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사람들이 다 내 맘 같지가 않다
정말 오랜만에 강혜선과 소고기를 먹으러 갔다.
여차저차해서 아무래도 중국 주재원 근무는 못하게 될 거 같다라고 강혜선에게 말을 했더니, 거기에도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꼈던지 그녀가 먼저 저녁에 따로 회사 사람들과 약속이 없음 같이 소고기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아쉬운 건 확실히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위로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냥 혼자 김치국부터 마셨는데, 상황이 내가 예상했던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조금 민망한 정도?
그마저도 만약 강혜선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혼자 속으로 아깝다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까비..."
"아깝기는 무슨...됐어요. 그냥 좋게 생각해. 그거 안됐다고 큰 일 나는 거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하아...거기서 상무보 그 양반이 그런 변수를 만들어낼지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근데 당신 말만 들어보면, 그 사장 아들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게 정상 아냐?"
"정상이지. 정상 맞아. 그동안 전사 운영본부를 관리했던 이전 상무들이 조금 비정상이었던 거고. 당신 말이 맞아. 이게 정상이야."
처음부터 대리 기사님을 부를 작정으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이 술은 주재원 근무 무산과는 상관없이 그냥 고기가 앞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시킨 것 뿐이다.
소고기를 먹는데, 콜라를 곁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난 강혜선과 소주 한 병을 나눠마시며, 술잔을 비울 때마다 아깝다는 소리를 반복했다.
강혜선은 식사자리 내내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회사는 날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는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내 모습과 지금 내 모습이 겹쳐 보여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어쨌든. 어쩌겠어요? 할 수 없는 거지."
"할 수 없지, 뭐."
"이제 내 기분 좀 알겠네?"
"뭐?"
"마포 아파트 분양에서 떨어졌을 때 말이야."
"그거랑 이거랑 같나, 어디."
"다를 게 뭐가 있어. 나도 청약 통장 쓰면서 딱 당신이랑 똑같은 생각으로 넣었던 거야. 되면 좋고, 안되면 할 수 없는 거고...그런데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더라고. 애초에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계속 될 것만 같고, 또 됐을 때만 생각하면서 좋은 상상을 하게 되는...결국 그래서 청약 떨어졌단 거 확인했을 땐 그 높은 경쟁률에 어쩌면 안되는 게 너무나 당연한 건데 미련을 못 버리겠더라고."
"그런 의미라면 비슷하긴 하네."
"자, 나랑 같이 한 잔 하고 깔끔하게 잊는 걸로."
강혜선이 내 눈 높이 정도로 자신의 잔을 들었다.
그리고 난 그 잔에 내 잔을 붙였다.
술잔을 말끔히 비워놓고 강혜선이 말했다.
"내 입장에선 차라리 잘됐어요. 안그래도 요즘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는데 당신이 중국 주재원 이야기 꺼내는 바람에 계산거리가 더 늘어났었단 말이야."
"그랬겠지."
"이젠 다시 원래 계획대로만 하면 되는 거니까 오히려 그 원래 계획이 이렇게 수월하게 느껴질 수가 없네."
"아직 당신 회사에는 따로 말 안했지?"
"당연히 안했지. 청첩장도 돌리기 전에 휴직 이야기를 꺼내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하긴..."
"사실 내 입장에선 결혼하자마자 애가 생긴 것도 아닌데 바로 휴직 이야기를 꺼내려니까 불편하더라고. 거기다 당신이 마포 아파트 피를 좀 주더라도 하나 해놓자고 해서 그거 대출 땡기는 일로 과장님 도움을 몇 번 받았고."
난 고개만 수차례 끄덕이며 그녀의 잔을 채웠다.
"아무리 은행이 복지가 좋다고 해도 이것저것 혜택을 다 챙겨먹으려고 하다보면 결국 위에 사람들, 같이 일하는 사람들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어. 안 그러려고 해도 어쩌겠어. 그게 직장 생활의 현실인 걸."
