아니고요?"

"아뇨, 아무리 늦어도 4시 안에는 돌아올 겁니다."

"그냥 거기서 바로 퇴근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상황 봐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아침 일찍 미팅만 끝내놓고 양 팀장이 기획 1팀 직원들을 다 데리고 외근을 떠났다.

그리고 난 별 생각없이 계속 업무를 봤고.

그러다 문득 점심 시간이 조금 넘어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까 사무실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차장님, 저희 점심 다녀오겠습니다."

"넵! 식사 맛있게 하세요."

해외 영업부는 사무실을 거치지 않고 전원 창고로 출근을 했고, 기획 1팀은 아침 미팅만 끝내고 전원 매장으로 외근을 나갔다.

그리고 최근 만토바 제품 국내 도매 영업으로 정신이 없는 기획 2팀은 시간을 아껴쓰기 위해 미팅을 동반한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버렸고.

"..."

점심 시간이 딱 됐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상황실(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 사무실을 지키는 업무) 직원 하나 보이지 않고 모두 자리를 비워버렸다.

최근들어 이런 경우가 부쩍 늘었다.

물론 바쁜 게 좋은 거긴 한데, 점심 시간만 되면 나도 모르게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사무실 배분도 사실 문제가 좀 있었다.

영업부가 마케팅부와 기획부로 나뉘기 전까지만 해도 부장과 차장은 파티션을 사이에 누고 나란히 앉아 업무를 봤다.

그런데 해외 사업부가 해외 영업부로 이름을 바꿔 영업부 안으로 통합이 되면서 영업부의 덩치가 커져버렸고, 자연스럽게 예전 해외 사업부가 사용했던 넓은 사무실을 기획부의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나만 왕따 아닌 왕따가 되어버린 거다.

점심을 같이 먹어줄 사람이...없다.

특히 오늘은 쳐내야 할 업무가 많아서 정신없이 모니터 앞에만 앉아있었는데, 안 팀장이 점심을 먹고 오겠다며 기획 2팀 직원들을 다 데리고 나간 뒤 파티션 너머로 사무실을 확인해보니 사무실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거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 귀퉁이에 있는 시간을 확인해봤다.

12시 7분.

대수롭지 않게 보던 업무를 잠시 덮어두고 마케팅부가 있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우습게도 마케팅부 사무실 역시 상황실을 보고있는 직원 두 명 빼놓고는 모두 점심을 먹으러 나간 상태였다.

"어쩐 일이세요, 차장님?"

"부장님 어디 가셨어요?"

"금방 김 차장님이랑 같이 점심 식사 하러 나가셨어요."

"...아, 네."

순간 장 부장한테 전화를 한 번 걸어볼까 하다가 참았다.

금방 나갔다고 하는 걸로 봐선 지금 전화를 걸어 어느 식당으로 가는지 물어보기만 하면 될 거 같긴한데, 굳이 뭐하러 그럴까 싶었다.

그래, 원래 이게 맞는 거다.

차장이란 타이틀 자체가 우리 홍성 인터 영업부에서는 항상 애매한 타이틀이다.

팀장이야 좁은 사무실을 함께 나눠쓰며 챙겨주는 팀원들이 있고, 부장은 때론 위에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불러주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차장을 데리고 가서 점심을 먹으면 되는 건데 차장은 타이밍이 어긋나는 날엔 지금의 나 처럼 공중에 붕 뜰 수 밖에.

오늘도 영락없이 혼자 점심을 먹게 생겼다.

혹시 점심 교대 시간이 언제냐고 물어볼 요량으로 강혜선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속으로 잠시 고민을 해본다.

분명 지금 사내 식당에 내려가면 줄이 엄청나게 길어져 있을 거다.

재수가 없으면 음식을 다 받아놓고 자리가 없어 헤매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12시 16분.

한 20분 정도 버티다가 식당에 내려가면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판기에서 아이스티 한 캔을 뽑아 17층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시간도 좀 보낼 겸, 머리를 식힐 생각으로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는데, 그제야 강혜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 시간 괜찮으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에이, 그럼 미리 좀 말을 해주지. 나 지금 같이 점심 교대하는 사람들이랑 칼국수 먹으러 가기로 했단 말이에요.

"괜찮아, 괜찮아. 나 신경 쓰지말고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가. 그냥 전화 한 번 해봤어. 혹시 오늘 뭐 먹나...하고."

-마치고 데리러 올 거죠?

"응. 정산 끝나면 카톡 보내."

-나중에 봐요.

강혜선과의 통화를 끝내놓고 별 의미없이 최근 심심할 때 한 번씩 하는 게임 어플을 눌렀다.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아이스티는 옆에 놓아두고 담배를 입에 문채 별 흥미도 없는 모바일 게임을 관성처럼 레벨 업 시키며 나도 모르게 담배 두 개피를 연달아 피웠다.

그리고 아직 캔에 절반쯤 남은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고 남은 아이스티를 화단에 쏟아 버린 후 일어났을 땐 이미 12시 50분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려가면 사내 식당도 많이 한산해졌을 거다.

