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호텔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강혜선은 본격적으로 작전을 바꾸기 시작한다.
내게 중국 법인 주재원 근무자들의 생활 컨디션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봐달라고 주문을 했다.
사실 주재원 근무가 있는 회사에 다니다보면 그들의 현지 생활 컨디션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직장인들이 어디 뭐 회사에 출근을 해서 일만 하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업무.
그 반복되는 업무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추가하기 위해 타 부서의 이슈를 귀동냥하고 또 타 부서와의 근무환경을 비교해 현재 내 컨디션에 안심하고 또 불만을 만들어내는 게 우리 직장인들의 흔한 일상인 것을.
"거기에 무슨 교통 대학교가 있나봐. 나름 거기선 유명한 대학이라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아무튼 가정이 있는 직원들, 특히 우리 같은 케이스는 배우자가 거기서 현지 생활 적응겸 중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회사가 세 학기 동안 학비를 지원해주나봐."
"두 학기면 두 학기고, 네 학기면 네 학기지 세 학기는 또 뭐야?"
"들어보니까 거긴 일 년 코스가 세 학기인 거 같더라고."
"아, 그래요? 그거 또 특이하네."
"일반 단과대가 아니라 일종의 어학당 개념이라서 그런 모양이야. 그냥 짧게 두 달 반 코스로 1년 동안 세 학기를 진행하는 모양이더라고."
"하긴, 그건 또 학교마다 다 커리큘럼이 다를 수가 있는 부분이니까."
"아무튼 일 년에 학기가 세 번 있는데 일 년 동안은 법인에서 전액 지원을 해주고, 거기서 만약 당신이 좀 더 욕심이 생겨서 더 배우고 싶다고 하면 그 뒤부터는 50퍼센트 정도 학비를 지원해주는 모양이더라고. 근데 중국이 대학교 학비가 싸대. 한국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듣자하니까 한 학기 등록금이 한국돈으로 150만 원 정도? 그 정도면 되는 모양이더라고."
"거기에 50퍼센트면 한 학기당 75만 원 정도네? 괜찮다."
"그냥 뭐 꼭 중국어를 배운다는 느낌 보다는 나 일하러 가있는 동안 당신 혼자 무료할 거 아냐. 거기서 한국 사람들도 사귀고, 그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현지 생활 적응하는 팁도 좀 얻고 그러는 거지. 다들 그렇게 하는 모양이야."
"그래도 기왕 그런 기회가 생기는데 이참에 중국어도 좀 익혀놓으면 좋지. 나 사실 안그래도 한 번 정도는 리프레쉬가 필요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
"당신이야 출장 명목으로 한 달이 멀다하고 여기저기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잖아요. 거기다 비싼 돈 주고 배운 영어를 써먹을 기회도 나보다는 훨씬 많고. 난 요즘 한 번씩 은행에 외국 손님들이 찾아오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그때 보니까 잘 하더만."
"업무할 때 쓰는 영어야 딱 정해진 필요한 단어만 쓰는 거니까. 나 지금 영어가 상당히 줄었어. 이게 은근히 스트레스고 또 아깝단 생각이 든다? 확실히 언어라는 게 안 쓰니까 줄어들 수 밖에 없어. 아무튼 언제부턴가 이것저것 다 집어던지고 혼자 한 1년 정도 휴직계 내고 해외로 여행이나 다녔으면 좋겠단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던 거 같아."
"에이, 직장 생활 하는 사람치고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나는 뭐 안 그럴 거 같아? 똑같아. 사실 지금 내가 여기에 살짝 욕심이 생기는 이유에 그런 부분도 포함이 돼. 나도 지금 살짝 찼어. 너무 안전한 길만 선택을 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하는 거 같다. 아무튼 잘됐네. 거기 수업 영어로 진행한대."
"당연히 그렇겠지, 뭐. 대부분이 나처럼 중국어라고는 니하오 밖에 모르는 사람들일텐데,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중국어로 진행을 할 수는 없을 거 아냐. 아무튼 그런 거 말고 좀 더 우리 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알아봐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어?"
강혜선이 그런 건 다른 회사들도 다 제공하는 기본적인 것들이라며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요구했다.
"가령 당신이 현재 기대하고 있는 포지션으로 주재원 근무를 가게 되면 거기 있는 동안 우리가 살게 될 집 컨디션이나, 또 뭐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가구같은 걸 우리가 직접 장만을 해야하는 건지, 아님 기본적인 건 다 세팅이 되어있는 건지...그런 것들 말이에요."
"아..."
"사실 그렇잖아. 그런 거 제대로 안 챙겨보고 막상 사람들 하는 말만 듣고 환상에 빠져서 딱 갔는데, 그런 살림살이들까지 우리가 직접 다 준비를 해야되는 거면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가 있어요. 고작 2년 정도 생활하면서 그런 것들까지 우리가 직접 다 준비를 해야하는 거라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세이브 못 할 수도 있어요. 그걸 뭐 여기서 하나하나 다 사서 보낼 거야, 아님 현지에서 사서 쓰다가 다 버리고 올 거야?"
