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지금 뭐 팔러 가는 거예요?
출근을 하고 엘레베이터 복도에서 사무실 가장 끝에 있는 내 자리까지 가는 동안 사무실 분위기를 한 번 쭈욱 훑어보기만 하면 각 팀별로 그들이 그날 하루 쳐내야할 업무의 중압감 정도는 대략 확인을 할 수 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출근하셨습니까, 차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해외 영업부 부터 시작해 기획 2팀을 거쳐 기획 1팀까지.
난 평소처럼 팀원들과 눈을 맞춰 인사를 해가며 내 자리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자리에 짐을 풀며 심각한 표정으로 아침 미팅을 진행중인 기획 1팀을 힐끗거렸다.
화이트 보드 앞으로 서서 전반적으로 모든 게 다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어내려가는 양 팀장.
그리고 차 대리와 이지혜, 인턴 사원 장학기는 긴장한 얼굴로 각자의 다이어리를 펼쳐 화이트 보드에 써진 내용을 옮겨적기에 바빴다.
"학기야."
"네, 팀장님."
"너 이제 인턴 기간 두 달 남았다. 진짜 어쩌려고 이러냐?"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해야 될 부분은 아니야. 어차피 나는 인사부에서 해달라는대로 인턴 평가서에 체크만 해서 넘겨주면 되는 거니까."
"..."
"그런데 그렇게 안해야지. 내가 그렇게 안 할 수 있도록 네가 날 좀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열심히 하겠다는 말, 벌써 네 달째 듣고 있다. 도대체 네가 말하는 열심히의 기준이 뭐야? 난 그게 진짜 궁금해. 뭐 어떻게 열심히 하겠다는 거야? 잘하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시키는 것만 딱딱 실수 없이 쳐내란 말이잖아. 그것만 잘 해줘도 넌 충분히 네 몫을 하는 거야."
"...네."
"근데 그것도 못하면 어떻게 되겠어? 학기 네가 판단을 잘해야 돼. 네가 뭔가를 실수하고 또 거기에 내가 흥분을 하고 또 화를 낼 땐 너한테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그렇게 하는 건데, 지금처럼 이렇게 좋게좋게 웃는 얼굴로 내가 말을 하잖아? 그럼 그거 네 입장에선 상당히 위험한 거다?"
"..."
아침부터 탈탈 털리고 있는 기획 1팀이었다.
양 팀장이 팀원들을 다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인턴 사원을 털고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해서 차 대리와 이지혜에게 경고를 날리고 있는 거라고 봐야했다.
차 대리와 이지혜는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고, 장학기는 불안한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양쪽 볼에 바람을 가득 불어넣고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해외 영업부 문 팀장이 보고서 하나를 파일에 끼워 내 자리를 찾았다.
그런 문 팀장에게 난 급한 게 아니면 천천히 확인을 해보고 사인을 한 뒤 자리로 직접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다.
기획 1팀의 폭풍전야가 너무 재밌었으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로 갖다드릴게요."
"급한 건 아닙니다. 천천히 확인해보시고 궁금한 부분 있으면 부르세요."
"네, 감사합니다."
문 팀장이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팀원들을 향한 양 팀장의 하소연은 계속 이어졌다.
"이지혜."
"...네, 팀장님."
"음..."
내 눈에는 보였다.
현재 양 팀장이 꼬투리를 잡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게.
하지만 사실 이지혜 정도면 꼬투리를 잡을 게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물론 작정하고 터는데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만, 매일같이 얼굴 맞대고 있는 사이에 작정하고 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현재 양 팀장은 이지혜에게 고마워하고 미안해 해야지, 절대 없는 이유를 만들어가며 갈굴 수는 없는 입장이니까.
"강남점 말이야. 그런 사고 안 터지게 좀 미리미리 관리를 할 수는 없었나?"
"...죄송합니다."
"그...지금 미팅 끝나는 즉시 지혜 너는 바로 강남점 넘어갈 준비해. 백화점 손님들 몰아닥치기 전에 말이야."
"...네."
"가만히 보면 지혜 너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헷갈려."
"..."
"매장 직원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허물없이 지내는 거 다 좋은데...그 사람들 뒤치닥거리 하는 게 네 일은 아니잖아."
"네."
"컨셉을 좀 제대로 잡으라고. 조삼모사를 해야되는 사람이 역으로 조삼모사를 당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금방 끝날 회의는 아닌 거 같았다.
난 탕비실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내려 다시 돌아왔고, 그때부터는 기획 1팀의 미팅엔 더이상 신경을 쓰지않고 내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아침 미팅치고는 꽤 오래 진행이 됐던 기획 1팀의 미팅.
9시 40분이 넘어서야 양 팀장의 잔소리가 끝이났고, 팀원들 모두 무거운 표정을 하며 미팅을 끝냈다.
기획 1팀에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냉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양 팀장은 한숨을 길게 내뺀 뒤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엘레베이터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2의 결산이 시작된다.
아니, 보통은 제2의 결산이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난 그걸 기대하고 있었고.
그런데...
"죄송합니다, 선배님."
인턴 사원 장학기가 어찌할바를 몰라하며 이지혜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괜히 아침부터 저 때문에...죄송합니다, 대리님."
속으로 난 뭔가 한 방이 시원하게 터져주길 내심 바랐던 거 같다.
이지혜는 몰라도 차 대리는 한 마디를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라고 양 팀장이 담배를 핑계로 자리를 비켜준 것일테니까.
그런데 차 대리는 장학기를 잠시 쳐다보다가 그냥 입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뒤 입맛을 다시는 게 끝이었고, 이지혜는 뭔가 할 말은 많은데, 차 대리가 입을 닫아버리니 덩달아 입을 닫아야 하는 입장.