이용시간 끝물에 내려간 사내 식당.

이미 인기 많은 메뉴는 다 팔린 모양이었다.

두 군데 배식구 뚜껑이 닫혀있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배만 채우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줄을 서서 음식을 받고 있을 때였다.

"공 차장."

"...?"

누군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봤는데, 내 뒤로 줄을 서있는 몇 사람 뒤에서 이문 차장님이 이제 막 식판과 숟가락, 젓가락을 챙기고 계셨다.

역시 오늘도 평소처럼 각잡힌 정장이 아닌 편한 골프웨어 카라 티셔츠와 그 밖으로 아저씨 점퍼를 받쳐입고 계셨다.

그럴 일은 크게 없겠지만, 그를 모르는 신입 사원이 보면 사장님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외주 협력업체 사장 정도로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편하게 회사에 나오시는 분이다.

"점심을 왜 이렇게 늦게 먹어?"

"어, 차장님."

나와 이문 차장 사이에 줄을 서있던 다른 부서 직원들이 이문 차장에게 자기들 앞으로 서라며 줄 선 자리를 양보했지만, 이문 차장은 그저 웃는 얼굴로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됐어요, 됐어. 그냥 가. 쭉쭉갑시다, 쭉쭉...아이고 배 고프다..."

졸지에 난 제육볶음에서 고기만 고르지 못하고 그냥 있는대로 한국자 크게 떠서 담을 수 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양배추는 다 걷어내고 고기만 담는데...

배식 거진 끝 물이라 고기도 얼마 없는 상황이었다.

"에이, 먹을 게 너무 없다!"

바로 그때였다.

이문 차장님이 조리실 안에서 점심장사 철수를 준비하는 조리장과 찬모이모님들 다 들으라는 식으로 장난스레 한 말씀 하셨다.

그러자 배식구 안에서 평소엔 시크하기 그지없었던 조리장이 살살거리는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고개를 빼어냈다.

"왜 이렇게 늦게 와서 드세요?"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사장님 미팅 이제 끝났어요. 아, 먹을 게 너무 없다. 계란 후라이라도 하나씩 해줘요. 여기 우리 넷이 전부겠네, 보니까."

크흐...이문 차장의 파워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해달라고 하면 씨알도 안 먹힐 요구.

씨알도 안 먹히는 게 아니라 우린 아예 그런 요구를 할 엄두 자체를 못낸다.

어디 감히 조리장한테 메뉴에도 없는 계란 후라이를 해달라고 하겠나.

그것도 1시가 다 되어서 내려온 주제에...

음식을 다 타서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찬모 이모님 한 분이 진짜로 계란 후라이를 만들어서 나와 이문 차장님, 그리고 그 사이에 줄을 서 있었던 다른 부서 직원들의 식판 위로 하나씩 챙겨주고 돌아가셨다.

이게 뭐라고.

계란 후라이 하나가 도대체 뭐라고 군대에서 먹어보는 계란 후라이 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았다.

"지금까지 뭐하다가 점심을 이제 먹어요?"

국을 한 숟가락 떠먹은 뒤 계란을 밥에 으깨기 시작하며 이문 차장이 물었다.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딴 건 몰라도 밥 때는 챙겨야지. 나야 뭐 하는 일이 사장님 따까리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무리 이문 차장이 자기 입으로 자기가 사장님의 따까리라고 말을 해도 그 따까리의 파워가 회사 내에서 얼마나 막강한지 모르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사내 식당 조리장으로 하여금 계란 후라이를 받아내는 존재인데...

이문 차장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상당히 많았다.

물론 궁금하다고 다 물어볼 수는 없는 거지만.

그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꺼내주기 전까지 난 그저 웃는 얼굴로 밥만 먹었고, 몇가지 사소한 개인사를 물어올 때엔 그 질문의 가벼움에 맞게끔 대답을 해드렸다.

"근데 요즘에 회사에 자주 나오시는 거 같습니다?"

정말 여러각도로 각도기를 놓고 계산기를 두드려 앞으로 그의 행보에 관해 유도심문을 하듯 질문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날 허탈하게 만들었고.

"그러니까. 사장님이 자주 나오시네요."

이 얼마나 멍청한 질문에 명확한 대답이란 말인가.

거기서 뭔가 다른 질문을 하나 쯤 더 만들어냈어야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건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때부터 이문 차장은 스마트 폰을 식탁 위로 올려놓고 메일을 확인하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메일 확인을 다 끝낸 이문 차장이 다시 내게 집중을 해주며 말했다.

"공 차장은 영업일이 적성에 잘 맞는 모양이에요?"

뜬금없는 질문.

하지만 앞으로 그의 행보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마냥 의미없이 툭툭 던지는 질문이라고 치부할 수가 없었다.

"한 몇 년 하다보니까 제 적성이 영업일에 맞춰진 거 같습니다."

