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통장 하나 만들어주세요
이문 차장님이 장 부장을 따로 불렀다.
사장실엔 사장님과 전무님, 그리고 상무보와 박 이사가 여전히 남아 다른 안건의 회의를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중간에서 나만 붕 뜬 상태.
“차 구경 한 번 해봐야지요?”
앞으로 장 부장이 타게 될 차가 어디에 세워져있는지 직접 데리고 가서 보여주겠다고 하시길래, 그럼 나도 같이 가서 구경이나 좀 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이문 차장님은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당연한 거 아니냐고 대답했다.
“여기 이거 열면...”
운전석에 오르는 이문 차장님을 나와 장 부장은 가만히 지켜만 봤다.
뻔한 내용들을 나름 혼자 신이 나서 설명하고 있는 이문 차장님을 보고 있자니, 사람이 저렇게 해맑을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마치 자기가 선물받은 차인 것처럼 혼자 흥분해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셨다.
조수석 서랍을 열더니 그 안에 든 비닐 커버 봉투를 꺼내 이건 뭐고, 또 이건 뭐라며 다시 또 한참동안 설명을 하신다.
“기름 넣을 땐 이 카드 쓰고. 와이프 운전하죠?”
“네.”
“한 번씩 살짝살짝 이 카드로 몰래 기름도 넣어주고 해요. 표 안나게. 하하하...다들 그렇게 해. 그런 게 또 회사 다니는 재미 아니겠어요?”
참 좋은 거 가르친단 생각이 들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빡빡하게, 마치 결벽증 환자들처럼 직장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말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신 말씀인 줄은 알지만, 사장님을 바로 옆에서 모시면서 누구 보다 그런 부분에 엄격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이상하게 회사가 조금은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리고 또...내 본능을 들킨 것 같았다.
만약 내게 회사가 주는 차가 생기고, 또 그 차를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는 법인 카드가 주어진다면 난 어떻게 할까?
적당히 알뜰하게 회사차를 끌고 다니며 내 개인적인 차의 기름 정도는 도둑질하듯 채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땐, 임원을 달아도 다들 사는 건 비슷비슷하다는 확신을 얻은 것 같았고.
이문 차장님이 다시 한 번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돌아가신 후 나와 장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금일봉 봉투를 꺼냈다.
“우와...”
“헐...”
“얼마 들었냐?”
“부장님은요?”
“한 장.”
“천만 원?”
“응. 넌?”
“저도요.”
“크흐...”
천만 원...
금일봉으로 천만 원을, 그것도 세금 하나 떼지 않아도 되는 현금성 수표로 받았다.
성과급이야 내가 한 영업의 실적 개념, 인센티브 개념인 것이라 어느정도가 들어올지 예상이 가능하지만 이 금일봉은 그렇지가 않다.
그냥 하늘이 주시는 보너스의 개념인데, 이렇게 거액이 들어있을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부장님. 혹시 지금까지 금일봉으로 천만 원 받아보신 적 있으세요?”
“있었겠냐?”
“이거 설마 백만 원인데 실수로 잘못 넣으신 건 아니겠죠?”
“잘못 넣었다고 해도 사장님 성격에 그걸 다시 돌려달라고 하시겠냐?”
“미쳤네, 진짜...이거 진짜 역대급 금일봉 아닙니까?”
“임원진이 아닌 사원급에서 받을 수 있는 금일봉이 아닌 건 확실해.”
콩닥콩닥...
돈 천만 원에 심장이 이렇게까지 뛰어보긴 오랜만이네.
“타라.”
“왜요?”
“한 바퀴 돌자.”
“지금요? 사무실 안 올라가고요?”
“그냥 요 앞 한 바퀴만 돌고 올라가자. 하아...쩝, 모르겠다.”
“...?”
“널 가장 먼저 태워줘야 할 거 같다. 집 사람이랑 애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네가 제일 예뻐 보이네.”
“저 그런 취향 아닙니다.”
