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회의를 위한 회의
회사는 정글이다.
특히나 타이틀의 무게가 무거워지면 무거워질 수록 내가 지금 정글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게 피부로 확 와닿게 되는 거 같다.
이 회사라는 정글은 어떨 땐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더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그 내부의 적이 가진 이빨에 숨통이 끊어지니까.
외부의 적은 그 상대가 너무 강하면 피하면 된다.
하지만 내부의 적은 그게 힘들다.
피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마주쳐야 하니까.
“그냥 한 번 이야기나 나눠보자는 거죠. 사실 브랜드 매입이라는 게 그냥 백화점에 가서 아, 저거 마음에 드네...하고 가격 한 번 확인해본 뒤에 바로 결정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요.”
청산유수.
상대는 알맹이 없는 청산유수라는 카드만 들고 우리 영업부의 간을 보기 시작한다.
“...”
하지만 우린 흔들리지 않았다.
나와 장 부장, 그리고 김 차장은 입을 꼬옥 다물고 상대가 이 미팅의 핵심을 먼저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분명 미팅의 성격, 취지만 놓고 보면 의미가 없는 미팅은 아니다.
얻을 게 없는 미팅은 더더욱 아니고.
상대의 업무 협조 요구는 회사 차원에선 너무나 합리적인 것이고, 또 우리 영업부 입장에서만 따져봐도 브랜드 초이스에 따라 올릴 수 있는 실적의 어마운트가 달라지는 것이기에 집중을 해야한다.
하지만 미팅에 임하는 상대의 자세는 정확하게 파악을 해야지.
상석에 앉은 상무보를 사이에 두고 장 부장과 나, 그리고 김 차장이 차례대로 자리에 앉았고, 맞은 편으로 전사 운영본부장과 운영차장이 나란히 앉았다.
부서의 사이즈를 떠나 타이틀만 놓고 보면 박 이사가 빠진 지금은 누가 봐도 우리쪽이 살짝 기우는 형태.
하지만 우리에겐 그 기우는 부분에 균형을 맞춰줄 명분이라는 게 충분했다.
“예전에 전무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 자리에 본부장님도 함께 있으셨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장 부장의 공격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홍성에 참 많은 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홍성은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데 익숙해진 회사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
“그러시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죠. 회사가 위기라는 걸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
업계의 모든 승기를 다 잡고 있는 지금의 홍성.
그리고 그 승기를 홍성 쪽으로 가지고 온 일등 공신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위기라는 단어가 나오자 본부장의 눈썹 끝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무보 역시 장 부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화장실과 탕비실을 보면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
“회사가 어수선해지면 가장 먼저 티가 나는 곳이 바로 화장실과 탕비실의 청결상태라고 하셨지요.”
“그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리고 그 전에...”
전사 운영 본부장의 말을 가로막으며 장 부장이 말을 이었다.
“의미없는, 목적없는 회의가 잦아지고, 회의를 위한 회의가 늘어난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이 미팅이 의미없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그냥 말 그대로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장 부장의 노선은 확고했다.
직진.
시작부터 몰아치는 장 부장의 공격에 상대는 당황을 했고, 그런 상대를 향해, 그리고 상무보를 향해 장 부장은 정확하게 영업부의 입장을 전달한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부서의 파워가 부족하면 만들어내기 힘든 용기다.
다행히 현재 영업부에겐 그만한 파워가 있었고, 또 장 부장은 그런 파워를 숨길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왜 그렇게 공격적이에요, 장 부장.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는 상무보를 한 번 눈짓한 후 장 부장의 태도를 지적하며 능글맞게 분위기를 자기들 쪽으로 가져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이라는 게 순서가 있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다가 뭔가 그림을 그려야 하는 상황인데, 뭘 그릴지 함께 의논해보자고 하는 걸 어떻게 의미가 없는 회의라고 표현할 수가 있어요?”
“혼자 그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라면 최소한 어떤 종이가 있고, 또 어떤 크레파스, 물감이 준비되어 있으니 넌 이런이런 준비물만 챙겨와라...하는 말이라도 있었어야죠. 그냥 다짜고짜 상무보님도 참석을 하시는 자리라며 미팅을 하자고 하면 저희가 이 미팅에 뭘 준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상무보는 침묵했다.
“차라리 그럴 거면 그냥 상무보님을 모시고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서 식사도 할 겸 그 자리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쪽이 더 경제적이지 않았을까요? 현재 저희 영업부 정신 없습니다.”
