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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97화 (97/325)

# 97

은근히 뒤끝있겠어요

장 부장과 함께 상무보 방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반투명 코팅지가 절반 높이 정도로 붙어있는 전체 유리벽을 통해 현재 상무보 방 안에서 상무보와 박 이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난 두 사람이 같이 있다는 걸 당연히 모르고 있었고 장 부장 역시 살짝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이사님도 계시네요?”

“그러게.”

“모르고 계셨습니까?”

장 부장은 살짝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똑.똑...

난 장 부장이 노크를 하기 전에 얼른 그의 앞으로 서며 유리문을 두드렸고, 반투명 코팅지가 붙어있는 그 너머로 안에서 박 이사와 한창 대화중이던 상무보와 눈이 마주쳤다.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

난 장 부장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고 그를 뒤따랐다.

“앉으세요.”

여전히 내 눈엔 2프로 정도 부족한 카리스마.

하지만 예전에 이곳에서 금일봉 전달건으로 내가 보는 앞에서 전무님께 질책을 당하던 당시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상무보의 얼굴엔 여유가 있었다.

“같이 점심이나 하자고 불렀어요.”

순간 자동적으로 나와 장 부장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난 재빨리 박 이사를, 장 부장은 상무보의 표정을 훑었다.

“왜 예전에 전사 운영본부장 있는 자리에서 장 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상무보가 말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꽤 기분 좋은 미소였다.

“회의를 위한 회의를 할 거면 차라리 그럴 시간에 다같이 점심이나 먹으러가서 식사도 할 겸 그 자리에서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경제적이지 않겠냐고. 듣고 보니까 장 부장님 말씀이 백번 맞는 말이더라고요. 그냥 편하게 같이 점심이나 하면서 몇 가지 좀 물어볼까해서요.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심각하게 물어볼 일은 아닌 거 같고...”

상당히 의외였다.

상무보가 이런 뼈있는 농담도 던질줄 아는 사람일 거란 생각은 미처 못했으니까.

항상 보면 자신이 맡고 있는 포지션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자기 혼자 몸에 힘이 들어가 있고, 특히 전무님 앞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주눅이 들어있는, 그래서 상무보란 타이틀이 어딘가 모르게 어울리지 않았던 그였는데, 지금은 얼굴 표정과 몸 전체에 힘도 많이 빠져서 이런 뼈있는 농담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슬슬 제법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타이틀에 걸맞는 모습을 갖춰가는 중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가 한 뼈 있는 농담이 당시 자신이 참관한 전사 운영본부와의 미팅자리에서 시종일관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던 장 부장에 대한 돌려까기 일지라도 그 모습이 쪼잔해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단 그러려면 메뉴부터 정해야겠죠?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정말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질문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장 부장을 향했다.

“전 뭐 아무거나 다 괜찮습니다.”

이런...내가 하려고 했던 대답이었는데, 장 부장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장 부장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날 쳐다보기 시작하는 상무보.

“이사님은 생태탕, 부장님은 순두부를 즐겨드시는데, 상무보님은 어떤 메뉴를 즐겨드시는지...”

“생태탕, 순두부 둘 다 괜찮네요. 저도 아무거나 다 괜찮습니다.”

상무보의 말에 장 부장이 메뉴를 결정했다.

“그럼 생태탕 집으로 가시죠.”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11시 20분이 조금 넘어서 회사를 나섰으니까.

박 이사가 즐겨가는 생태집에서 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생태탕 네 그릇을 시켰다.

식당엔 아직 우리 일행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난 빈 컵에 물 네잔을 따라 상무보부터 차례대로 물을 전달했고, 그렇게 나혼자 수저 세팅까지 다 끝냈을 때였다.

“이번에 영업부에서 올린 기획안 말인데요.”

물을 한모금 마시며 상무보가 물었다.

“그거 누구 작품인가요? 우리끼리 있는 자리니까 솔직하게...”

이미 대충은 다 알고 있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장 부장님? 아님 공 차장님?”

“...”

“에이...뭘 숨겨요, 숨기길...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레이아웃은 공 차장이 잡았습니다.”

장 부장의 대답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상무보였다.

“그럼 그렇지...지난 4년간 중국 법인에만 있었던 안 팀장이 갑자기 그런 기획안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지. 차라리 양 팀장이 만든 기획안이었다고 했음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갔겠는데, 아직 한국 시장 파악조차 제대로 다 안됐을 안 팀장이 그런 기획안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이상하잖아요.”

“말 그대로 레이아웃만 제가 잡았을 뿐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디테일은 기획 2팀에서 채운 거고요.”

“내가 보기엔 디테일이 필요없는 프로젝트던데? 말 그대로 레이아웃이 전부인 사업같더만. 내가 기획안을 잘못 본 건가?”

“...”

박 이사가 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주문한 생태탕이 나왔고, 난 가장 마지막으로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몇 차례 떠먹은 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내 아이디어를 안 팀장에게 준 이유를 설명했다.

“밸런스를 좀 맞춰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무조건 해야하는 사업인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걸 안 그래도 중국 법인 관련해서 프로젝트가 밀려있는 문 팀장에게 맡으라고 줄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기획 1팀에게 주자니 기획 2팀과 실적 차이가 너무 많이 나게 될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기획 2팀의 Kidshub를 기획 1팀으로 넘기고 기획 2팀이 이번 기획안으로 올라온 프로젝트만 전담하게 만들겠다?”

“그래야 그나마 기획 1팀과 2팀 사이의 밸런스가 맞을 거 같았습니다.”

