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원래라면 사장님 직할이야
"그걸 왜 또 저희한테 준비하라고 하시는 건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박 이사의 사무실.
나와 장 부장이 호출을 받았고, 그곳에서 박 이사는 그동안 우리 몰래 전무님, 상무보와 함께 그렸던 큰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 이사의 설명에 장 부장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살짝 불만을 표출했다.
"전사 운영본부장이 이미 중국 법인으로 넘어갔지 않습니까."
나도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었다.
이미 전사 운영본부장이 급한대로 관광비자를 받아서 중국 법인으로 넘어갔다.
자기 팀을 꾸려서 말이다.
그 기간동안 관광비자로 운영본부장이 법인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건 불법이지만, 그래도 그곳의 환경과 업무 분위기는 충분히 파악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돌아오는대로 회사가 그와 그가 꾸린 팀원들에 한해 APEC카드(주재원 근무가 아닌 법인 출장이 잦은 인원에 한해 회사가 대리 신청을 해주는 일종의 비자 면제 카드) 신청을 도와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저희보고 만토바 물건들부터 시작해서 국내 아동복 브랜드, 그리고 문 팀장이 진행중인 국내 중저가 브랜드까지 중국 유통 판로를 공부해보라고 하시는 겁니까?"
나 역시 살짝 불안했다.
또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이리저리 말로만 일을 하는 전사 운영본부장의 스타일에 말리게 되는 건가...하는 의심도 들었고.
"멜라딘 지분 매입...결국 실패했다."
"...!"
나 뿐만 아니라 장 부장 역시 전혀 모르고 있던 이야기라는 식으로 두 눈을 크게 뜨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상무보의 지휘 아래 전사 운영본부가 프랑스 현지까지 수차례 출장을 다니며 심혈을 기울였던 멜라딘 지분 매입 건.
영업 마케팅의 김 차장 역시 홍성 인터네셔널이 멜라딘의 지분을 어느정도 확보만 할 수 있으면 멜라딘의 한국 라이센스는 우리쪽으로 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영업 마케팅부가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라 벌써부터 김치국을 마시고 있었다.
"어쩌다가..."
장 부장 입장에서도 아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제대로 진행이 안됐던 거 같다. 물론 결과만 놓고 짐작을 해보는 거지만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 부장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고, 그에 박 이사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려놓고 그동안 전사 운영본부장과 그의 팀원들이 어떻게 일을 해왔는지 상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그냥 출장만 왔다갔다만 했던 거야. 말이 출장이지 그냥 놀러 다닌 거지."
"그게 말이 되는 겁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자기들은 아니라고 하는데 딱 보면 알잖아."
"...?"
"말은 뭐 거의 다 될 것처럼 해놓고 막판에 가서 상대가 일방적으로 뒤집었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그럴 수는 없는 거고, 애초에 전사 운영본부 애들이 진지하게 안 매달렸어."
나와 장 부장은 점점 박 이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상식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
"위에서 까라고 하니까 까는 시늉만 했던 거지."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는 걸까.
상무보.
사장 아들이다.
그냥 사장 아들인가?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상무보란 타이틀을 가진 사장 아들이다.
그런 상무보가 내린 지시를 목숨 걸고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까라고 한다고 까는 시늉만 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걸까?
거기다 홍성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브랜드 지분 매입 프로젝트는 상무보가 아닌 사장님이 직접 내린 지시다.
그걸 어떻게 까는 시늉만 할 수 있었는지 나와 장 부장의 입장에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때 장 부장 너한테는 귀띔을 한 번 해주지 않았나?"
"뭘..."
"운영본부장 그 놈, 중국 법인으로 좌천보내는 거라고."
"그 말씀을 하긴 하셨는데..."
"그때 이미 멜라딘 지분 매입건은 물건너 간 상태였고, 현재 있는 전사 운영본부를 해산 시키고 새로 편성을 하니마니 하는 말이 전무님 입에서 나왔었다."
"하지만..."
"심증은 있는데, 증거가 없잖아. 진짜 그 브랜드를 한 번 매입해보겠다고 목숨걸고 매달렸는데 자기들 말대로 상대가 막판에 가서 일방적으로 뒤집은 건지, 아님 앞에선 액션만 까고 뒤로는 설렁설렁하다가 타이밍 봐서 그런 핑계를 대는 건지."
"..."
"내가 법인장 임명 건으로 법인 출장 가 있는 동안 상무보가 참관한 자리에서 전사 운영본부하고 유관부서 미팅 한 번 했었다며?"
"...네."
"상무보 말론 그때 이미 자기 마음속으로 원 아웃이었다고 하시더라고. 본부장 그 여우같은 놈이 그걸 몰랐겠어? 그랬으니 멜라딘 지분 매입건을 못 한다는 말은 못하고 큰 소리 뻥뻥치며 진행을 하긴 했는데, 그게 또 자기가 생각했던 것처럼 쉬운 프로젝트는 아니었고...평소에 일이란 걸 해본 적이 있었어야지. 맨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입으로만 일을 하던 친구가 무슨 수로 그런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었겠나. 그걸로 투 아웃."
"그런 거라면 회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순간 난 회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장 부장의 말에서 회사를 상무보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상무보는 그런 인물을 중국 법인 본부장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좌천이라도 말이다.
창고 관리 외에는 특별한 주특기가 없는 현재 중국 법인장.
그리고 이제 막 중국 법인 업무가 손에 익기 시작한 손 차장.
