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컨트롤 기업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회사에 이문 차장님이라고 한 분 계신다.
사실 말이 회사 차장이지 회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존재다.
사장님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분이신데, 내가 신입이었을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차장 타이틀을 달고 계신다.
나이도 장 부장 보다 한참 많으신 분이다.
거의 박 이사와 비슷한 연배라고 보는 게 맞을 거 같다.
박 이사가 말을 편하게 하는 걸로 봐선 두세 살 정도 아래인 것 같긴 한데, 그의 정확한 나이는 나도 잘 모른다.
한 회사, 그것도 대기업 정도 사이즈가 나오는 회사에서 그 회사의 수장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사람이라고 하면 상당히 지적이고 또 날카로우며 철두철미할 것 같겠지만, 실제 이문 차장님은 어딘가 많이 비어 보이는 분이시다.
이상하게 홍성 인터네셔널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분 같은데, 또 아이러니하게 사장님과의 거리는 가장 가까운 분이 바로 이문 차장님이다.
아마도 인간적으로 사장님과 잘 통하는 분이실 거란 생각이 든다.
회사 업무적인 부분에선 전무님이 계시고, 그 외 다른 인간적인 부분에서 전무님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이문 차장님이 채워주는 걸로 알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 많은지 볼 때마다 싱글벙글 웃고 계시며, 또 워낙에 눈이 작아서 웃으실 때엔 그 작은 눈마저 아예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장님이 회사에 출근을 하셨다, 출근을 하지 않으셨다 하는 건 이문 차장님이 점심 시간에 사내 식당에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식사를 항상 혼자 하신다.
사장님과 함께 움직이시지 않고 점심 시간만 되면 사내 식당에 혼자 내려와 식사를 하신다.
하지만 그런 이문 차장님 주변으로는 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하고.
나도 몇 번 이문 차장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해본 경험이 있다.
아니 기회가 생길 때마다 최대한 그와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한 마디라도 섞어보려고 노력을 했었다.
상당히 순박하고 또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다.
이문 차장님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그 상대가 누구든 절대 하대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다른 사람들은 이문 차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참 성실하고 멋진 분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내가 현재 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입사 기수가 늦은, 혹은 직급상 내 부하직원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꾸준히 존대를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문 차장님 때문이다.
난 그게 이상하게 멋있어 보였다.
뭐랄까...조금 고급스러워 보였다고 해야 할까?
사람이 꼭 가진 게 많다고, 배운 게 많다고, 또 능력이 좋다고 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내가 봤을 때 뭔가 괜찮다 싶은 건 꼭 직접 해보는 버릇이 있다.
직접 해보고 나랑 별로 안 맞는 거 같은 건 안하면 되는 거고, 해봤는데 괜찮다 싶은 건 계속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 밑으로 처음 팀내 직속 후임이 들어왔을 때, 그리고 대리를 달고 영업부 전체에 많은 후배들이 들어왔을 때부터 그들을 상대로 존대하는 버릇을 들였는데, 나쁘지 않았다.
실수를 지적하고 혼을 내야 하는 상황에 가더라도 장 부장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바닥까지 다 보여줄 필요가 없었고, 또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해도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적당히라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계기였던 거 같다.
점심 시간.
이문 차장님이 아직은 한산한 사내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계셨다.
이미 난 이문 차장님이 사내 식당에 내려오실 걸 알고 있었다.
전날 장 부장을 통해 오늘 사장님이 회사에 오실 거란 걸 미리 전해들었으니까.
“차장님, 오랜만입니다.”
“오? 공 팀장! 이리와요, 이리와. 같이 먹자.”
난 이문 차장님 맞은 편으로 식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저도 이제 차장입니다.”
“엥?”
“흐흐흐...짜잔!”
난 장난스럽게 사원 카드를 그의 앞으로 자랑하듯 흔들어보였고, 그걸 유심히 쳐다보던 이문 차장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팀장 단지도 얼마 안되지 않았어요?”
진짜 회사 일에 관해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미스테리한 존재인 거지.
어떻게 사장님을 바로 옆에서 모시면서 회사 일에 대해선 영점 일도 모를 수가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런 이문 차장님이라는 존재를 대부분의 회사 직원들은 무척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진짜 대단하네, 공 팀장. 아니, 아니 공 차장. 팀장 단지 아직 일년도 안되지 않았나?”
“운이 좋았죠.”
“멋지네. 아무튼 축하해요. 밥 먹어, 밥 먹어. 오늘 국 죽인다.”
하지만 난 일반 사원급 중에서는 이문 차장의 내력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그걸 좀 더 알고 싶어하는 하는 본능 때문일 것이다.
