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버티지마
무조건 칭찬, 그리고 격려만 해주기로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 힘든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 또 나름 해결 방안을 찾아보려고 애를 써봤다는 것 만으로도 이지혜는 칭찬과 격려를 받기에 충분하니까.
비록 잠시 우물쭈물하던 이지혜의 모습을 상황실 모니터로 지켜보는 동안 아쉬움도 많았고, 또 나 혼자 속으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분명 이지혜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오래전 내가 이런 일을 처음 혼자 처리해야 했던 상황과 비교해보면 무척이나 양호했다.
당시 난...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딱 어울릴 정도로 그동안 매장 직원들과 만들어놓았던 개인적인 관계,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만 치우쳐 상황을 악화시켰으니까.
"가서 다 죽여버려."
"...네?"
"다 죽여버리라고! 아, 뭐해? 얼른 가!"
지금의 이지혜처럼, 이제 막 입사 1년 차에 접어들었던 내게 주어졌던 살벌한 미션.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당시 장 부장은 피곤이 쩌든 얼굴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문제가 생긴 지점으로 가서 문제를 만들어낸 해당 매장 직원들을 다 죽여버리라고.
말이 죽여버리라는 거지, 한 마디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 돌아오라는 거였다.
하지만 난 그걸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뭘 해봤어야 알지.
누가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는 걸 한 번이라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떻게 하면 되는 거라고 팁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막무가내로 문제가 생긴 매장에 찾아가서 해결을 하고 돌아오라고 하면 내가 뭘 어떻게 하겠나.
그래도 일단 위에서 시키는 거니까 무턱대고 가긴 갔는데, 사회 생활 1년차 애송이가 노련한 매장 매니저, 부매니저의 현란한 말빨을 이겨낼 재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을 이기는 건 말도 안되는 거고 감당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입장이었다.
질질 끌려가는 거지.
그렇게 며칠 정도를 원래 내가 진짜로 해야하는 다른 업무는 손도 못대고 그 일에만 함몰되어 내 에너지를 다 빨리고 있었다.
에너지만 빨리면 다행이지.
당시 장 부장이 어디 보통 인간이었나?
시도때도 없이 경과 보고를 하라며 사람 피를 말렸고, 도대체 그만한 일에 며칠이나 매달려 있느냐며 다른 팀 직원들 다 보는 앞에서 윽박을 지르며 날 무능력자로 만들었다.
"너 도대체 매장 가서 뭐하는데? 가서 매장 직원들이랑 농담 따먹기만 하다가 돌아오는 거 아냐?"
"..."
"아니, 그게 지금 내가 이렇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일이야? 그냥 다 죽여버리라고 했잖아. 결과만 가지고 와, 결과만!"
정말 당시의 난 말 그대로 궁지에 몰려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매장 직원들이 만들어낸 사건, 사고, 실수, 부정 등이 고스란히 나의 브랜드 매장 관리 미숙과 부주의함으로 변화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난 입사 1년 만에 처음으로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됐던 거 같다.
그리고 속으로 이건 정말 불합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일을 처리하라고 임무를 줬으면 그에 맞는 권한이라도 함께 주던지, 권한은 하나도 안주고 내가 만들어내지도 않은 사고를 꼭 내가 처리해야만 하는 책임으로 돌려버리니 정말이지 출근을 하기가 딱 싫을 정도로 회사에 대한 염증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가서 다 죽여버리라는 말 자체가 당시 장 부장이 내게 그만큼의 권한을 줬던 건데, 난 그 말 뜻 속에 그만큼의 권한이 들어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 당시 홍성 영업부, 그 안에서도 장 부장은 부하 직원을 구식 군대 스타일로 강하게 키웠던 거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FM이 아닌 AM을 계속 찾게 됐던 거 같다.
문제가 생긴 해당 매장에 가서는 그동안 그들에게 보여준 내 이미지라는 게 있다보니, 변했다는 소리를 듣는 게 무서워서 사람 좋은 척, 그들의 입장을 모두 다 이해하는 척 굴었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참 핸들링 하기 쉽지 않은 매장이라고 앓는 소리만 했다.
