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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95화 (95/325)

# 95

...저 쓰십시오

평수만 놓고 보면 엄청나게 넓은 집은 아니었는데, 구조 덕에 상당히 넓게 보이는 집이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서른두세 평 정도 되는 사이즈의 집이었는데, 구조가 참 특이했다.

남의 살림집을 방문해서 집 구조를 뜯어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실례일까.

그냥 난 바닥에 깔려있는 대리석과 고급스런 카페트, 그리고 벽 타일을 보며 "우와...집이 상당히 좋네요." 하는 정도의 감탄사를 흘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오 법인장은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을 자랑하듯 보여주기 시작했다.

손 차장은 이미 몇 차례 와본듯 했다.

그는 큰 흥미가 돋지 않는 듯, 그저 주방으로 가서 오 법인장의 아내분을 도와 식탁을 세팅하는 걸 도왔고, 그덕에 나와 장향은, 그리고 문 팀장은 별 부담없이 집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방은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 방이 상당히 넓었다.

별도의 거실과 드레스룸, 화장실, 그리고 발코니가 그 방에만 따로 붙어 있을 정도로 상당히 넓었다.

이미 그 방이 차지하는 비율만해도 최소 이 집의 절반은 될 정도로.

그리고 나머지는 현관부터 시작되는 진짜 거실과 주방으로 독립 분리된 공간, 게스트 전용이라고 표현하는 화장실 하나가 전부였다.

집 구경을 끝내고 다시 현관과 연결된 거실로 나왔을 땐 한정된 평수로 이렇게 넓은 거실을 연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머릿속에 대충 그려졌고.

"공 차장, 담배 피나?"

"네, 피웁니다."

"한 대 피러가지. 손 차장. 발코니로 갑시다."

여긴 아직까지 집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 모양이다.

주방 뒤쪽으로 만들어져 있는 발코니로 자리를 옮겼다.

동남아 휴양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나무로 짜져있는 딱딱한 의자가 두 개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의자 사이에는 재떨이가 올려진 협탁이 하나 위치해 있었고.

나와 손 차장에게 그 두 자리를 양보한 오 법인장.

그는 자신이 피우는 중국 담배를 나와 손 차장에게 권했다.

그냥 불을 붙인다고 한 모금을 빨았을 뿐인데, 그 한 모금에 벌써부터 목에 무리가 오는 기분이었다.

"우와...이거 상당히 독하네요."

그런 나의 반응에 오 법인장과 손 차장이 재밌다는 듯 킥킥거렸다.

"여기 중국 담배는 어지간하면 다 10mg이 넘어가더라고. 그냥 맛 신경 쓰지말고 재미삼아 한 대 피워봐요."

몇 모금 빨아보니까 또 나름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오 법인장이 손끝으로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가 홍콩이잖아."

"아! 예전에 출장왔을 때 배로 만든 레스토랑에서 한 번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럼 그 레스토랑도 이 근방이겠네요?"

"바로 앞이지. 걸어서도 갈 수 있어요."

"뷰가 상당히 좋네요."

"홍콩도 뷰가 상당히 좋은데, 지금 여기서 홍콩쪽을 보는 뷰가 더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그럴 거 같았다.

29층이었는데, 바다 건너 홍콩의 핫스팟이 정면으로 다 보이고 있었다.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한강뷰 보다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보고 있는 홍콩뷰가 조금은 더 고급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담배 연기를 조심스럽게 내뿜으며 난 속으로 회사가 제공하는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될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멋질 거 같았다.

과연 몇 번이나 이용을 하겠냐만, 아파트 건물 안에 수영장, 헬스장, 실내 골프장 시설까지 다 갖춰져 있다고 하고, 미리 예약만 하면 정해진 날짜에 하우스 키핑에서 찾아와 집 청소를 다 해준다고 한다. 물론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모두 회사에서 제공을 한다고 하고.

손 차장만 해도 이미 법인에서 제공하는 차를 타고 있었다.

중국 법인 주재원 근무가 점점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 자리에서 난 현재 사장님이 중국 법인을 특별관리 하기 시작했다는 정보까지 얻게 된다.

