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00화 (100/325)

# 100

제가 아끼는 직원입니다

"홍성 인터네셔널 공은태 입니다."

-아이고, 차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저 지금 지하 주차장인데, 상황실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하 주차장이라면 저희 지점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오면 오신다고 미리 말씀이라도 좀 해 주시지...상황실요?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이지혜와는 지하 주차장에서 헤어졌다.

그녀에겐 업무를 마치고 혼자 회사로 복귀하지 말고 혹시 모르니 나에게 전화를 달라고 했다.

시간 봐서 같이 점심이나 먹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자고.

물론 난 이지혜가 어떻게 그 하기싫은 일을 쳐내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걸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으니까.

이지혜가 올라가는 걸 확인하고 난 곧바로 강남점 매니지팀의 곽경일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고 통제구역으로 막혀있는 상황실 앞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강남점 매니지팀의 곽경일 과장이 내려왔다.

이제 갓 사십을 넘긴 걸로 아는데, 나이에 비해 흰머리가 꽤 많은 사람이다.

흰머리는 많지만 관리를 잘 해서인지 결코 지저분해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가 끼고 다니는 가는 금테와 어울려 무척이나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다.

보안카드를 꺼내 상황실 문을 열며 곽경일 과장이 말했다.

"무슨 일 생겼습니까?"

"항상 똑같죠, 뭐..."

"그래도 차장님이 직접 오실 정도면..."

"일단 확인만 좀 해보려고요."

"들어가시죠."

적혀있기는 상황실이라고 적혀있지만, 막상 들어가보면 그냥 일반 보안실 정도 개념의 통제 컨트롤 타워다.

여섯 대의 대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고 그 모니터들을 두세 명의 용역 보안 직원들이 별 긴장감 없이 살피고 있었다.

"H.I 편집샵 좀 잡아주실 수 있습니까?"

내 말에 곽경일 과장이 보안 직원에게 해당 매장이 있는 층을 잡아보라고 부탁했고, 곧 H.I 편집샵의 상황이 모니터 하나에 열두 칸으로 분할되어 나타났다.

난 이지혜의 얼굴 표정이 가장 잘 잡힌 화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화면을 좀 키워줄 수 있겠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리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이지혜가 하는 모습을 한참동안 유심히 지켜봤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옆에서 곽경일이 재차 물었다.

"매장 직원들이 장난을 좀 쳤네요. 대외비입니다."

"물론이죠. 그래도 제 입장에선 나중에 위에서 상황실 오픈한 이유를 물어보면 뭐라도 대답을 해줘야하니까요."

"직원가 장난을 쳤어요."

"에휴...어리석기는..."

내 말에 곽경일 과장은 이제 이런 일들은 지겹다 못해 질리기까지 한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도대체 자기들이 해 본 생각, 미리 다른 사람들도 다 한 번씩은 해봤다는 걸 왜 모를까요?"

"그러니까요. 하지말라고 하는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건데, 꼭 보면 쓸데없이 모험심만 강한 사람들이 있죠."

"근데 왜 그만한 일로 차장님이 직접 오셨습니까?"

"저 친구가 어떻게 하는지 좀 보려고요."

난 턱 끝으로 화면에 들어있는 이지혜를 가리키며 말했다.

"...?"

"제가 아끼는 직원입니다. 앞으로 Kidshub까지 저 친구가 담당하게 될 겁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은 저희 쪽에서 해야죠."

홍성이 만토바를 등에 업고 국내에서만큼은 확실하게 CGM을 잡아먹은 이후로 갑과 을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예전같았음 상황실 문 한 번 열어주는데 얼마나 많은 생색을 냈겠나.

생색만 내면 다행이지.

대충 보고 나가자는 노골적인 눈치도 감수해야 했고, 또 어떨 땐 그들이 문을 열어주기 위해 내려올 때까지 1시간, 2시간 무턱대고 기다려야 할 때도 많았다.

특히 곽경일 과장 이전에 우리 홍성을 전담했던 팀장은 무척이나 콧대가 높았다.

