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첫사랑과도 같다.
“응? 그 친구가 왜 그랬지?”
중국으로 넘길 만토바 브랜드를 최종 정리해서 장 부장의 사인을 받았고, 장 부장과 함께 박 이사를 찾아갔을 때였다.
박 이사는 왜 만토바 브랜드 최종 목록에 나크리스가 빠졌냐고 물었다.
마치 네가 그렇게 한 번 해보겠다고 해서 내가 컨펌을 해준 사안 아니냐, 그런데 왜 나크리스를 뺀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결국 장 부장에게 했던 설명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설명을 들은 박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투로 혼잣말을 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분명 난 홍성의 사람이지만 장 부장, 박 이사를 상대로 김형찬의 신뢰만큼은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CGM 지부장과 스카우트 건으로 만나고 돌아온 뒤 장 부장에게 그녀와의 만남에 김형찬이 끼어있었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보고를 했던 거고.
사실 그 부분은 나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그만큼 난 미련하게도 김형찬에 대한 의리와 매너를 지켜주고 싶었던 거 같다.
하지만 상대의 생각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기준에선 그 도가 지나치고 있었고, 이대로 뒤에서 쉬쉬하며 끌려가다간 자칫 내가 회사 몰래 뒤에서 뭔가 작당을 꾸미는 사람이 되는 거 같아, 그 모든 불편한 입장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 털어놓았다.
애초에 CGM 지부장의 러브콜은 김형찬의 추천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번에 그가 한국에 왔을 때 날 상대로, 좀 더 크게는 홍성을 상대로 어떤 불쾌한 장면을 만들어냈는지.
“음...이상한 친구네...혹시 뭐 그 두 사람 그렇고 그런 관계 아냐?”
박 이사는 재미삼아 김형찬과 CGM 지부장의 관계를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건 아닌 거 같았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 개인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사이 같았습니다. 김형찬 담당자 가족들과도 가끔씩 서로 왕래를 할 정도로.”
“그럴 수록 더 조심을 했어야지. 그동안 한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장 부장이 추측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난 그 추측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갈아타기 준비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요?”
“어디로?”
“어디로든지요. 사실 그 친구 스펙에 나크리스는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않아 있죠.”
“그 나이 먹고 한 곳에 쭉 있지 못하고 계속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쌓은 스펙이 스펙 축에나 끼나? 옮겨다니는 것도 습관이야, 습관. 사람만 놓고 보면 참 괜찮은데...”
“그래서 잡은 게 CGM 라인이었던 거겠죠. 공 차장이 하는 말 들어보니까, 자식 교육 때문에 당분간 한국에 들어올 형편은 못되어서 CGM쪽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그렇게 CGM 라인을 잡고 뭔가 한 건을 도와주면 CGM 쪽이나 하다못해 CGM의 추천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테니까요.”
“그냥 우리랑 같이 가면되지, 참...에이 괜히 생각거리 하나 더 늘었네.”
“...?”
“멜라딘 말이야. 지분 매입 들어가기로 최종 결정 났어.”
“벌써요?”
“벌써는 무슨. 장고 잴 이유가 어딨어? 아무튼 그렇게 되면 거기에 심어놓을 우리쪽 사람 몇 명 정도는 필요하잖아. 한 일이 년 정도 돌아가는 거 지켜보다가 거기에 그 친구를 좀 박아놓을까 했는데...나크리스 보다야 멜라딘이 훨씬 더 낫잖아.”
그걸 말로 해서 뭐할까.
“나름 열심히 사는 거 같더라고. 내가 처음 그 친구 만났을 때 같이 술을 자주 마셨거든. 그래서 언제 기회만 되면 꼭 좀 도와주고 싶었는데, 이게 또 이렇게 삑사리를 내네...”
박 이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만토바 브랜드 최종 리스트에 자신의 사인을 넣었다.