그래서 이지혜는 그냥 양 팀장이 시키는대로 오전 외근을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거 같았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전개였다.
양 팀장이 힘들게 깔아준 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차 대리.
그리고 그런 차 대리의 눈치를 보느라 덩달아 장학기에게 아무말도 못하는 이지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탔다.
장학기 입장에선 지금 이 분위기가 얼마나 불편하고 또 불안할까.
그냥 속 시원하게 욕 한 번 얻어먹으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잠시 뒤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양 팀장은 자신이 예상했던 사무실 분위기가 아니라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천천히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오면 차 대리가 두 사람을 불러놓고 혼을 내든, 아님 좀 더 화이팅을 하자고 격려를 해주든 뭔가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양 팀장은 다들 각자의 모니터 앞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는 팀원들의 모습에 기가 막힌다는 듯 날 쳐다봤다.
그런 양 팀장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어색한 미소로 나 역시 놀랍다는 뜻을 보여주는 게 전부였고.
"팀장님, 그럼 전 지금 강남점으로 바로 가보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천천히 볼 일 보고, 점심 먹고 들어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이지혜가 강남점으로 출발을 한 뒤에야 왜 차 대리가 아까 그 찬스에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는지 대충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장학기 씨."
"네, 대리님."
"담배 한 대 피러 갑시다."
"저 담배 안 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커피 한 잔 하자고요."
"네, 제가 지금 타오겠습니다."
"하아...둘이 이야기 좀 하자고요."
"...아, 네."
이지혜가 외근을 나가고 나서야 장학기를 따로 부르는 차 대리의 모습에, 난 그제야 그동안 차 대리가 내색은 안 했지만 이지혜를 어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부서에서 영업부로 트랜스퍼가 된 인물이다 보니 직급은 대리지만 아직 대리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특히나 이지혜는 자신의 바로 아래 부하직원임과 동시에 자신이 영업 기획부 업무를 익히는데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다 보니 더더욱 싫은 소리를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차 대리가 좀 소심합니까?"
차 대리가 장학기를 데리고 사무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난 자켓을 챙겨들고 기획 1팀 사무실을 찾았다.
그리고 양 팀장에게 물어봤다.
"좋게 말해서 조심성이 많은 편이죠. 근데 어디 가십니까?"
"딱히 할 게 없는 거 같아서요. 양 팀장님 혼자 고생이 많은 거 같아서 오늘 하루 양 팀장님 서포팅이나 한 번 해줄까 싶네요."
"...?"
"지혜 씨랑 같이 들어올게요."
"아..."
"나중에 차 대리 이야기 끝내고 돌아오면 힘 좀 실어줘요. 차 대리 사람 괜찮잖아."
"너무 괜찮아서 탈이죠. 하아...지혜도 그렇고, 차 대리까지...다들 너무 선질이에요."
"그런 거 같더라고요. 아무튼 차 대리가 지혜 씨 눈치 보는 거 딱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닌 거 같아요. 양 팀장님이 신경 좀 써줘야 할 거 같더라고요."
"네, 오늘 회식 한 번 하자고 해야겠습니다."
"장학기...간당간당 해요?"
"아뇨, 잘하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해요. 6개월 고생시켰는데 그냥 돌려보내기도 좀 그렇잖아."
"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난 오전에 외근.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
"네."
엘레베이터 복도로 가는 중간에 해외 영업팀에 잠시 들러서 문 팀장에게 보고서를 전달한 후 곧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회사 앞 택시 정류소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이지혜를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차를 세웠다.
빵!
클락션을 가볍게 누른 뒤 조수석 창을 내렸다.
"어디가요?"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이지혜가 대답했다.
"강남점에 잠시 일이 있어서..."
"강남점?"
"네."
"오, 잘됐네. 나도 지금 강남점 가는 길인데. 타요. 같이 갑시다."
"아..."
"아, 얼른 타. 뒤에 택시들 줄 서 있다."
그렇게 난 이지혜를 차에 태우고 함께 강남점으로 향했다.
"강남점엔 무슨 일로 가는 거예요?"
강남점으로 가는 동안 난 다 알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 이지혜에게 물어봤다.
"그게...H.I 편집샵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아...그거 때문에 가는 거예요?"
"네."
"우와...진짜 제일 하기 싫은 일에 걸려버렸네."
그 말에 이지혜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고, 난 백미러로 이지혜와 눈을 한 번 맞춘 뒤 핸들을 꺾었다.
"악역이 참 어려워요, 그죠? 특히나 그런 기질이 없는 사람이 그런 걸 억지로 하려고 하면 그것만큼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 없는 거거든."
"...네, 그런 거 같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딱 이것만 생각해요. 누가 날 악역으로 만들었나."
"...!"
"누가 날 악역이 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나. 그럼 지혜 씨가 가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는 간단해지는 거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는 없어요."
"네."
"영업일을 서비스업과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비슷한 부분이 많잖아, 따지고 보면. 그래서 영업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웃는 얼굴, 사람 좋은 얼굴로 다가가는 실수를 범하게 돼. 지혜 씨 뿐만 아니라 영업일을 처음 시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요. 나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영업일은 서비스업과 달라요. 상대에 따라 내 자존심을 파느냐, 아님 내가 가진 파워를 파느냐...를 잘 판단해야 돼요."
"..."
"지금 뭐 팔러 가는 거예요? 자존심 팔러 가는 거예요, 아님 홍성 인터 본사 영업부의 파워를 팔러 가는 거예요?"
"..."
"그것만 확실히 알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