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진짜 만약에 하는 말이야.
새해의 첫째주 토요일이었다.
부산에서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아영이가 서울로 올라온다.
상견례를 위해 올라오셨는데, 그 전부터 강혜선은 마음이 급해진다.
그냥 편하게 하자고, 양가 부모님들 모두 그러길 원하시는데 괜히 긴장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고 몇 번이나 그녀를 진정시켰지만, 여자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당일치기로 다녀가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거 같아 일부러 상견례 장소도 가족들이 머물게 될 호텔 한식당으로 잡아버렸다.
다행히 오래전에 이미 날짜를 잡아놓은 덕에 매형은 힘들었지만 누나는 마트 일 스케줄을 뺄 수 있었다.
"니 사는데 함 가보자."
"뭐한다고. 됐다."
"가보자."
"아, 됐다고요. 볼 거 뭐 있다고 거길 계속 가자고 하노?"
토요일 오후였다.
호텔 체크인을 먼저 시켜드리고 강혜선이 저녁 식사 예약을 해놓은 식당으로 연락해서 메뉴를 바꾸고 있는 동안 갑자기 어머니가 다가오시더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을 한 번 가보자고 하시는 거다.
그동안 한 번도 보여드리지 못했다.
부모님이 서울에 오실 일이 없으셨으니까.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고, 이 나이 먹어서까지 혼자 좁은 골방 비슷한 원룸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자니, 이상하게 가족이고 또 못 보여줄 게 없을 거 같은 부모님인데도 살짝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거 엄마가 니 먹일라고 집에서 싸왔다이가. 이거만 좀 풀어주고 가구로, 니 사는데 잠깐 갔다가 저녁 먹으러 가자."
"그냥 도. 내가 나중에 알아서 냉장고에 넣어놓을게."
"아, 니가 못 하는 거니까 그라는 거 아이가. 어디 집에 꿀 발라놨나. 와 엄마가 아들 사는데 함 가보겠다는데 그라노?"
강혜선도 옆에 있는 상황이었다.
스마트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강혜선이었다.
마침 호텔에서 집까지는 차로 15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거 참 사람 번거롭게..."
결국 난 누나와 아영이는 호텔에서 잠시 기다리게 만들어 놓고 부모님만 모시고 강혜선과 함께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원룸으로 향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민망한 것일까.
부모님께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게 이렇게까지 민망할 줄은 몰랐다.
"깨끗하게 해놓고 사네..."
원룸 안으로 들어선 부모님.
그리고 어머니는 좁은 원룸 안을 스윽 훑어보시고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당신이 생각하셨던 것 보다는 깔끔하게 해놓고 산다고 말씀하셨다.
"혜선이 니가 와서 치았제?"
"...네."
"그라믄 그렇지...야가 이렇게 깔끔하게 해놓고 살 아가 아이다. 맨날 와서 니가 대신 치아주나?"
"..."
"그라지마라. 버릇된다. 결혼해가 같이 살더라도 분리할 건 딱딱 분리를 해가 살아야지, 니가 어디 뭐 집에만 있는 아도 아이고 니도 밖에 나가 일한다고 힘들낀데 우째 니가 다 하노?"
아버지를 침대 위로 잠시 앉아계시게 만들어 놓고 난 냉장고 앞으로 서서 가지고 오신 음식을 풀고 계시는 어머니 옆으로 섰다.
"분잡다. 고마 저 니 아버지 있는데 가서 가만히 앉아 있그라."
"뭐 어떻게 하는지 볼라고."
"뭐 볼거나 있나?"
"그람 뭐한다고 여기까지 오자고 했는데요?"
"아, 그냥 아들래미 어떻게 살고 있는지 좀 볼라고 오자고 했다. 와?"
"..."
내가 이렇게까지 불편한데 강혜선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렇게 난 아버지 옆에 앉아서 멀뚱히 스마트 폰만 만지고 있었고, 강혜선은 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하고 계신 일을 돕지도 못한 채, 그냥 불편하게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어머니가 하고 계시는 움직임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혜선이가 손이 많이 야무지네."
어머니는 냉장고 안에서 꺼낸 몇 가지 반찬통을 열어보시며 말씀하셨다.