“공 차장, 너 괜찮겠어? 괜히 중간에서 입장 난처해지는 거 아냐?”
“어쩔 수 없죠. 제가...경솔했던 탓인데요. 전 오히려 이번 일로 이사님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서고 있습니다. 나크리스도 따지고 보면...”
“으으음...그건 신경 쓰지마. 어차피 나도 일적으로 만난 사이야. 도와줄 만큼 도와줬고.”
나크리스는 만토바에 들어가 있는 브랜드가 아니다.
만토바가 아무리 많은 브랜드를 취급해도 모든 브랜드를 취급하는 건 아니니까.
물론 CGM이 컨트롤하는 브랜드도 아니고.
만토바의 주력 브랜드는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브랜드들, 그리고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대형 브랜드들이다.
만토바 자체가 이탈리아다 보니 이탈리아 브랜드들은 듣보잡이라도 어느정도 다 확보를 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말 그대로 대형 브랜드들만 취급을 한다.
그런데 나크리스는 프랑스 파리의 브띠끄 전용 브랜드다.
말 그대로 이미테이션으로도 만들어지지 않는 언노운(잘 알려지지 않은, 아는 사람들만 아는)브랜드인 것이고.
여기서 내가 중간에 끼어 아무런 실속도 없는 오지랖을 부렸었다.
홍성이 앞으로 중국으로 넘어가게 될 만토바 브랜드들을 한국에서 일차 컨트롤을 하게 될 것인데, 중국 시장에 관심이 있느냐, 더 정확하게는 만토바 쪽으로 물건을 주는 것에 관심이 있느냐고 김형찬에게 제안을 했던 거지.
내게 그정도 파워는 있었으니까.
어차피 애초에 나크리스가 홍성에 접근을 했을 때에도 한국이란 시장이 아닌 중국 시장이 목표였다는 걸 알고 있었고.
당연히 김형찬은 만토바 측과 연결만 해주면 자기야 좋다는 식으로 반응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 생각을 해보면 김형찬은 그냥 좋다는 식의 반응이 아닌 내게 절을 해도 몇 번은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단이 벌어지고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김형찬에게 이상한 생각을 가지게 만들도록 부추긴 게 아니었나 하는 후회도 든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을 거다.
장 부장의 추측대로 김형찬은 한국과 중국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나크리스의 실적을 스펙으로 더 큰 브랜드로 옮길 준비를 하기 시작했던 거 같다.
이미 한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이뤄냈고, 거기다 중국 진출까지 시켜버리면 브랜드 업체들 입장에선 부르는대로 몸값을 쳐주며 모셔갈 수 밖에 없는 에이스가 되는 거니까.
그러다보니 아직은 잡고 있어야 하는 나란 사람과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해줄 CGM을 모두 잡고 있을 수 밖에.
그리고 모르긴해도 아마 CGM 지부장으로부터 부탁을 받았겠지.
나와 자연스러운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달라고.
CGM 지부장 입장에서도 먹고는 살아야 했을테니.
“공 차장 지금 상당히 찜찜하겠네.”
박 이사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놀리듯 말했다.
“개운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다 그런 거야, 첫 단독 브랜드는.”
그리고 그 옆에서 장 부장도 함께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박 이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영업맨들에게 있어 첫 단독 브랜드는 첫 사랑과도 같다.”
“...?”
“언젠가는 헤어질 수 밖에 없어.”
“그럼요.”
장 부장이 박 이사의 경험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헤어진 뒤에도 미련이 많이 남지. 난 아직도 한 번씩 백화점에서 내가 처음 맡았던 단독 브랜드가 보이면 나도 모르게 손님인 척 들어가서 요즘엔 어떤 컨셉으로 바뀌었나...하고 보게 된단 말이야.”
