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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90화 (90/325)

# 90

그렇게만 전달해주세요

만약 양 팀장이 이 자리에 함께 나왔다면,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을 함께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지금 불편하고 또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게 비정상인 거냐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로 내게 악수를 청하는 CGM쪽 한국 지부장.

순간 난 그녀가 사이코패스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전 가서 체크인만 빨리 하고 올게요. 짐만 맡기면 돼요.” 하며 자리를 떠나는 김형찬의 모습에 내가 지금 유럽 감수성이 떨어지는 사람인가? 하는 걱정도 들었던 거 같다.

왜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난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불편한데, 유럽적인 사고에선 전혀 불편할 이유가 없는...

불편하다고 말하면 괜히 보수적인 사람이 될 거 같고, 꽉 막힌 사람이 될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좀처럼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는 또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당혹스런 속내와는 반대로 미소를 짓고 있다.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잘 지내셨어요?”

“...네, 뭐...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손을 외면할 용기? 혹은 불쾌한 감정을 그 상황에서 곧바로 표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순간만 오면 순발력이 떨어진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상황이니까.

그리고 상대가 웃고 있고, 이 장면을 만든 장본인은 체크인을 하겠답시고 자리를 피해버렸으니까.

악수를 끝내고 김형찬이 돌아올 때까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그 침묵 속에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던 거 같다.

한 10분 정도 흘렀나?

직접 객실까지 짐을 올리지 않고, 프론트 데스크에서 체크인만 한 뒤, 짐은 호텔 직원에게 맡겨놓고 다시 나와 CGM쪽 지부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김형찬.

난 그가 체크인을 끝내고 우리 쪽으로 오는 모습을 보며, 본격적으로 그에 대해, 그리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내 시간을 써가며 그를 만나겠다고 이곳까지 온 나 자신에게 속으로 실망을 하고 또 화를 내기 시작했던 거 같다.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다 알면서도 이곳에 CGM 지부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김형찬의 행동은 나에 대한 무시같았고, 또 홍성에 대한 모욕 같았다.

지금 이 장면이 펼쳐지기 전의 대략적인 상황은 이렇다.

일주일 전에 김형찬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한국 출장이 잡혔다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홍성이 나크리스를 초대박으로 띄워주지 않았나.

연말이다.

크리스마스 시즌도 다가오고 있고.

브랜드 본사 입장에서는 컨트롤 기업 직원들, 그리고 컨트롤 기업 본사가 관리하는 매장 직원들을 상대로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줘야 하는 시즌이 다가오고 있는 거다.

유럽은 한국처럼 설날, 추석이 없으니까.

거의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전후로 직원들 파티를 열어주거나 소정의 선물을 전달하며 다음 시즌에도 우리 브랜드를 조금 더 집중해서 팔아주십시오...하고 인사를 온다.

그런 걸 하겠다고 온다고 하니까 내가 사람을 보내서 공항에 픽업을 나가겠다고 했던 거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내가 안해도 되는 걸 해주겠다고 한 거다.

다른 브랜드들은 안한다.

초대형 브랜드가 아니라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는 브랜드 본사 사람들도 직접 공항까지 가서 픽업을 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디 호텔 직원들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신경써줄 수는 없는 거니까.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가 어디 한두 갠가?

어떻게 크리스마스 시즌에 집중적으로 찾아오는 모든 브랜드들을 일일이 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겠나.

하지만 나크리스는 내게 조금 다른 의미의 브랜드였다.

팀장을 달고 처음 맡은 단독 브랜드였으니까.

그리고 홍성과 한국 패션 업계 전반에 공은태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던 계기를 제공해준 브랜드였으니까.

거기에 담당자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도 한몫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내가 다른 브랜드에 비해 좀 더 많이 애정을 가지고 애를 써주고 있었던 거다.

여기선 내가 애를 써주고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게 정확하다.

항상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입장이다 보니 갑을 관계를 따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엄밀히 따지면 나와 김형찬, 그리고 홍성과 나크리스는 우리가 갑이고 그쪽이 을인 입장이다.

내가 사람을 공항으로 보내겠다고 하자 김형찬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기를 마중 나올 사람이 있다는 거다.

난 그 사람이 CGM 한국 지부장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그냥 친구? 혹은 한국에 있는 가족 정도일 거라 생각을 했던 거지.