“까불지 말고 타. 나가서 요 앞 한 바퀴 돌면서 커피나 한 잔 하자.”
장 부장은 시동을 걸기 전에 한참동안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의자와 백미러 위치를 조절했고, 또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난 그런 장 부장을 쳐다보며, 현재 그가 느끼고 있을 설렘을 짐작해봤다.
아무리 회사 명의의 차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공짜로 타라고 받은 차다.
기분이 어떨까?
임원진들에게 제공되는 차를 부장 타이틀 잡자마자 제공받은 그 기분이 대충 짐작이 되면서도 무척 궁금했다.
그렇게 눈에 익은 회사 주변을 한바퀴 돌며 장 부장이 이런 말을 한다.
“지금까지 내가 홍성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은데...또 가장 떳떳하지 못한, 받으면서도 과연 내가 이걸 받아도 되나 싶은 민망한 선물이기도 하다.”
“왜요?”
“내가 한 게 아닌 거 같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또 그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옆에 있는 너한테 미안하네.”
“그때 그 자리에서 부장님과 이사님이 노! 라고 하셨음 오늘 제가 사장님께 직접 금일봉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거랑은 좀 별개로 살짝 민망해.”
“그렇게 따지면 나크리스는요?”
“...”
“사실 부장님이 저한테 떠밀듯 반 강제로 맡아보라고 하지 않으셨으면 제가 무슨 수로 나크리스를 띄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다른 이야기인 거고.”
“같은 맥락이죠. 위에서 억지로 찍어 내리는 거나, 밑에서 올리는 거나, 결정권자가 오케이 사인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전 나크리스에 관해선 누가 뭐래도 제 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장님도 그렇게 쉽게 생각하세요. 누가봐도 그 순간 최고 결정권자는 이사님이 아니라 부장님이셨습니다.”
장 부장이 스타벅스 앞에다가 차를 잠깐 세우길래 난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가 커피 두 잔을 사서 나왔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이사님이 부장이었을 시절 차장 딱지달고 옆에서 모시면서 이런 선물 한 번 해드리지 못했는데, 넌 차장 달자마자 나한테 이런 선물을 해주네.”
“그만 좀 띄우십시오. 그만하면 됐습니다.”
“너 그때 일 생각나냐?”
“뭐요?”
“던힐.”
“에이, 그게 언제쩍 일인데, 그 일을 이 기분 좋은 자리에서 꺼내십니까?”
다시 차에 시동을 걸며 장 부장이 말했다.
“네가 처음으로 나한테 눈에 칼을 달고 앵겼던 사건이었지. 네 프로젝트인데 거기에 왜 내 이름을 올리느냐고.”
“크크크...그만 좀 하십시오, 사람 쪽팔리게. 제가 뭘 몰랐던 거죠, 그땐.”
“근데 그거 아냐? 나 그때 속으로 아차싶었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까 네 말이 틀린 게 아니더라고. 나는 그냥 무심결에 우리 팀 프로젝트니까 팀장인 내 이름을 올렸던 건데, 네가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 앵기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나도 모르게 부하직원 실적 가로채기를 했더라고.”
“뭘 또 그렇게까지 비약을 하십니까?”
“그런데 그런 거 있잖아. 내가 실수를 했고, 또 네가 거는 컴플레인이 너무나 정당한 건데, 거기서 내가 실수를 인정해버리면 안될 거 같은...”
“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때 얼마나 냉랭했었지?”
“냉랭은요 무슨. 부장님이 일방적으로 절 냉대하셨고, 전 부장님 눈치만 살폈던 거죠.”
“한 달 정도 갔나?”
“그정도 갔던 거 같습니다.”
“참 그러고 보면 너랑 나, 진짜 서로 볼 꼴 못 볼 꼴 많이 봤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애증관계라고 하더라고요.”
“애증?”