“저는 아직 제 단독이었던 브랜드 제품들의 시리얼 넘버까지 다 외우고 있습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
난 그저 두 사람의 위로에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의미없다. 공 차장 너한테나 첫 단독 브랜드지, 그들의 입장에서 공 차장 넌 그냥 그동안 숱하게 스쳐지나갔던 하나의 컨트롤 기업 담당자에 불과하니까. 마음 쓰지마라. 김형찬 그 친구의 진짜 의도가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친구가 우리 홍성 입장에선 절대 해선 안될 짓을 한 게 사실이고, 공 차장 넌 컨트롤 담당자 입장에서 네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니까.”
“...네.”
“그리고 아직 계약기간 많이 남았잖아. 이제 막 시작한 브랜드 아냐. 개인적인 감정 싹 다 지우고 앞으로는 사업성만 놓고 봐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만토바 브랜드에 나크리스를 끼우겠다고 할 때부터 하지 말라고 말릴까...하다가 그냥 한 번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내버려뒀던 거야. 그거 우리가 할 일은 아니잖아.”
“...네.”
“알았어. 그럼 이대로 진행해.”
“네.”
“어려서 그래.”
“네?”
“영업하는 사람. 우리같은 사람들은 사실 타이틀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나이도 중요하다. 영업하는 사람들끼리 붙으면 타이틀이 뭔 소용이야? 김형찬 그 친구가 착각을 단단히 했네. 공 차장 네가 요리하기 쉬운 상대라 오해를 했던 거 같다.”
“...!”
“외국물 좀 먹었다고 한국인 기질이 사라질 거 같아? 아냐. 오히려 더 심해져.”
첫 단독 브랜드는 첫 사랑과도 같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너무 예뻐만 보이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고...
그래서 상대의 생각과는 달리 내가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서 받게 되는 배신감도 크게 느껴지는 거 같았다.
며칠 뒤에 김형찬으로부터 장문의 메일 한 통이 도착한다.
나 때문에 자신의 입장이 회사에서 상당히 곤란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답장으로 물었다.
나로 인해, 홍성으로 인해 그동안 나크리스 내에서 상당히 행복하지 않았냐고.
여기에 뻔한 거짓말도 살짝 섞는다.
난 만토바 측에 제안을 해보겠다고 했지, 책임지고 연결을 시켜주겠단 약속은 하지 않았다고.
만약 내가 김형찬의 입장이었다면 피가 거꾸로 솟았을 것이다.
그리고 물었다.
내게 유럽 감수성이 부족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날 나와 CGM 지부장을 만나게 만든 게 유럽에선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냐고.
하지만 최소한 한국은 아니라고.
지금 이 부분에 대해서 홍성은 김형찬 당신이 아닌, 나크리스 CEO에게 다이렉트로 해명을 요구할 준비중인데, 그렇게 해도 되겠냐고.
사실 이건 정말 마지막으로 확인차 물어봤던 거다.
그가 아무런 사심도 없이 그냥 나와 CGM 지부장을 만나게 만들었던 건지 마지막으로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내 상식에선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또 김형찬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김형찬으로부터 체념의 사과 메일이 도착한다.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의 인연이었을 뿐이다 생각하고, 난 거기서 최후의 수단까지는 쓰지 않고 이번 일을 조용히 묻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시작된 만토바 브랜드 중국 수출.
거기에 끼어 안 팀장의 Kidshub 프로젝트가 론칭과 동시에 대박 행진을 이어가준다.
“살살하세요, 안 팀장님.”
“차장님도 참...저 안낙현입니다.”
“푸훕...그나저나 중국으로 보낼 국내 아동 브랜드 섭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당분간 차장님은 만토바 수출에만 집중을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몰랐는데...아니 살짝 알고는 있었지만, 안낙현은 정말 천재과였다.
“이미 섭외는 다 끝났고 조율 중에 있습니다.”
“...벌써요?”
“밥상 차리기도 전에 밥 먹자고 사람들 부르는 거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다 차려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차장님은 당분간 저희 2팀 프로젝트는 안심하시고 만토바 쪽 프로젝트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