"그거 말 되네. 하긴 처음부터 영업일이 적성에 맞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어요. 다 볼꼴 못 볼꼴 다 봐가면서 하다보면 참고 해온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계속하게 되는 거지. 요즘 공 차장 완전 잘나간다면서요?"

"아이...아닙니다. 잘나가긴요. 그냥 이리저리 운때가 계속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성규...아니, 아니...내가 미쳤나보네. 실수. 잊어버려요."

이문 차장은 자신의 말 실수를 주워담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바닥으로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여러차례 때렸다.

"상무보님이 하는 말 들어보니까 영업부 내에서 뿐만 아니라 최근 공 팀장 활약이 대단한 거 같더만."

난 그저 쑥스러워서 피식하는 미소만 보여드린 뒤 밥을 먹었다.

그런데...

"근데 너무 튕기지 마요."

"...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서 이문 차장을 바라봤다.

"예전에 전무님이 중국 주재원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그거 거절했다면서?"

"..."

"상무보님이 했던 프로포즈도 고사를 했고..."

정말 이문 차장은 다 알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상무보님이 했던 프로포즈는 잡지 그랬어요? 공 차장이 그 기회 잡는다고 영업부에서 공 차장 욕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아닌 말로 모두가 다 잡고싶어하는 기회 아닌가? 상무보랑 같이 다니는 일은."

"아직 제가 그런 업무를 볼 깜냥은 못되는 거 같아서..."

"깜냥은 무슨. 천하의 땡보 보직에 깜냥을 찾는 사람이 여기에 있었네. 하하하...부모가 너무 잘나버리면 자식들이 힘이 들어요."

"...?"

"왜 연애인들이 그렇다고 하잖아. 운동 선수들이나. 부모가 너무 잘나거나 대단한 업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식들이 나중에 커서 같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어쩔 수 없이 부모랑 비교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거거든."

"...네, 그렇죠."

"우리 사장님...업계에선 레전드죠. 전무님이랑 같이 진짜 골방 비슷한 사무실 하나 월세로 간신히 빌려서 사필로쪽 애들한테 명품 선그라스 한 번 받아보겠다고 직접 홍콩 출장 왔다갔다 하시면서 지금의 홍성을 만들어내신 거 아냐."

"네."

"그렇게 만들어진 홍성이 어쩌다보니 국내 컨트롤 1위 기업으로 올라가 버렸어요. 대기업이 나오기 힘든 요즘같은 시대에 당당하게 대기업으로 성장을 시키셨고. 이만하면 진짜 업계 레전드라고 봐야지."

"맞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사업가로서는 대단하단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부모로서는 참 그래요. 특히 상무보님처럼 그 뒤를 이어야 하는 아들의 입장에선 아무리 잘해도, 자기가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만들어내도 아버지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거든."

"...네,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상무보가 많이 버거워한다, 요즘. 이게 어디 뭐 상무보 개인의 선택이겠어? 잘난 아버지를 둔 덕에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인 거지. 원래 대학도 그림 전공했잖아. 원래 전공 자체가 디자인 이쪽이란 말이야. 상무보님은 생긴 것도 그렇고 성격까지 완전 외탁을 한 거예요. 사장님이랑은 조금 달라, 기질자체가. 그런 사람이 아버지를 닮아보겠다고 저렇게 고생하는 거 보면 옆에서 보기가 좀 안쓰럽기도 하고..."

"..."

"나이 비슷하잖아, 공 차장이랑."

"저 보다 두 살 많으십니다."

"딱 좋네...원래 우리 사장님처럼 자수성가하고 또 일가를 이루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식 인생, 또 자식들 운을 미리 다 끌어다 쓰는 거예요. 나는 한 번씩 그런 의미에서 상무보님이 참 외롭고 힘든 싸움을 앞으로 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고."

"글쎄요...저같은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상무보님의 인생이 마냥 축복처럼만 보이는데요? 하하하..."

"하긴, 뭐...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이문 차장님이 넥타이 정장 차림으로 회사에 출근을 하셨다.

나는 처음 봤다, 이문 차장님이 넥타이 정장을 하신 모습을.

아니구나.

예전에 대대적인 창립 기념일 파티 때 넥타이 정장을 하신 모습을 한 번 보긴 했었다.

하지만 회사에 넥타이 정장을 하고 오신 건 이번에 처음 봤다.

전무군단.

가장 선두에 전무님과 상무보가 대화를 나누며 걸어들어오고 있었고, 그 뒤로 몇몇 이사진, 그리고 박 이사가 그 대열의 중간 쯤에 속해 있었다.

그 뒤로 장 부장을 포함해 재무, 인사, QA팀 부서장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저 멀리 보안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사장님과 이문 차장님이 내리셨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복귀하는 전무군단과 이제 막 회사를 나서려는 사장님과 이문 차장.

본사 로비, 그것도 정 중앙에서 마주친다.

사장님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전무군단.

그리고 그 전무군단의 수장을 향해 이문 차장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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