“...”
“특히 여기 공 차장, 김 차장 두 사람 다 쌓여있는 프로젝트들 때문에 거의 매주 주말까지 반납을 하고 있는 상황이죠. 이럴 때일 수록 저희 영업부가 가진 레퍼런스가 필요한 미팅을 제안하실 땐 뭔가 준비가 된 미팅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 부장의 대응이 다소 공격적인 게 맞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공격이다.
박 이사가 빠진 자리 아닌가.
박 이사를 젠틀맨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선 밑에 사람들이 억척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깐깐하게 나가야 나중에 박 이사가 사람좋은 연기를 하며 관대하게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액션을 취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다 모인 다음에야 뭘 의논할지 정할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은 이미 다 준비해왔죠.”
말로 흥한자, 말로 망한다고 했던가.
말로만 일을 하는 상대.
하지만 우리 영업부 역시 말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게 있다면 우리에겐 실행력이라는 무기도 함께 장착이 되어있다는 것이고.
“몇 가지 확인할 부분이 있어서요. 어떤 브랜드를 저희가 물어다드리면 회사 전체 매출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밑천이 전혀 없는 상대였다.
말은 그럴싸하다.
자기들에게 그정도 능력이 있으니 일단 말을 한 번 해보라는 뉘앙스가 아닌가.
하지만 조금만 깊게 파면 저 말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냥 상무보 앞에서 자신들에게 그정도 대책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과연 저 질문의 퀄리티가 상무보까지 참석을 한 자리에서 내놓을 수준의 질문인 것일까?
저런 질문은 그냥 전화로 물어봐도 충분한 거 아닐까.
꼭 차장급이 아니라 일반 사원들에게 물어봐도 바로 답이 나오는 수준의 질문을 던져놓고, 상대는 마치 자신이 생각했던 회의 분위기는 이게 아닌데...하는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고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금껏 쭉 그래왔듯 이번 회의를 마련한 게 틀림없었다.
보통은 자기네 대장이 중간에 딱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면 상대들이 살짝 긴장한 마음에 무슨 아이디어라도 툭툭 내놓았을테니.
그리고 자기들은 상대가 내놓는 아이디어를 마치 판정단처럼 평가만 해주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저희가 필요하다고 하면 섭외가 되는 건가요?”
입을 꾹 다물고 있겠다고 말했던 김 차장.
하지만 도저히 복장이 터져서 안되겠던지 자신이 했던 약속을 스스로 깨뜨리며 장 부장을 도와 상대를 함께 압박하기 시작했다.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공부는 해볼 수 있겠죠.”
“하아...”
물론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대놓고 한 숨을 내쉰건 아니었다.
김 차장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과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왜 와있는 거냐는 듯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샤넬, 루이뷔똥, 구찌, 에르메스, 디올, 팬디...”
“...?”
“너무나 당연한 대답 아닙니까? 그 브랜드들만 있으면 당연히 매출에 도움이 되죠.”
“김 차장, 지금 뭐 우리랑 싸우자는 거야 뭐야?”
적반하장이 시작된다.
자신이 가진 회사 내 타이틀로 김 차장을 압박하기 시작하는 운영본부장.
하지만 김 차장의 짬밥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고.
“싸우자는 건 아니고요, 그냥 너무들 하신단 생각이 들어서요. 어떻게 저희 영업부를 이렇게 동네북처럼 대우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뭐가? 뭐가 너무한다는 거야? 그리고 무슨 동네북처럼 대했다고 그래요? 아까부터 왜 이렇게 날이 서있어요들?”
“브랜드 매입, 그거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
“그냥 괜찮은 물건 시장에 나오면 바로 통째 매입을 하시는 겁니까, 아님 지분 형식으로 매입을 하시는 겁니까?”
“...”
“혹시 그 부분도 저희랑 같이 의논을 해보자...그런 건 아니죠? 아니...음...보통은 이런 이런 브랜드가 시장에 나왔는데, 어떤 걸 초이스 하는 게 좋겠냐고 물어보시는 게 정상 아닌가요? 어떤 게 더 팔기 쉽겠냐, 아님 이게 좋은 조건으로 시장에 나왔는데, 띄울 수 있겠냐...하는 걸 물어보셔야지 이건 정말 밑도끝도 없이 처음부터 다 저희 영업부랑 같이 진행을 하자는 말씀이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공동 프로젝트라고 말씀을 하시던가요.”
“잠깐만요.”