"벌써 내가 여기오고 두 번이나 사장님이 다녀가셨어요."

오 법인장의 말에 따르면 사장님이 이문 차장님과 몇몇 관리부서장들을 데리고 지난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현지 법인을 방문하셨다고 한다.

"처음 오셨을 땐 전무님도 같이 오셨죠. 전무님이 공 차장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그날."

"지금 공 차장이야 뭐 손만 대면 다 되는 상황 아닙니까. 만토바 물건 샌딩건도 공 차장 작품이고."

"에이, 아니라니까 또 그러신다."

"내 입장에선 장 부장 작품이라고 하는 것 보다 그냥 공 차장 네 작품이라고 하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해."

이상하게 손 차장 역시 한국에서와는 달리 마음의 여유가 상당히 많이 생겨 보였다.

비록 그게 그의 본심일지라도, 이렇게 대놓고 다른 부하직원들 다 있는 앞에서 장 부장에 대한 질투심을 표현할 스타일은 아닌데, 이상하게 그런 질투심이 편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선 장 부장에 대한 질투심만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젠 그를 인정하기에 질투 정도는 해도 되지 않느냐는 뉘앙스를 깊게 풍기며 그걸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농담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근데 다음달에 사장님 다시 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건 내일 쯤 손 차장이 출근해서 이문 차장한테 한 번 물어봐요. 그때 한국 돌아가실 때 말씀하신 걸로 봐선 다음달 창고 부지 확정나면 다시 오실 거 같긴 하더라."

그렇게 남자들끼리 회사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장 대리와 문 팀장은 사모님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일상적인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녀들의 대화를 통해 현재 오 법인장 내외에겐 아들이 두 명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장남은 현재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둘째는 이제 막 전역해서 학교에 복학을 한 상태라고 한다.

"자녀분들 한국에 떨어뜨려놓고 두 분만 오시려니까 안 불안하셨어요?"

"으으음...불안할 게 뭐 있어요? 다 키워놨는데, 지금부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야지. 오히려 지금 우린 너무 좋아요. 애들이랑 떨어져 있으니까 괜히 다시 신혼이 시작된 거 같고, 애들도 뭐 좋겠지. 잔소리 하는 사람들 없으니까."

물론 불편한 점도 많겠지만, 어쨌거나 오 법인장 내외의 현지 생활 컨디션만 놓고 보면 참 좋아 보였다.

그리고 부럽기도 했고.

다른 게 부러웠던 게 아니라 오 법인장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회사로부터 제공을 받았다는 부분, 그리고 아직까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부분이 참 부러웠다.

예전이야 30년 일해서 20년을 산다는 말이 가능했다.

중간에 이직이란 걸 하든, 안 하든 어쨌거나 처음 직장 생활 시작해서 정년까지 최소 30년 정도는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엔 은퇴 후 20년 정도의 노후만 준비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그건 우리 아버지들 세대의 말인 것이고, 따지고 보면 지금 오 법인장도 요즘같은 시대에 꽤 직장생활 장수를 하는 측에 들어간다.

요즘은 20년 일해서 3,4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세대다.

어느 회사에서 50살 넘어까지 꾸준히 승진이라는 걸 하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회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끽 해봤자 40대 후반, 50대 초반까지다.

그나마도 그 회사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있고 또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로또에 걸리고, 그걸로 내 명의의 집을 하나 사고.

그리고 또 내 기준에선 상당히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 회사 일에만 모든 삶의 포커스가 집중되어 있던 시야를 조금 더 넓게 가질 수 있게 되니까 지금의 난 상당히 위태로운 포지션에 서있다는 걸 알게 됐다.

꼴뚜기도 한 철이라고 지금이야 회사에서 여러 실적을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하고 있지, 지금 내가 잘나가는 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일만 잘해서는 절대 직장생활 장수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버리니까 그때부터 좀 마음이 편해졌던 거 같다.

그리고 회사가 내게 뭘 원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뭘 원하게 될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던 거 같다.