뭐 결국 CGM건으로 해고를 당했지만 말이다.

"오래 걸리실 거 같습니까?"

"글쎄요. 조금 지켜봐야 할 거 같은데..."

"그럼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금방 내려가서 커피 하나 가지고 오겠습니다."

앉아서 편하게 상황을 지켜보라며 바퀴가 달린 의자 하나를 내어주는 곽경일.

하지만 난 굳이 사양을 하고 그냥 선 상태에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켜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지혜의 표정과 매장 직원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문제의 부매니저가 오히려 정색을 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거 같았다.

그리고 그 뒤로 매장 매니저가 부매니저의 입장을 도와주기 위해 웃는 얼굴로 이지혜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고.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만약 내가 갔다면, 아니 양 팀장이 직접 갔다면 절대 저렇게 부정을 저지른 부매니저를 두둔하지는 못할테니.

모르는 척 했겠지.

자신에게 튈 불똥이 무서워서라도 자기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식으로 행동을 했겠지.

오히려 내게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기 위해 부매니저의 부정에 깊은 유감을 표현하며 자신의 매장 관리 능력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연기를 했겠지.

하지만 상대는 이지혜.

얼마나 만만할까.

거기다 이런 상황에서 양 팀장이 아닌 이지혜가 찾아왔다는 사실에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됐을 수도 있고.

나이도 어려, 경험도 부족해...가지고 놀기 딱 좋은 상대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이지혜는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을 상대로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내는 상대들의 입장을 단칼에 자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이지혜였다.

마음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해당 매장으로 쳐들어가 교통정리를 해주고 싶었지만,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지혜가 열을 받아야 된다.

열을 받고 사람에 대해 실망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단단해진다.

그래야만 이 일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할 수 있다.

그래야만...그동안 자신이 매장 직원들을 상대로 보여줬던 친절과 상냥함, 그리고 배려가 얼마나 의미없는 것들이었는지, 그렇게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자신의 발목을 잡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여기 이 부분...화면을 조금만 더 키워주실 수 있습니까?"

"네..."

슬슬 이지혜의 얼굴에 짜증과 이 상황에 대한 한계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속으로만 그런 이지혜를 조용히 응원하기 시작했다.

두 볼 가득 바람을 채우며 한숨을 길게 내빼는 이지혜.

눈매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한다.

이지혜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면 심각해질 수록 눈치 빠른 매장 매니저는 슬슬 뒤로 빠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빠끔이들이다.

어디 눈치가 보통인 사람들인가.

비록 상대가 이제 막 사회 생활 1년차에 불과한 애송이라도 상대는 어디까지나 본사 영업부 직원.

부정을 저지른 부하직원을 구제해주려다가 자칫 자신까지 엮여들어갈 수 있다는 것 정도도 모를만큼 미련한 매장 매니저는 아니었다.

"그렇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며 팔짱을 낀 한쪽 손으로 턱끝을 매만졌다.

모니터 속에 든 이지혜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정색이 된 상태였고, 상대의 얼굴은 살짝 비굴 모드로 변해있었다.

이지혜는 그녀가 챙겨온 파일철을 열어, 그 안으로 뭔가를 열심히 체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장 직원들 한 명, 한 명을 차례대로 불러 몇 가지 짧은 질문을 했고.

급기야 이지혜가 포스기 앞으로 서서 매장 직원들의 판매 기록을 확인하기 시작하자, 잠시 이지혜를 가지고 놀았던 매장 매니저가 얼굴을 싹 바꿔 무척이나 정중한 표정으로 이지혜 옆으로 섰다.

그리고 이지혜가 하려고 하는 전산 확인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난 곽경일 과장이 준비해준 커피를 챙겨 상황실을 나섰다.

그런 날 따라오며 곽경일 과장이 말했다.

"오늘 점심 약속 따로 없으시면 같이 하시겠습니까?"

"다음에 제가 오늘 도움받은 것까지 포함해서 제대로 한 번 모시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충분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커피도."

그렇게 곽경일 과장에게 다시 한 번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곧장 H.I 편집샵으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뭐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세요?"