그리고 결국 상무보가 상당히 굳어버린 얼굴로 손을 들어 회의를 끊었다.
“지금까지 항상 이런 식으로 일을 해오셨습니까?”
“...”
전사 운영본부를 향한 상무보의 질책이 시작된다.
“옆에서 지금까지 가만히 들어보니까 영업부의 컴플레인이 너무나 당연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설마 지금 저를 불러놓고 하겠다는 회의가 여기 장 부장님 말씀대로 회의를 위한 회의였던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부터 이제 저희가 준비해온...”
“해보세요.”
“...!”
“준비했다는 거 한 번 해보시라고요.”
소름돋는 침묵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무보의 한 마디는 더 소름이 끼쳤다.
“제가 쉬워보이십니까?”
“아, 아닙니다!”
“제가 한가해 보이세요?”
“...아닙니다.”
“이렇게 의미없는 내용들로 옥신각신 하는 모습 보여주겠다고 저 부르신 겁니까.”
“...”
“대답을 하세요!”
상무보가 저렇게까지 흥분을 하는 모습은 처음봤다.
상무보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자리에 모인 모두는 아무도 예상을 못했기에 다들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영업부.”
상무보는 본부장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
“죄송합니다. 그만 돌아가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상무보는 계속 본부장을 노려보고 있었고, 우리가 회의실을 빠져나갔을 땐, 닫힌 회의실 안에서 다시 한 번 상무보의 샤우팅이 흘러나왔다.
나와 김 차장은 장 부장이 뻗은 양쪽 손바닥에 동시에 하이파이브를 날렸다.
“나이스...”
그렇게 박 이사가 중국 출장을 다녀온 어느날이었다.
박 이사 사무실로 호출받은 나와 장 부장, 그리고 김 차장.
박 이사의 사무실 소파 상석엔 박 이사가 아닌 상무보가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로는 몇 개의 굵직한 해외 명품 브랜드 팜플렛이 올려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각 브랜드의 재무제표가 깔려있었다.
“내가 보는 거 보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의 감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해서...”
아마도 상무보가 브랜드 컨텍을 해와서 박 이사에게 의견을 물었고, 그걸 가지고 박 이사가 우리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마련된 자리 같았다.
“일단은 지분 매입 형식으로 진행될 브랜드들이에요. 바로 브랜드를 떠안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판단이 서더라고요. 하지만 홍성이 받을 수 있는 브랜드 마진 조율이나, 유통 채널 초이스 권한은 최대한 행사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겠다고 약속을 해준 브랜드들입니다.”
상무보의 말에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팜플렛 아래로 깔린 재무제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브랜드야 그냥 보는 순간 다 아는 것들이고, 시장에 깔 수 있는 마진 베이스 확인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음...”
거의 동시에 나와 장 부장, 그리고 김 차장은 멜라딘을 제외한 다른 브랜드 재무제표는 테이블 위로 뒤집어 놓았다.
멜라딘.
박 이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상무보 역시 우리들의 반응에 확신을 다시 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이거 하나면 되겠어요?”
“유일하게 그동안 홍성의 컨텍을 거절해왔던 브랜드니까요.”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신중하게 검토해보도록 하죠.”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나고 박 이사로부터 멜라딘의 지분 매입이 거의 확실시 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통째 매입을 하다보면 재고까지 다 떠안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런 리스크까지 홍성이 호구를 잡혀서 떠안을 이유는 없으니까.
자기들이 가진 자본금만 믿고 유럽 브랜드를 통째 떠안았다가 피를 본 중국 기업이 어디 한두갠가.
그런 전철을 밟을 이유는 없다고 판단을 내렸겠지.
다만 이렇게 조금씩 지분 확보를 해가다보면 해당 브랜드 본사의 핵심 포지션에 홍성 라인 인물을 하나 정도를 꽂아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회사의 기대라고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지금의 홍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나크리스의 김형찬.
그리고 난 너무나 당연하게 내 시간을 빼서 그를 맞이했다.
늦은 저녁이었고, 그가 예약한 호텔 로비에서 그를 기다렸다.
우리 홍성이 공항에 픽업을 나가겠다고 했는데, 마중을 나올 사람이 있다면서 한사코 거절을 했던 김형찬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공 차장님.”
그리고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
“오랜만이에요, 공은태 차장님.”
CGM의 한국 지부장이 김형찬의 옆으로 서면서 내 앞으로 악수를 하자고 손을 뻗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