그래서 내가 “한국 일정동안 따로 소주 한 잔 할 시간이 없겠네요...” 하며 예의상 아쉬움을 표현했고, 그에 김형찬은 “그럼 제가 아무리 늦어도 9시 정도에는 호텔에 도착할 거 같은데, 그때도 괜찮겠습니까?”하며 자기 역시 나만 괜찮다면 함께 소주 한 잔 하고싶다는 뜻을 내비췄었다.

여기서 난 진짜 단순하게 공항까지 픽업을 나와줄 사람은 있지만, 그 사람과 계속 시간을 함께 보낼 필요는 없는가보다...하고 생각하며 “그럼 그때처럼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거다.

“저번에 저 한국 왔을 때 데리고 가주셨던 그 참치집 어떻습니까?”

“네, 그렇게 하시죠.”

김형찬이 제안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동을 하는 동안 난 속으로 계속 생각을 한다.

과연 내가 지금 여기서 이 사람들이랑 뭘 하고 있는 거지?

김형찬이라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로 인해 나크리스라는 내 첫 단독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급속도로 식어가는 순간이다.

모든 게 객관적으로 봐지기 시작한다.

그동안 난 김형찬과 나크리스에게 이유없는 콩깍지가 씌여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좋았다.

딱히 내가 좋아하는 컨셉의 브랜드도 아니었고, 띄우기도 어려운 브랜드였지만, 내겐 띄워야하는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만 따라가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크리스라는 브랜드에 이유없는 애정을 가지게 됐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크리스의 담당자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상 없는 응원만 계속 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내가 좋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강혜선을 상대로 과한 섹드립을 날렸을 때, 그때 그녀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김형찬이 지금 날 상대로 하고 있는 선을 넘는 행동을 직접 감내하며, 난 그동안 내가 강혜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넘었던 행동들을 한 건 뭐가 있을까...찬찬히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공은태 차장님은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 거 같으세요?”

“아뇨, 아닙니다.”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신 건가요?”

안다는 말이잖아?

내가 자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걸 안다는 말 아닌가?

“그럴리가요. 그냥 좀...실은 최근에 갑자기 떠안게 된 프로젝트가 많아져서 조금 피곤한 거 같습니다.”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이제 막 한국에 도착한 김형찬을 앞에 두고 피곤하다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난 그냥 그 실례를 해도 되겠단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왜 난 상대가 하는 실례엔 항상 관대한 척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서, 내가 하게 될 실례에만 엄격했던 것일까.

이젠 좀 내게 관대하고 상대에게 엄격해도 되지 않을까?

상대의 기분과 입장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 게 유럽의 감수성이라면, 그 감수성...앞으로는 나도 한 번 흉내라도 내봐야겠다.

비록 웃는 얼굴로 함께 술잔을 비우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속으로는 다음에 김형찬이 한국에 올 때엔 내 시간 버려가며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한다.

한 번 애정이 식어버리니까 오히려 마음은 편해지는 거 같다.

어떻게 보면 이건 내가 가진 성격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하다.

난 장 부장과는 달리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걸 잘 못한다.

아니, 별로 안 좋아한다.

장 부장이 불같은 성격이라면 난 반대로 얼음처럼 차가운 스타일이다.

뭔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상대가 행동을 하면 장 부장은 귀 주변이 뻘겋게 달아오르면서 언성을 높히지만, 난 반대로 그냥 그 상대를 포기해버린다.

뭐랄까...상대에게 화를 내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게 살짝 두렵기도 하지만, 거기에 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가 않다.

내게 상대를 내 스타일에 맞게 바꿀 자격이 있을까 싶기도 하면서, 또 그와 동시에 바꿀 수 있다는 기대 자체를 안하는 거 같다.

그냥 그렇게 넌 네 생긴대로 살아라...하며 포기를 해버리는 거 같다.

“실은...”

그리고 그 자리에서 CGM의 한국 지부장이 함께 자리한 이유가 흘러나온다.

앞으로 홍성이 진행하게 될 만토바 브랜드에 대한 정보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제대로 패배를 당한 CGM입장에선 홍성의 브랜드들을 피해서 브랜드 포지셔닝을 시켜야 하는 건 당연하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홍성의 행보에 따라 자신들의 작전을 달리해야 할 것이기에.