"진짜 어지간히 꼼꼼하다."
"꼼꼼한 게 아니라 당연히 챙겨봐야 되는 부분이지. 우리 아직 신혼집에 채워넣을 것들 결정도 안했잖아."
"다 결정한 거 아니었어?"
"아직 안 샀잖아."
"그렇게 몇 번을 찾아가서 살 것처럼 굴어놓고 안 사면 욕얻어먹는다."
"할테면 하라지 뭐? 그런 게 중요해요? 덜컥 주재원 생활 하게 되면 신혼 살림이라고 큰 맘 먹고 비싼 돈 주고 산 것들이 결국엔 얼마 쓰지도 못하고 구형이 되어버리는데, 그럼 돈만 이중삼중으로 나가는 거지."
틀린말은 아니었다.
물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혼자 주재원 근무를 하게 될 걸 상상하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향후 1,2년 사이에 주재원 근무를 하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강혜선의 말처럼 굳이 신혼집을 큰 돈 들여 꾸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신혼집으로 쓸 집이야 어차피 주재원 근무를 가 있는 동안은 비워놓느니 월세를 돌려놓고, 한 번씩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한국에 들어올 일이 있으면 호텔을 이용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일테니.
그리고 또 월세를 돌리려면 짐을 다 빼줘야하는데, 최소한으로 간소하게 세팅을 하는 게 아무래도 유리할 것 같았다.
모든 걸 일시 스톱시킨 강혜선.
강혜선은 꽤 장기간 직접 백화점과 인터넷을 비교분석하며 간신히 확정지었던 신혼집에 들어갈 가구, 전자제품, 주방용품들에 대한 구매 결정을 일시 스톱시켰다.
"아, 어지간하면 그냥 사."
"아, 왜요?"
"안 피곤해? 벌써 두 달 가까이 계속 고민하다가 간신히 추려놓은 것들이잖아. 그걸 왜 다시 처음부터 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냥 다 사놓고 만약에 중국 넘어갈 일 생기면 어디 창고 같은데 돈 주고 보관시켜놓으면 되잖아."
"그니까 쓸데없이 왜 그러냐고."
"안 피곤해?"
"이게 왜 피곤해? 난 재미만 있구만. 난 우리 신혼집 상상하면서 머릿속으로 꾸며보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는데, 당신은 나랑 같이 집 알아보러 다니고 집에 채워넣을 것들 구경하러 다니는 거 피곤해요?"
"재밌게 하는 것도 어디 뭐 한두 번이지..."
"아, 피곤하면 그냥 나한테 다 맡겨요. 난 하나도 안 피곤하니까. 대신 잔소리만 하지마. 그것만 안해줘도 도와주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들음 자기 혼자 다 하는 줄 알겠네. 정작 하는 거라고는 나 따라 다니는 거 밖에 없으면서. 줄자를 가지고 다녀, 아님 치수를 외우고 다녀? 다 내가 하고 있구만, 뭐 하는 게 있다고..."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 결혼해선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언제부턴가 은근슬쩍 기선제압을 시도하는 강혜선이었다.
"당신 다음주에 중국 출장 가잖아요."
"응."
"가서 거기 누구? 손 차장님이랬나?"
"응."
"그분한테 디테일하게 좀 물어봐요. 어차피 당신이 주재원으로 가게 되더라도 최소 그 분 타이틀로 가게 될 거 아냐."
"손 차장님 보단 한 타이틀 올려받고 가겠지. 그렇게 안 해주면 갈 이유가 없는 거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기대일 뿐이다.
이렇게 혼자 상상하며 김치국 마시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기분 좋은 상상 좀 한다고 돈 드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최소 본부장 정도 되면 어떤 컨디션인지 좀 자세히 알아봐요."
"거 참...회사가 알아서 세팅을 해주겠지. 우리 회사가 어디 뭐 동네 구멍가게야?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이야. 대기업이 그런 부분 하나 제대로 안 챙겨주겠냐고."
"안 그래도 할 거면서 거 참 말 많아."
확 그냥 눕혀버릴까?
오늘은 그냥 집에 못가게 만들어?
안 그래도 하는 짓도 예뻐 죽겠는데 엄한 표정까지 지어보이니까 그게 그렇게 섹시해 보일 수가 없었다.
"뭐하자고 지금?"
"뭐가?"
"이 손 좀 치우지?"
난 등 뒤에서 강혜선을 꼬옥 끌어안았고, 그녀는 점점 위로 올라가는 내 손을 매섭게 때리며 내 품에서 도망쳤다.
"아무튼 다음주에 출장가서 구체적으로 좀 알아봐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잠깐만 이리와봐."
"아, 됐다고. 피곤하다고."
"그니까. 피곤하니까 잠깐만 이리와봐. 내가 마사지 좀 해줄게."
"건드리지마라. 딱 피곤해 죽을 거 같다."
"언제부턴가 말이 계속 지나치게 짧아진다?"
"...요."
그리고 일주일 뒤, 기획 2팀의 장 대리와 해외 영업부의 문 팀장을 데리고 중국 법인으로 출장을 간다.