“저도 뭐 퇴근하고 여자친구 만나서 저도 모르게 한 번씩 회사 이야기를 합니다. 하다보면 대부분이 회사에 대한 불만 투성이죠.”
“그렇지.”
“여자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저랑 부장님은 서로 애증관계인 거 같다고. 그런데 이젠 거기서 증을 거둬내고 애만 가지고 가야하는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 거 같다고.”
“말 된다. 그동안 나도 집 사람한테 네 욕을 얼마나 많이 했었게.”
“이번 건은 누가 뭐래도 부장님의 공이 80퍼센트 이상입니다. 거기에 제 밥 숟가락까지 하나 같이 챙겨주신 것만으로도 전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자리 한 번 마련하자.”
“무슨 자리요?”
“제수 씨 될 사람 얼굴 한 번 보자. 나도 집 사람 데리고 나올테니까.”
“저야 불러만 주시면 언제든 콜이죠.”
“근데 너 요즘에 무슨 일 있냐?”
“무슨 일이요?”
“사람이 달라졌어. 혹시 뭐 로또라도 됐냐?”
“...!”
“왜 이렇게 여유가 넘쳐? 응? 그 비결이 뭐냐?”
“로, 로또는요, 무슨...그게 됐음 제가 지금 회사 다니고 있겠습니까?”
“하긴...”
“변화를 하라면서요. 변질 되지말고 좋은 쪽으로 변화를 하라고 부장님이 그때 그러셨지 않습니까?”
“말 한 반 만큼만 살 수 있음 얼마나 좋겠어? 나도 못하고 있는 그걸 네가 지금 하고 있으니 기특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 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 아니냐고.”
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장 부장의 의미없는 질문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명 로또가 내게 새로운 출근길을 열어준 건 사실이다.
13억이란 돈이 생긴 이후로는 크게 아쉬울 게 없었고, 언제든 아니다 싶으면 사표를 집어던질 용기가 장착됐던 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 몇 달 기분 좋은, 든든한 상태로 내 일상을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유지하다보니, 어느덧 로또가 내 삶의 보험이 아닌 홍성이 내 삶의 보험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전까지 내겐 홍성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잡고 있어야 하는 유일한 동아줄이 홍성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절박했고, 그래서 더 애를 썼으며, 그래서 더 갈증이 나고 불안하고 불만이 가득했던 것 같다.
그런데 더이상 홍성이 아니어도 된다는 여유가 생긴 이후부터는 로또가 아니라 홍성 인터네셔널, 즉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로또로 만들어낸 지금의 컨디션과 강혜선과의 관계를 지금처럼 꾸준히 유지시켜 줄 보험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띵동.
다음날 점심 시간.
난 강혜선의 점심 교대 시간을 확인한 후 그녀가 일하는 은행을 찾았다.
직원들 몰래 대기표 몇 장을 미리 뽑아놓고, 강혜선의 창구가 빌 때까지 기다렸다.
“어서...!”
날 발견한 강혜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놀란 마음을 동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아주 낮은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뭐하는 거야?”
“뭐가요?”
그래서 난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높혀 장난을 쳤다.
“일반 예금 통장 하나 만들어주세요.”
난 자리에 앉으며 고객인 척 능청을 떨었다.
“뭐하는 거냐고요, 지금.”
“통장 만들어 왔다니까요?”
그리고 그녀 앞으로 신분증과 금일봉으로 받은 천만 원권 수표를 내밀었다.
“이 은행에 적금 통장 몇 개를 만들어놨는데, 현재 제 월급 통장에서 자동이체 시키고 있거든요. 이걸로 다른 통장 하나 만들어주시고, 거기로 적금에 빠져나가는 돈 자동이체 변경까지 같이 시켜주세요.”
“...이 돈은 또 어디서 난 거예요?”
“무슨 은행 직원이 통장 만들러 온 고객한테 그런 거 까지 꼬치꼬치 다 물어봐요?”
“장난하지 말고.”
“개인적인 관심인 거면...오늘 점심이나 같이 먹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