일전에 전무님이 개인적으로 날 불러 중국 주재원 근무를 제안하셨을 때, 당시엔 내게 그걸 정중히 거절할 수 있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있는 이유도 숨겨야 하는 상황이 될 거 같았다.

조금 손해보는 듯이 행동하라는 아버지의 말씀.

그렇게 손해보는 듯이 하는 게 결국 나중에 가서 보면 손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가 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난 그 말 뜻을 이제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버렸고.

중국 출장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난 강혜선과 이야기를 모두 끝내놓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장 부장과 박 이사를 상대로 밀당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날 자기네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있고, 나 역시 그들에게 묻혀갈 수 밖에 없다는 걸 이젠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기로 결심한다.

아무래도 이런 건 내가 먼저 말을 꺼내주는 게 장 부장이나 박 이사의 입장에서도 여러 작전을 구상해보기에 수월할 테니까.

월요일 오전 근무 중에 박 이사가 나와 장 부장을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아무래도 만토바 창고 사장들과 함께 했던 중국 출장에 대한 보고를 받겠다는 취지같았다.

이미 출근과 동시에 장 부장에게 먼저 보고를 했었다.

그래서 박 이사에게는 장 부장이 전체적인 보고를 하고 내가 디테일만 체크를 해주는 식으로 보고가 이어졌고, 그 자리에서 박 이사는 오 법인장과 손 차장이 만토바 브랜드들과 국내 아동복 브랜드들을 동시에 받아서 핸들링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거기다 기존 중국 법인이 핸들링했던 브랜드들도 문 팀장이 선별한 브랜드들로 교체가 이뤄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만토바를 받는 게 너무 성급했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을 하는 게 맞았던 걸까?"

"아니죠."

박 이사의 의심에 장 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 아니었음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는 말이야. 하나씩, 하나씩 진행이 되면 얼마나 좋아? 꼭 보면 일이 없을 땐 한 없이 조용하다가 뭐만 하나 터지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이 몰린단 말이야."

"...저 쓰십시오, 이사님."

"...?"

이미 모든 마음의 준비와 계산이 끝난 나였다.

박 이사와 장 부장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회사를 위해, 영업부 전체를 위해 내가 조금 손해를 보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필요하실 거 같으면 말입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장 부장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어차피 기획 1팀이야 H.I편집샵, 나크리스 모두 목표치까지 다 끌어올린 상태라 유지만 하면 되는 거고, 기획 2팀의 Kidshub도 브랜드 업데이트만 꾸준히 시켜주면 되는 상황 아닙니까. 자잘한 거 다 빼고 굵직한 것만 놓고 보자면, 중국 법인과 연관된 프로젝트라면 안 팀장이 준비하고 있는 국내 아동복, 문 팀장이 준비하고 있는 국내 의류, 그리고 만토바, 이 세개인데..."

난 잠시 말을 끊어놓고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차피 나크리스는 기획부에서 어느정도 띄워놓고 영업 마케팅부로 토스를 하기로 되어있던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안 그래도 제가 조만간 양 팀장이랑 안 팀장을 따로 불러놓고 교통정리를 한 번 해줄 건데, Kidshub를 기획 1팀이 관리하도록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장 부장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리고 박 이사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까끌한 턱끌을 매만졌다.

"만토바 브랜드를 중간에서 컨트롤하려면 무조건 장향은이가 있어야 됩니다. 브랜드가 어디 한두 개입니까? 장 대리가 센터를 보면 혼자서 컨트롤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센터를 보게 만들면 두 명, 세 명이 붙어야 됩니다."

"하긴...Kidshub를 양 팀장한테 넘기고 기획 2팀한테 만토바 국내 컨트롤을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겠다."

"그리고 제가 안 팀장이랑 같이 중국 법인을 수시로 왔다갔다 하겠습니다."

"..."

"어차피 그렇게 하라고 저한테 복수 상용비자 만들라고 하셨던 거 아닙니까? 현재 영업 기획부 프로젝트의 70퍼센트 이상이 중국 법인과 연관이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저 쓰십시오, 이사님. 미안해하지 마시고."

미끼를 던진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입질이 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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