그런데 그게 진짜 큰 실수였다.
난 내게 주어진 일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회피하려고 했던 거 같다.
이리저리 잘만 하면 어떻게든 무마가 되겠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겠지...하는 안일함도 있었던 거 같고.
그런데 장 부장이 어디 보통 인간인가.
"후우...너 진짜 해도해도 너무 한다. 이런 것까지 내가 다 직접 해야되는 거지?"
"..."
"내가 아니면 안되는 거잖아. 다들 천사 아냐. 나만 죽일 놈이고. 그래, 그렇게 해라. 넌 계속 그렇게 천사로 남아라. 급한 놈이 총대 매는 거지."
"..."
"너...나 따라와."
그렇게 난 당시 장 부장과 함께 문제가 생긴 매장으로 갔고, 거기서 내가 우물쭈물 그들에게 끌려다니며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바람에 해당 문제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 모두 모가지가 날아가는 걸 바로 옆에서 똑똑히 지켜봐야했다.
매장 직원들에게 내가 며칠동안 계속해서 강단없이 어리숙한 모습만 보여준 탓에 그들은 나만 잘 넘기면 일이 무마될 거란 희망을 가지게 됐고, 그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부정을 저지른 직원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장 부장의 입장에선 해당 문제의 심각성을 매장 매니저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고 판단, 그 자리에서 매니저의 옷을 벗겨버렸다.
당시 내 입장에선 너무 큰 충격이었다.
아직까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몸이 떨릴 정도로 큰 트라우마로 남기도 했고.
내가 미적거리는 바람에 죄 없는 사람이 옷을 벗게 되는 상황.
내가 미적거리는 바람에 누군가에게 없던 죄가 입혀지는 상황.
정말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영업부 최고 에이스였던 장 부장에게 불만을 표현할 용기도, 엄두도 내지 못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장 부장을 이해하기도 했던 거 같다.
어쨌든 장 부장이 해결을 했으니까.
그리고 난 드디어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니까.
이지혜와 함께 강남점 근처 유명한 순두부 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여전히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오래전 그 일을 고백하듯 모두 털어놓았고, 또 내가 했던 거에 비하면 오늘 당신은 참 현명하게, 매뉴얼대로 일을 처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진심어린 칭찬과 함께 격려를 해주었다.
"딱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 되는 거예요.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한 잘못이 아니다."
이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 거기 부매니저가 매장 제품을 직원가로 사서 개인적으로 온라인에 판매를 한 게 어떻게 지혜 씨 잘못이에요? 그걸 지혜 씨가 무슨 수로 사전에 방지를 할 수 있겠냐고. 아닌 말로 작정을 하고 그런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은 지혜 씨가 아니라 사장님이 와도 어떻게 못해요.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미리 관리를 잘해서 그런 일이 안 생기게끔 만들라는 것만큼 폭력적인 주문이 어디에 있어?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 그게 쉽냐고."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차장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이지혜의 입장에 서서 편을 들어줬다.
난...이지혜 짬밥이었을 때의 난...정말 그런 상사 한 명이 절실했었다.
"이제...알 거 같습니다."
"뭘요?"
"왜 팀장님이 제게 계속해서 매장 직원들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하셨는지."
더이상 입을 댈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스스로 크게 느낀 것 같았으니까.
"전 조금 다를 줄 알았습니다."
난 이지혜의 고백에 살짝 미소만 흘려놓고 순두부 뚝배기 속으로 밥을 말았다.
"제가 조금 더 애를 쓰면서 매장 직원들에게 다가가면 그런 진심이 곧 매장 매출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 거 같습니다. 제가 진짜로 매장 직원들을 생각하고 해당 매장이 좋은 매출을 올리길 바란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되는 건지."
"그리고 앞으로는 오늘과 같은 일을 해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질 거예요."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각오는 무슨...아무튼 그럴땐 회사 내에서의 지혜 씨 타이틀을 그냥 완전히 잊어버려요."