"찬 밥 이렇게 보관하는 건 또 어디서 배웠노? 하나씩 렌지에 넣어가 데프기만 하면 되구로 잘 해놨네."
"..."
"뭘 그렇게 서있노. 고마 편하게 있그라. 설마하니 내가 뭐 트집 잡을라고 와보자고 했겠나. 그런 거 아이다."
"...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충분히 내가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다 끝내놓으시고 어머니가 강혜선 부르셨다.
부르셨다는 것도 좀 우습다.
어른 넷이 들어가면 이미 그것 만으로도 꽉 차버리는 좁은 원룸 골방 아닌가.
그냥 바닥에 앉으시며, 당신 앞으로 앉아보라고 하신 거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침대에 앉으셔서 지난 세월 아들이 혼자 살고 있었던 환경을 눈에 담고 계셨고.
"이거...얼마 안된다."
어머니가 도장이 함께 든 통장 하나를 꺼내놓으셨다.
아버지는 어차피 당신은 잘 듣지도 못한다는 핑계로 여전히 딴청을 피우고 계셨고, 어머니는 그 통장을 강혜선의 손에 꼭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더 못해주가 미안하다."
"어머니, 저희 이거 필요..."
"단디 갖고 있그라."
"..."
"이거를 참...야 누나 있는 앞에서 주기도 좀 뭐할 거 같더라고. 느그 집에서 1억인가 해줐다메?"
"..."
"우리는 그게 안된다. 혜선이 니도 우리집에 몇 번 와봐서 알겠지만, 지금 우리집 형편이 그렇게까지 해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솔직히 인자서야 하는 말이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 담보 잡아가 좀 더 만들어줄라캤는데, 그건 또 은태 야가 한사코 싫다 안하나."
그리고 난 강혜선의 손에서 통장을 건네받아 어머니 앞으로 내밀었다.
"엄마도 참...고마 잘 가지고 있다가 두 분 용돈이나 하세요."
"니가 와 낄데 안낄데 다 끼고 난리고. 니 주는 거 아이다."
어머니는 다시 그 통장을 강혜선의 손에 꼭 쥐어주셨다.
"우짜다보이 우리가 염치가 많이 없는 사람들이 됐뿠네. 나도 딸자슥 치아봐서 안다."
"아니에요, 어머니. 진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래도 아는 괜찮다,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이라...결혼식 준비꺼정 싹 다 느그가 다 한다카이 고맙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하고...느그 부모 얼굴 볼 면목도 좀 없고 그렇다. 니가 이해를 좀 해도."
"어머니, 요즘은 원래 다 작게작게 해요. 있는 사람들도 일부러 그렇게 해요."
"올해 설 차례까지만 집에서 지내고 내년부터는 명절 차례까지도 싹 다 절에 갖다 맡길거니까 두 사람은 고마 두 사람 알아서 잘 살아주기만 하믄 된다. 무슨 말인지 알제?"
"명절 차례는 그래도..."
"와? 명절 때마다 니가 와서 차례 준비하구로?"
"하면 되죠."
"됐다, 마. 우리집이 어데 조상 덕 볼 일 있긋나. 그라고 요즘 사람들 다 그란다 안하나. 조상 덕 볼 집은 이미 다 보고 명절에 차례 준비 하는 게 아이라 해외 여행 준비한다고. 나도 인자 나이가 들어가 만사 귀찮다."
2천만 원이 든 통장이었다.
2천만 원이 찍힌 날짜를 보아하니 아들 결혼 자금으로 보태주기 위해 최근에 이 통장을 새로 만드셨던 모양이다.
경제활동을 두 분 다 계속 하고 계시기에 이 돈의 출처를 궁금해할 이유는 없었지만, 괜히 마음이 안좋았던 건 사실이다.
거기다 이게 참 애매했던 게 강혜선의 부모님도 없는 형편에 1억을 힘들게 맞춰주신 거라, 우리 부모님만 힘들고 고생하시니 이 돈을 다시 돌려드리자는 말을 못하겠더라는 거다.