장향은에게는 국내 아동복 수출건 보다는 만토바 창고 사장들을 케어하는 쪽으로 더 집중을 하게끔 주문을 했었고, 반대로 문 팀장에게는 기획 2팀의 국내 아동복 수출건과 현재 해외 영업부가 거의 막바지 작업에 돌입한 국내 중저가 브랜드 수출건에 매달리게끔 주문을 했다.
장 대리에게 통역을 맡기고 만토바 창고 사장들과 함께 현지 물류 창고를 둘러보며 간단한 브리핑을 진행했다.
"아직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장 대리가 만토바 측의 궁금증을 대신 전달했다.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하세요."
"관세 부분에 대한 부분인데, 어째서 이탈리아 현지에서 샌딩을 하는 거랑 한국을 거쳐 샌딩을 하는 것에 관세적인 부분에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고 하시네요. 어차피 따지고 보면 동일 제품이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게 대답을 드릴 수가 없다고 하세요. 중국이란 나라의 특징이니까. 사치품에 대한 기준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인 나라가 바로 중국이죠. 그리고 우리 홍성이 법인으로 센젠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도 하고요. 일단 중국에 몇 안되는 관세프리존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센젠이고, 한국 수출 기업이 가장 손쉽고 안전하게 침투할 수 있는 구멍이 바로 이곳 센젠이라고 설명해주세요."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 거 같은데, 지금 홍성이 하겠다고 하는 방법이 불법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하시네요."
"불법을 선택할만큼 우리 홍성이 급할 이유는 없다고 말해주세요. 그런 건 뭔가 절박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우리 홍성처럼 잃을 게 많은 회사는 절대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하지 않는다고. 폭스바겐을 예로 들어주세요. 그럼 쉽게 이해를 하실 겁니다. 센젠이라는 지역이 가진 관세프리존의 특징상 중국 전체로 놓고 봤을 때 폭스바겐 차값이 가장 싼 동네 중 한 곳이 바로 이곳이죠. 폭스바겐 본사가 이곳으로 바로 샌딩을 하지 않습니다.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 현지에서 어셈블링이 되는 폭스바겐 차량과 가격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현지 어셈블링 차량이 아닌 ADM (본토 제조 차량)차량들 같은 경우 우리 홍성처럼 중간에 다른 국적의 컨트롤 기업을 끼고 센젠으로 보내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관세 혜택으로 다른 성에 비해 차값이 싸다보니 다른 성에서 차를 구입하러 많이들 온다고 하더라고요. 여행삼아 이곳에 왔다가 고급 호텔에 며칠 머물고 맛있는 음식들 충분히 먹고, 차 한 대 사서 돌아가면 그 여행 경비 만큼은 자기네 동네에서 차를 사는 가격에서 빠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2박 3일에 걸쳐 만토바 사장들을 데리고 다니며 중국 법인이 확보하고 있는 물류창고 부지를 보여주고, 또 이곳에서 기대하는 만토바 사업의 시장의 규모를 디테일하게 확인시켜준 뒤 그들을 먼저 이탈리아로 보냈다.
그리고 우리 홍성 직원들의 출장 마지막날 저녁이었다.
박 이사가 직접 임명한 현지 법인장이 출장을 온 우리를 상대로 저녁 식사를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다.
전 중국 법인장의 아웃과 박 이사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번에 이사 진급을 하게 된 인물이다.
오진행이라는 분인데, 인천에서 홍성의 물류창고를 총괄하셨던 분이다.
현재 중국 법인은 영업보다는 물류창고의 시스템을 재정비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었고, 또 박 이사의 입장에서는 능력이 좋은 사람보다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했다.
말 그대로 중국 현지에서 자신의 지시를 그대로 실행해줄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거기에 오진행, 현 중국 법인장이 낙점이 된 것이고.
하지만 일전에 박 이사에게 듣기로 임시방편으로 오 법인장을 심어놓은 것이지, 그에게 법인장 타이틀을 오래 채워놓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해외 생활 경험이 전무하신 분이고, 또 무엇보다 오 법인장 내외는 두 분 다 50이 넘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쉽게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1,2년 내로 중국 주재원 근무의 기회가 올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서오세요. 잘 찾아왔네?"
"누가 이 앞까지 태워주더라고요."
오 법인장이 살고 있는 집 현관안으로 들어서며 내가 장난스레 말했다.
"누가?"
"제가요."
그리고 내 뒤에서 손 차장이 대답했다.
"어?"
"왜 저는 안 부르십니까?"
"아차차...내가 한국에서 오신 분들 대접한다는 생각에 손 차장 생각을 못했네."
"그러실 줄 알고 알아서 따라왔습니다."
"잘했어, 잘했어. 얼른 들어와요. 뭘 또 이런 걸 사가지고 와? 그냥 편하게 우리끼지 밥이나 먹자고 부른 건데..."
집이...말 그대로 호텔이었다.
법인장에게 제공되는 집은 호텔식 아파트라고 하길래, 그게 어떤 건지 내심 궁금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보니 호텔식 아파트라는 게 어떤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