“공 차장은 거기서 H.I 편집샵이랑 Kidshub 둘을 합친 것만큼의 매출이 올라올 거라고 보는 거예요?”

“그냥 일반 매출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순 이익으로 잡힐 커미션인 거죠.”

“좋아요, 그건 그렇다치고...물론 반드시 해야하는 사업인 건 확실한데, 이번에 기획안으로 올라온 것까지 포함해서 현재 영업부 맨파워만으로 영업 기획부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다 컨트롤 할 수 있어요? 난 그게 살짝 걱정이 되네요. 동시에 진행해야 되는 프로젝트들이 갑자기 너무 많아졌어요.”

장 부장이 대답했다.

“그렇다고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는 프로젝트들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저나 공 차장도 사실 그 부분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기는 한데, 저희 영업부가 다 컨트롤 못할 거 같다는 걱정이 아니라, 저희가 보내는 프로젝트들을 과연 중국 법인이 현지에서 다 소화를 해줄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장 부장의 음성과 얼굴 표정엔 영업부 전체와 나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박 이사는 그 순간 만큼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그런 장 부장을 쳐다봤고.

“중국 법인만 소화를 해줄 수 있다면 저희 본사 영업부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장 부장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무보가 혼잣말을 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본사 영업부는 아무 문제가 없다...다만 본사 영업부가 보낼 프로젝트들을 중국 법인이 제대로 다 소화를 해줄지가 걱정이다?”

“네.”

“장 부장님도 박 이사님과 생각이 같으시네요. 일단 알았습니다. 식사부터 합시다. 국 다 식겠어요.”

그 이후 식사자리에선 더이상 만토바 물건을 국내에서 도매하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을 땐 이미 영업부 직원 대부분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 상태였고,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와 장 부장은 아주 오랜만에 17층으로 함께 올라가서 담배를 나눠피웠다.

“상무보가 생각보다 예리하네.”

“그러게요.”

“그동안 일부러 얼타는 연기했던 거 아냐?”

“그랬다기 보단 이제 슬슬 감을 잡기 시작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거겠지?”

“그런 거겠죠. 딱히 뭐 직원들 상대로 얼타는 연기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도 명색이 머지않아 사장 타이틀 거머쥘 사람인데, 뭐땜에 일부러 그랬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봤을 땐 돌직구 스타일이면 돌직구 스타일이지, 이리저리 간 보는 스타일은 절대 아닙니다.”

“아무튼 예리하네. 눈빛도 제법 날카로워. 아까 식당에서 순간 살짝 쫄았다.”

“저도요. 크크크...”

“하긴...사실 상무보가 저렇게 타이틀에 맞는 제 역할을 해주는 게 회사 입장에선 너무나 바람직한 거야. 너무 강성으로 나와버리면 우리 영업부가 조금 피곤해질 수 밖에 없겠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선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보다는 저렇게 알아서 중심을 잡아주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고.”

“아까 찔끔하셨죠?”

“뭐가?”

“그때 전사 운영본부랑 미팅할 때 부장님이 하셨던 말 아까 그대로 써먹으시던데?”

“크크크...너도 눈치챘냐?”

“하는 거 보니까 사장님이랑 다르게 은근히 뒤끝있겠어요.”

“누가 우리 사장님이 뒤끝 없다고 해?”

“아니에요?”

“푸흡...아무튼 상무보 스타일 알았음 지금부터 알아서 기어야지.”

“내가 이래서 부장님을 좋아한다니까.”

그런데 그날 상무보와 함께 점심을 한 이후부터 회사 전체에 이상한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어수선함과 술렁거림의 딱 중간쯤 되는 묘한 기운이 영업부로까지 전염이 되기 시작했다.

-공 차장.

“네, 부장님.”

-만토바 리스트 좀 가지고 올라와. 지금 바로.

“만토바 리스트요? 무슨 리스트요? 브랜드 리스트?”

-아니, 중국 사입 업체 리스트.

만토바 제품을 홍성 창고에서 1차 컨트롤을 하고 중국으로 넘기기 위해 만토바 창고 사장들로부터 그동안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객 리스트 일부를 넘겨받았었다.

당연히 내 생각에선 그건 나중에 우리 영업부가 중국 현지 법인 직원들과 함께 관리를 해야 할 업체들이라서 그냥 내가 가지고 있으면 될 줄 알았고.

그런데 그 리스트를 가지고 오라는 연락을 장 부장으로부터 받게 됐다.

뭔가 변수가 생겼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시키는대로 중국 사입 업체 리스트를 장 부장에게 전달했고, 퇴근 시간 즈음에 은근슬쩍 물어봤다.

“근데 아까 사입 업체 리스트를 왜 가져오라고 하셨던 겁니까?”

“이사님이 찾으시더라고.”

“이사님이요?”

“응.”

“아마도 전사 운영본부가 따로 팀을 꾸리지 싶다.”

“...!”

“우리 영업부에 대한 회사 의존도가 너무 크다고 판단을 한 모양이야.”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상무보겠지.”

“아...”

“우리 입장에서야 잘됐지, 뭐.”

“전사 운영본부가 따로 팀을 꾸리게 된다는 게 무슨...”

“운영본부장 말이야.”

“네.”

“중국 법인으로 좌천되지 싶다. 아마 거기가 마지막 기회일 거야. 거기서 기회 못 살리면 아웃되는 거겠지. 그동안 인간적으로 너무 날로 먹었어. 아우,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아, 네...”

“중간에서 손 차장이 조금 아깝게 됐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어. 본인이 희망했던 주재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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