그렇게 다음날 상견례를 마치고 부모님과 누나, 아영이를 차에 태워 서울역까지 모셔다드린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강혜선이 원룸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어머니에게 받은 통장을 내게 건네며 처음으로 우리집 경제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왔다.
"이건 그냥 당신이 알아서해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 돈은 진짜 좀 불편하다. 나 사실 처음 우리 부모님이 1억 해준다고 했을 때, 그때도 상대가 당신만 아니었으면 필요없다고 했을 거예요."
"...?"
"솔직히 그렇잖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아파트부터, 여기 이 원룸 보증금에 또 당신이 따로 가지고 있는 현금...내 입장에선 내가 모아놓은 돈에 부모님이 해주시겠다고 하는 1억이라도 가지고 와야 당신한테 덜 미안할 거 같았어요."
"뭔 그런 소릴 해?"
"당신이 나였음 어땠을 거 같아요?"
"..."
"표현이 조금 불편한데...아무튼 이 돈은 받더라도 그냥 당신이 알아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난 불편하네."
"나 그냥 부모님한테라도 말씀을 드릴까? 나 로또로...나도 어제 엄마가 이 통장 주실 때 속으로 불편해 죽는 줄 알았어."
"지금 말하기엔 이미 타이밍을 놓쳤지. 그리고 어머님 스타일상 당신이 말씀을 드려도 그게 왜? 이렇게 나오실 거 같아요. 그냥 내 생각인데, 지금 상황에선 말씀을 안 드리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 그래도 당신이 불편할 거 같으면 말씀을 드리고."
"하긴 지금에 와서 말씀을 드린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겠어? 누나랑 매형을 도와줄 수 있겠냔 말씀이 고작일텐데, 매형 때문에 그건 내가 싫고."
짧게 생각을 끝내고 난 그 통장을 강혜선에게 다시 건네줬다.
"요고 당신이 잘 가지고 있다가 매달 부모님 통장으로 용돈 붙여주는 거 액수만 좀 키워줘. 그렇게 해줄 수 있나?"
"사실 지금 상황에선 나도 그게 최선인 거 같긴해요."
"그리고 당신 그때 마포에 분양받는다는 아파트. 그거 떨어졌잖아."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그거 피 좀 주더라도 조합원들한테 사."
"진짜 그렇게 해도 돼?"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봐도 그건 여유만 되면 하나 사놓는 게 좋은 물건이더라고."
"괜찮겠어요? 분양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사면 대출 이자 상환 때문에 스트레스 받기 시작할 거 같은데..."
그리고 강혜선에게 조심히 물어본다.
"만약에...이건 진짜 만약에 하는 말이야."
"뭐가?"
"만약에 회사에서 나한테 1,2년 뒤 쯤에 중국 법인장 대행으로 주재원 근무를 한 2년 정도만 하고 돌아오라고 하면 그 2년 동안 당신 휴직을 좀 할 수 있나? 그리고 나랑 같이 넘어가줄 수 있나?"
"왜요? 누가 또 당신한테 중국 주재원으로 가라고 해요?"
"그냥 내 생각이 그래. 조만간 기회가 한 번 올 거 같아."
"흐음..."
"휴직하고 복귀해도 당신한테 별 불이익 같은 건 없는 건가?"
"꼭 가야하는 거라면 그런 거 신경 쓸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내가 이리저리 계산을 좀 해봤는데, 아파트 세 채 정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잠시 중국 주재원으로 가있는 동안 세 개 다 월세를 돌릴 수가 있잖아. 당신이 휴직을 하는 동안 포기해야 할 월급에는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월세가 어느정도는 커버를 해줄 수 있을 거고, 또 내 월급은 한국 통장에 계속 꽂힐 거 아냐. 어차피 주재원 근무기간 동안 살게 될 아파트나 어지간한 경비는 주재원 가있는 동안 다 현지 생활비 명목으로 제공을 받을 거고."
"누가 당신한테 그런 제안을 한 거예요, 아님 당신이 그걸 한 번 해보고 싶은 거예요?"
"음...혹시라도 나중에 그런 기회가 온다면 그땐 망설이지 않고 바로 한 번 잡아볼까해서."
"그게 당신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그런 거 같아. 회사가 계속 중국 관련쪽 사업에 파이를 키우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