그런데 난 이상하게 그런 이유 때문에 CGM 지부장이 이 자리에 함께 나온 건 더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김형찬의 행동 자체에 상처를 받았고, 모욕을 받은 게 너무 화가 나서 다른 부수적인 부분은 그냥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거 같았다.

“솔직히 한 번 말씀해주세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때 저 만나러 오셨을 때 이미...”

“불쾌합니다.”

“...”

난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로 반듯하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싸해지는 분위기.

평소였다면 이런 분위기를 스스로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 최대한 피했겠지만, 가만히 보자보자 하니까 날 자기들 친구처럼 자리에 앉혀놓고 장난을 치려고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왜 그러십니까, 공 차장님.”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형찬.

이미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정색을 할 때부터 분위기는 깨질대로 깨어졌다.

CGM 지부장의 표정 역시 “얘 뭐야? 왜 이래?” 하는 표정이었고.

정말 순간 난 내가 좀 이상한가?

별 것도 아닌 일로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을 스스로 해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의심을 해야하는지도 의문이었고.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습니다.”

앉은 상태에서 김형찬과 CGM 지부장에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니 공 차장님...”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적당히 했어야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난 자켓을 챙겨 룸을 빠져나왔고, 김형찬은 서둘러 날 뒤따랐다.

그리고 난 계산대 앞으로 서서 법인 카드가 아닌 내 개인 카드로 그 술자리를 계산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네, 그러니까요.”

“...”

“진짜 해선 안될 실수를 하셨습니다.”

“제 의도는...”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제가 지금 상당히 기분이 나쁘고 또 홍성의 입장에선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크리스로부터 모욕감을 받게 된 거 같습니다.”

“공 차장님, 제 말을...”

“저는 담당자님이 나크리스의 한국 영업차 한국에 오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홍성의 파트너 브랜드 관리차 제 시간을 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닌 거 같아 그만 가보려고 하는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업무 시간에 나크리스 담당자를 통해 전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김형찬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화가 살짝 가라앉으면서 어느정도 진정이 된 상태였고, 나 역시 후회를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간신히 가라앉힌 화가 김형찬의 전화를 받는 순간 다시 불꽃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상대는 자신이 한 생각없는 행동에 사과를 해왔다.

그런데 난 이미 그에 대한 믿음이 다 사라진 후였다.

생각없이 한 행동이 아니라, 그냥 날 그렇게 대해도 되는 상대로 오해하고 했던 행동이 확실하니까.

처음 CGM 지부장의 러브콜로 그녀와 단 둘이 자리를 가졌을 때, 김형찬의 추천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리고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었다.

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하지만 그 통화에서 난 홍성에 대한 나의 감정을 확실하게 전했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벌여졌다는 건 생각없는 행동이 아니라 무조건 의도라고 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상대의 의도를 내가 오해를 한 것이라도, 내가 오해를 하게 만든 건 상대니까.

다음날 김형찬과의 미팅 자리엔 나가지 않았다.

그냥 양 팀장만 보냈다.

따지고 보면 현재 나크리스를 직접 컨트롤하고 있는 건 양 팀장의 기획 1팀이다.

나크리스 정도 되는 브랜드에 차장인 내가 직접 나갈 이유는 없다.

김형찬과 만나고 돌아온 양 팀장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말했다.

현재 김형찬이 상당히 걱정을 하고 있다고.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래서 그런 양 팀장에게 해외 영업부 문 팀장을 좀 불러달라고 부탁해놓고 회의실을 잡았다.

양 팀장과 문 팀장을 회의실 자리에 앉혀놓고 중국으로 샌딩하게 될 만토바 브랜드 리스트를 전달했다.

그리고 양 팀장이 정확하게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 알겠다는 표정으로 조심히 물었다.

“나크리스는요?”

“뺍니다.”

“...!”

“그냥 그렇게만 전달해주세요. 지금은 좀 힘들 거 같고, 같이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고...그렇게만 전달하면 무슨 뜻인지 알겁니다.”

“...네.”

“자, 그럼 나크리스 빼고 문 팀장은 중국 법인으로 쏘을 브랜드를 정리 다시 해서 저한테 가져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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