"...네?"
"위에서 지혜 씨한테 이런 일을 시킬 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해야만 할 땐 지혜 씨가 일반 사원이든, 대리든, 팀장이든...지혜 씨의 타이틀은 그냥 잊어도 돼. 그냥 지혜 씨가 홍성 인터 영업부 자체가 되는 거야. 그정도 권한도 안주고 그런 일을 계속 시키면 그 일을 시키는 위에 사람이 지혜 씨한테 크게 잘못하고 있는 거고."
"..."
"실은 오늘 여기...내가 지혜 씨 보내라고 했어요."
"...!"
이지혜는 화들짝 놀라며 국을 뜬 숟가락을 다시 뚝배기 속으로 담궜다.
"양 팀장님이 직접 와서 처리하겠다는 거, 내가 옆에서 서포팅 해줄테니까 지혜 씨를 한 번 보내보라고 했다고."
"아..."
"실은 지혜 씨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싶기도 했고, 또 언젠간 지혜 씨도 해야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마침 시간도 좀 남고 해서 겸사겸사...미안해요, 미리 말 안해줘서."
"아닙니다. 오히려...너무 감사합니다, 차장님."
"나는 지혜 씨가 참 좋아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좋아."
"..."
"에이씨...그런 거 말고. 나 결혼할 여자 따로 있어요. 뭐하는 거야, 지금? 그 표정은 지금 뭐지?"
"푸히히히..."
"아무튼 그래서 난 지혜 씨가 조금은 건강하게 성장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회사 안에서. 굳이 안해도 되는 것들은 피하고, 꼭 해야 하는 게 있음 제대로 배워서 바르게 업무에 적용시킬 수 있는 인재로 성장을 해줬음 좋겠어. 그걸 또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돕고 싶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래 갑시다, 우리."
"네.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서 끝까지 살아남겠습니다."
"에이...그건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말이다."
"...?"
"회사가 밀어내기 전까지 무조건 버텨라, 끝까지 살아남아라...왜 예전에 그런 말들 많았잖아요."
이지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네."
"근데 난 그런 악착같은 표현을 별로 안 좋아해요. 왜인 줄 알아요?"
"아뇨."
"나한테 직장 생활은 끝까지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다, 그러니 버텨라, 살아남아라...라고 말했던 상사들치고 진짜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는 사람들을 내가 못봤거든.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 빨리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해버리고, 또 끝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제 성격, 자존심 못 죽여서 회사를 그만두더라고요."
"아..."
"그런 대단한 각오 없이 그냥 편하게 직장 생활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오래가더라고. 그리고 버텨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계까지 왔단 말이잖아. 또 버텨야 한다는 말은 곧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말인 거고."
"...명심하겠습니다."
"버티지마. 뭐한다고 그래? 안 맞으면 다른 일 찾아보면 되는 거지. 안 그래요?"
"넵!"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오는데 갑자기 이지혜가 날 불렀다.
"차장님."
"응?"
"먼저 들어가시죠?"
"왜? 차 가지고 왔는데 나랑 같이 안 들어가고?"
"저는 강남점에 다시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없이 이지혜를 바라봤다.
"다른 매장들도 한 번 둘러보고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대로 들어가기엔 조금 아쉽네요. 다른 매장 둘러보면서...각 매장 매니저들한테 H.I 편집샵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해줘야 할 거 같습니다."
"...!"
"생각을 해보니까 저에겐 기회네요. 이참에 H.I 편집샵에서 무슨 부정이 있었고, 그걸 저희 본사에서 어떻게 처리하기로 결정했는지 말해주면서 긴장감을 좀 심어주고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차장님."
"응."
"복귀해서 H.I 편집샵 전 지점으로 이번에 강남점에서 있었던 부정을 공문으로 만들어서 보내도 될까요?"
"음...그건 나한테 이야기 할 게 아니라 양 팀장님한테 말을 해야죠."
"아, 네..."
"좋은 아이디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