"에휴...그래, 좋게 생각하자. 사실 따지고 보면 크게 아쉽지도 않아."
"얼굴은 그게 아닌데?"
놀리듯 강혜선이 장난을 쳤다.
"처음 로또를 샀던 기분이었어."
"...?"
"간만에 즐거운 상상 한 번 해봤다. 그럼 된 거지, 뭐."
"계속해요, 그런 즐거운 상상. 돈 드는 거 아니잖아. 그리고 혹시 또 누가 알아?"
"...?"
"주재원 근무가 우리 마포 아파트처럼 될지."
"그건 또 뭔 소리야?"
"결국엔 샀잖아. 피를 좀 준 게 아깝긴 하지만 어쨌든 분양권으로 계약을 하게 되면 결국 복불복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층수도 딱 우리가 원하는 로얄층으로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나도 요즘 그 생각해. 만약에 딱 분양에 걸렸는데, 저층이 걸렸음 어쩔 뻔 했어? 계약할 때야 큰 부담이 없지만, 막상 나중에 되팔거나 할 때를 생각해보면 돈은 좀 더 들어갔지만 잘 팔리는 층으로 사버린 게 더 나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나도 요즘 그 생각 중.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사는 거지, 뭐. 안 그래요? 당신도 지금 당장 안됐다고 아까워하지 말고,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주재원 근무 해볼 수 있는 타이밍을 노려요. 당신 말대로 하자면, 지금 주재원 근무 시작하면 당신은 죽어나는 거 아냐. 눈코뜰새 없이 죽어라 프로젝트 쳐내기만 해야한다며? 회사로부터 수고했다고, 일 잘한다고 인정은 받게 될 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일만 하러 가는 거면 당신은 그냥 중국이란 나라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일만 하러 중국에서 하는 거야. 그러는 건 큰 의미 없는 거잖아."
그날 이후부터 정말 거짓말 같은 여유가 내 삶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건 금전적인 부분과는 별개의 여유였다.
똑같은 업무량,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프로젝트들, 그리고 한정된 맨파워...
그럼에도 일을 쳐내는 속도와 위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을 때 체감되는 업무 중압감이 크게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만약 중국 법인으로 가게 되면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한다는 걸 계속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딱 멈추니까 진짜 본사 영업부에서 내가 해야하는 업무만 생각하면 되는 거였고, 그러다보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가 크게 늘어난 모양이다.
그리고 인정했다.
항상 입으로는 회사에 와서 일만 하고싶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작 난 회사에 와서 일만 하지 않았다는 걸.
내 개인적인 욕심,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사고의 절반 정도는 내게 주어진 업무 외에, 그것도 근무 시간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그리고 그때부터 주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란 사람, 그리고 영업 기획부가 쳐내고 있는 프로젝트 외적인 부분들.
특히 영업 5팀 시절 내가 데리고 있었던 이지혜와 박기태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영업부가 영업 마케팅부, 영업 기획부로 나뉘고, 또 그 안에 해외 영업부까지 새로 편입이 되면서 챙겨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리고 챙겨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핑계로, 부서원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는 관심의 밀도는 헐렁해질 수 밖에 없었고.
특히 개인적으로 애정이 많이 갔던 이지혜에 대한 관심도 크게 줄어있었고, 이젠 홍성에 계속 붙어있겠다고 먼저 약속을 했던 박기태에 대한 기대감도 어디다 내다버렸는지 기억조차 안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사고 하나가 뻥! 하고 터져버린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버린 사고.
수습이 어려운 사고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수습을 해야할지 정도는 고민을 해봐야하는 크기의 사고가 터져버린 거다.
"강남점에서 매장 직원들이...아니, 직원들이라고 하기 보다는 부매니저 하나가 나크리스를 직원가에 사서 온라인으로 판매를 하다가 걸렸습니다."