아마도 알바생인 듯 했다.

내가 매장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이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무척 앳된 얼굴의 여직원 한 명이 날 돕겠다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H.I 편집샵 안으로 무거운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날 발견한 매장 매니저.

그녀는 본사 차장이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당황한 듯 했고, 적반하장을 하듯 한 곳에서 툴툴거리고 있던 부매니저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재빨리 몸을 돌려 슬금슬금 카운터 뒤로 난 재고창고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아직 멀었어요?"

난 매장 안으로 진열된 제품들을 의미없이 훑어보며 이지혜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습니다."

"왜?"

"우선 직원 할인가로 물건을 구입한 직원들 리스트를 먼저 뽑아봐야 될 거 같습니다."

"어느 천년에?"

"..."

"그거 다 뽑아서 뭐 어쩌려고요?"

"하지만..."

난 이지혜의 말을 자르며 그녀 옆으로 서 있는 매장 매니저를 불렀다.

"매니저님."

이런 상황에선 실장님이라고 높혀 불러줄 필요가 없는 거니까.

"네, 차장님."

"굳이 리스트까지 다 뽑아봐야 되는 거예요?"

"..."

벽면으로 진열이 된 신발들을 하나, 하나 손끝으로 건드려가며 카운터와의 거리를 좁혔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이만한 일로 본사가 직접 파면 이 매장에 살아남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장사 원 박 투 데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 이 매장 운영에도 차질이 생길 거 아냐. 그냥 매니저님이 밝힐 건 밝히고 숨길 건 숨겨서 알아서 정리해주세요."

"...네."

"그럼 전 본사로 들어가서 매니저님 인티 석달치 제로로 잡는 선에서 커버쳐 드릴게."

"에휴...뭐 어쩌겠어요. 관리 제대로 못 한 내 잘못이지."

"거기 부매니저님, 잠깐 나와봐요."

난 부매니저가 숨어들어간 재고 창고쪽을 향해 말했다.

한껏 겁을 집어먹은채 모습을 드러낸 부 매니저.

"장난쳐서 만진 돈은 토해내야 할 거 아니에요. 이만한 일로 경찰을 부른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고, 우리끼리 조용히 해결합시다. 지금 이 매장 직원들이 신고 있는 나크리스 슈즈...다 그때 나크리스 본사가 트레이닝 하면서 H.I 편집샵 론칭 기념 선물로 한 켤레씩 준 거 아닌가?"

"..."

"이 굵직한 브랜드들 다 놔두고 설마하니 나크리스를 자기 돈주고 사지는 않았을 거 아냐. 지혜 씨."

"네, 차장님."

"그냥 일일이 다 확인하지 말고 직원가로 포스에 찍힌 나크리스 레퍼런스만 확인해요.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봐야 돼? 직원가로 찍힌 나크리스 레퍼런스는 다 그거라고 보면 돼. 정상가랑 직원가 차액만큼 부 매니저님이 토해내고 알아서 나가는 걸로 합시다."

난 부매니저가 아닌 매장 매니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한 켤레라도 직원가로 나크리스 구매한 직원들에 한해서 석달치 인티는 안 나가는 걸로. 혹시라도 그 부분에 억울한 직원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자기가 직접 구매를 해서 진짜 근무할 때 신고 있는 직원이 있으면 개별적으로 이지혜 씨한테 연락을 주라고 해요. 그럼 되잖아."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니저가 다급해졌다.

난 손을 뻗어 매니저의 입을 막았다.

"매출을 유지하는 건 어디까지나 매니저님 능력입니다. 뭐 인센티브가 없으면 판매를 안하겠다는 겁니까, 뭡니까?"

"..."

"여기에 연루된 직원들의 인티를 없앤다고, 문제 없는 직원들 이름으로 매출 잡아서 그 인티 나눠가지는 아마추어적인 작전은 안 쓰는 게 좋을 겁니다. 직원들 개인 매출도 다 본사에서 확인을 할 겁니다. 문제 생기면 뭐...다 아웃인 거죠. 할 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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