그 둘 중간 포지션에서 홍성 본사 영업부가 밀어주는 프로젝트들을 모두 떠안아야 하는 위치가 바로 현지 법인 본부장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과 같은 시기에 그런 인물을 본부장으로 발령을 내려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알아서 나가라는 의미로 중국 법인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걸 또 하겠다고 하네. 근데 그런 놈이 뭐 거기 가봤자 일을 제대로 하겠어?"
"도대체 굳이 그렇게 둘러가려는 이유가 뭔가요?"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쉬운 길을 놔두고 왜 굳이 이렇게 빙빙 둘러서 가려고 하는 것일까?
홍성 직원들 대부분은 홍성이 곧 멜라딘의 지분을 매입하게 될 거라고 알고 있다.
물론 사업이라는 게 하다보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거지만, 이번 프로젝트 만큼은 전 직원이 틀림없이 된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 될 이유가 없었으니까.
멜라딘은 대외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었고, 우리 홍성엔 내가 알기로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지분을 매입할 자금이 충분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그 프로젝트가 어그러졌다면 그걸 진행했던 인물에게 책임을 묻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닌가?
중국 법인은 현재 홍성에게 꽤 중요한 곳이다.
좌천을 보내는 게 아니라 기회의 땅으로 보내는 꼴인데, 한때나마 주재원 근무를 상상했던 내 입장에선 도무지 납득을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심증이 해고의 이유가 되어선 안되는 거니까."
"...!"
"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 상무보가 말이야."
나와 장 부장은 동시에 입맛을 다실 수 밖에 없었다.
직급이 올라갈 수록 해고의 명분은 다양해진다.
이걸 꼭 운영본부장 만의 일이라고 먼산 불구경하듯 구경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장 부장과 나 역시 어쩌면 회사가 큰 경영 위기에 처하거나 혹은 피치못할 사정이 생길 경우 가장 먼저 모가지를 내놓아야 하는 포지션까지 올라와 있는 상황.
상무보의 그런 경영 철학은 우리 입장에선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상일지도 모른다.
"쓰리아웃을 한 번 유도해보겠다고 하시더라고. 왜 그날 두 사람 상무보 사무실에 왔던 날 말이야. 다같이 생태탕 먹으러 갔었잖아. 두 사람 오기 전에 나랑 그 이야기 나누고 있었어."
"아..."
"어차피 본부장 그 놈은 얼마 못가서 제 풀에 꺾일 거다."
"..."
"일단 뭐 내 입장에선 무조건 따라야 하는 부분이라 딱히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또 당분간 너희들한테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오늘 상무보가 사인을 주더라고."
"무슨..."
"장 부장이랑 공 차장 너희가 따로 신경을 좀 써줘야 할 거 같다고. 요 며칠 법인 넘어가서 하는 짓들이 상무보 보기에도 영 시원찮은 모양이야."
그때부터 침묵이 시작된다.
각자의 계산이 돌아가는 중이다.
나는 나대로 또 장 부장은 장 부장대로...
박 이사 역시 별 다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럼..."
장 부장이 혀끝으로 입술을 살짝 적셔놓고 말했다.
"전사 운영본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없어지는 겁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럼 운영본부장 자리엔 누가 오는 겁니까?"
"이 차장이 오게 되지 싶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나와 장 부장은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본사에 이 씨 성을 가진 차장이 누가 있지?
"이 차장이라면..."
"이문이. 이문이가 올 거야."
"이문 차장님 말씀이십니까?"
이문 차장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장 부장의 두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사장님이 재택 근무를 시작하신 이후부터 쓰레기 부서로 변해서 그렇지, 원래라면 회사를 쥐고 흔들 수 있는 파워를 가진 유일한 부서가 바로 전사 운영본부 아니냐. 그동안 상무 자리도 너무 오래 비어있었고."
"이문 차장님이 다시 회사로 복귀를 하시면...사장님 수행은 누가 합니까?"
"누가 하긴 누가 해, 이 차장이 계속 하겠지."
"...?"
"원래 전사 운영본부는 상무 직할이 아냐. 사장님 직할이었지. 사장님이 재택 근무를 하시면서 그 성격이 조금씩 변한 거고, 또 언제부턴가 다들 전사 운영본부가 상무 직할이라고 알고 있어서 그렇지 원래라면 사장님 직할이야..."
"그 말씀은..."
"사장님이 다시 예전처럼 매일같이 회사에 출근을 하신단 말이지. 그러다 점점 뒤로 빠지시면서 그 자리로 상무보가 자리를 잡지 않겠어?"
박 이사의 사무실을 나서며 장 부장에게 살짝 물어봤다.
"이문 차장님 정도면 사실 말이 차장이지 실제로는 이사급 아닙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따지고 보면 전무님 보다 더 사장님과 가까이 계시는 분이니까. 이사님도 이문 차장님한테 만큼은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주시잖아."
"그럼...저희는 앞으로 더 골치 아파지는 거 아닙니까?"
"글쎄...사실 나도 아직 이문 차장님이랑은 한 번도 업무적으로 얽혀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을 못하겠네. 근데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뭐요?"
"진짜 이문 차장님이 전사 운영본부장으로 오시면..."
"...?"
"그때부턴 전무군단이 이 회사의 전부는 아닌 거야. 솔직히 지금은 전무님 밑으로는 모두 평등이잖아. 근데 이제 그게 깨지는 거야."
"이문 차장님 파워가 그정도나 됩니까? 사실 회사 일에 대해선 전혀 모르시잖아요."
"사장님을 바로 옆에서 10년 넘게 모신 분이셔. 우리들 앞에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시는 거지, 진짜 모르실 수가 있겠냐? 오히려 사장님의 생각은 전무님보다 이문 차장님이 더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계실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