양 팀장이 찾아와서 사건의 개요를 간단하게 설명을 했고, 난 그걸 우리 영업기획부가 아니라 QA팀에서 먼저 발견을 한 게 아쉽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래도 나크리스같은 경우는 시작부터 브랜드를 한 번 띄워보겠다고 직원들 프로모션을 많이 넣어줬잖습니까. 그게 문제였던 거 같습니다."
직원가로 사면 가령 100원 짜리를 40원에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줬었다.
일반 다른 브랜드에 비해 10에서 15퍼센트 정도 싼 가격이다.
물론 시즌별로 직원 한 명당 제품 하나 이상은 구매를 못한다는 룰을 만들어놨었고, 또 반드시 근무할 때 신어야 한다는 조항도 함께 넣어놨었다.
하지만 현장이 어디 본사가 컨트롤하는대로 움직여주는 곳인가.
그 안에서도 나름 관리자들의 융통성을 인정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고, 매장 직원들 입장에서도 살짝살짝 룰을 피해가는 재미로 어느정도의 동기를 찾는다는 건 영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
근데 이게 도가 지나쳐버렸고, 또 더 큰 문제는 QA팀에게 바로 적발을 당했다는 거다.
"문제는 이 부매니저가 자기가 산 물건만 그렇게 온라인상에서 판매를 한 게 아니라, 다른 직원들한테까지 부탁을 해서 직원가로 물건을 여러개 샀고, 그 직원들한테 돈을 조금씩 줬답니다."
"얼마나요?"
"뭐 10퍼센트, 20퍼센트 정도씩 챙겨줬겠죠. 정확한 부분은 직접 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럼 뭐 다들 알고 그렇게 했다는 결론아닙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한 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라면 어떻게 처리를 하더라도 알아서 하라고 맡겨준 뒤 경과 보고만 받으면 되는 거다.
그렇게 회사가 떠들썩할 정도로 큰 사고는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일은 사실 비일비재하다.
다만 이 대리가 CGM으로 옮기고 난 뒤 맨파워 부분에서 흔들리고 있는 양 팀장이었기에 살짝 걱정이 됐던 것 뿐이다.
이게 팀장이 직접 가서 해결할 사안은 절대 아니니까.
그렇다고 이 대리가 CGM으로 옮긴 이후,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영업 지원부에서 부서 이동을 한 차 대리가 가서 해결을 하기에도 조금 애매한 사안이었고.
차 대리가 해결을 하더라도 뭘 알아야 해결을 할 게 아닌가.
이제 막 부서 이동을 해서 이지혜에게 도움을 받으며 업무 파악을 하고 있는 차 대리에겐 틀림없이 버거운 업무다.
"양 팀장님이 직접 가지말고 지혜 씨 한 번 보내보지 그래요?"
"지혜요?"
"네. 아무래도 그 매장은 지혜 씨가 좀 더 자주 다니지 않았나?"
"지혜로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뭐가 있어요? 말 안 듣는 인턴 데리고 지금까지 잘 하고 있고, 또 이 대리 빠지고 난 뒤에 유일하게 양 팀장이랑 같이 H.I 편집샵 다 쳐내고 있잖아요. 기회 좋잖아요. 이럴 때 지혜 씨 보내서 매장 관리가 얼마나 힘들고, 또 사람들이 다 내 맘 같지가 않다는 거, 믿는 순간 발등 찍힌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드는데?"
"하긴..."
"그렇게 단단해지는 거죠. 위로 올라가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손에 피도 묻는다는 거, 그게 싫으면 이런 사고가 터지기 전에 알아서 철저하게 관리를 해야 한다는 걸 스스로 느껴볼 수 있도록...지혜 씨 한 번 보내봐요. 잘 할 거예요."
"콜, 알겠습니다."
"그래도 지혜 씨 입장에선 처음 경험해보는 일일테니까 어떻게 해야한다는 팁 정도는 챙겨주고요."
"당연하죠. 사실 이것보다 입장 난처하고 스트레스 생기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혜 씨 정도면...잘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