운이 좋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문 차장님과 지금처럼 사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고, 또 박 이사나 장 부장에게 한 번씩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이문 차장의 내력을 물어봤으니까.
장 부장이 홍성 인터네셔널에 입사를 하기도 전에, 이미 회사는 중견 기업으로 한 단계 성장을 하기 위해 큰 성장통을 겪었다고 한다.
인재가 부족했고, 타 기업으로부터의 인재 수급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상황.
그럼에도 사장님과 전무님은 있는 직원들을 회사의 인재로 키우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고 한다.
월급과 동시에 직책을 올려주고, 또 그에 맞는 업무를 쳐낼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기다리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이문 차장님(당시 직급이 뭐였는지는 모르겠다)이 사장님을 직접 찾아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사의 규모가 작았으니 지금처럼 사장님의 얼굴을 보는 게 하늘의 별따기 까지는 아니었겠지.
그렇게 사장님을 찾아가서 이문 차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습니다.”
“...?”
“욕심을 강요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시 회사가 이문 차장님에게 줬던 직책의 무게, 업무 강도가 이문 차장님의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얼핏 당시 이문 차장님이 사장님을 상대로 했던 그 말을 듣기만 하면 회사 입장에선 상당히 실망스런 말일 수도 있다.
모두가 으샤으샤 힘을 내고 있는 가운데 찬 물을 끼얹은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을테니.
그런데 사장님은 그 말을 듣고 속도 조절을 하신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문 차장님을 항상 곁에 있게 하셨다고 한다.
당시 사장님은 마치 직진만 알고 있는 탱크처럼 앞만 보고 달리고 계셨는데, 그런 사장님을 상대로 템포 조절이 중요하다는 걸 주장했다고 하니 이미 그것만 놓고 봐도 대단하다고 봐야하는 거겠지.
그런 이문 차장님을 상대로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할 수 있는 거만 해도 되는 거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여기서 이문 차장님이 이런 대답을 하신다.
“전 직원이 다 회사의 사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과연 지금의 홍성 인터에서 이런 이야기를 사장님 면전에 대고 바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있기나 할까?
그때니까, 아직은 이제 막 구멍 가게 수준을 벗어났을 때니까 가능했던 장면이었겠지.
사장과 함께 뒹굴며 사장과 직원들 사이의 거리가 그리 크지 않았던 그 때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
사장님도 참 대단한 분이신 거 같다.
자칫 자존심 싸움, 혹은 감정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부분이었을텐데,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또 그 만큼의 대가를 받기를 원하는 이문 차장님을 아직까지 곁에 두고 계시는 걸 보면.
그리고 그동안 봐온 이문 차장님의 성향을 고려해보면 사장님께서 판단을 무척 잘 하신 것 같기도 하다.
이문 차장님은 결코 영업이라는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시다.
언젠가 조심히, 아주 조심히 이문 차장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다.
당시 함께 일을 시작했던 비슷한 입사 동기, 선후배들에 비해 승진이 늦으신데, 그 부분이 아쉽지는 않느냐고.
그랬더니 그냥 살며시 웃으시며, “난 지금이 너무 좋아요.”라는 우문현답을 하셨다.
처음 로또에 걸렸을 때 할 수만 있다면 이문 차장님처럼 직장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하지만 이내 내 속엔 그보다는 좀 더 큰 야망과 욕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하지만 정말 할 수만 있다면 그 처럼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정말 최고 아닌가.
물론 뭐 이문 차장님은 우리가 모르는 또 이문 차장님만의 고충이 있으시겠지만...
모르긴 해도 아마 오전 내내 사장님 참관 하에 임원 회의가 있었을 거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한참이 지나 그제야 장 부장으로부터 박 이사의 사무실로 같이 올라가자는 연락이 왔다.
아직 점심도 못 먹었다고 하는 박 이사.
진이 빠질대로 빠진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들어가자.”
그렇게 박 이사의 사무실에서 간단하게 사장님을 만날 준비를 끝내고 사장실로 향했다.
이미 전무님과 상무보가 사장님과 함께 소파에 자리해 있었고, 이문 차장님은 창가쪽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박 이사와 장 부장, 그리고 내가 차례대로 전무님, 상무보 맞은편 소파쪽으로 나란히 앉았다.
“이문아.”
“네, 사장님.”
“아까 조금 전에 그거...그거 가지고 온나.”
나는 사장님이 이문 차장님을 직함을 빼놓고 그냥 이름을 부르신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장 부장.”
“네, 사장님.”
“음...고맙다.”
“...”
“진짜 이번에 큰 일 해줬다.”
“아닙니다.”
“아니긴. 박 이사.”
“네, 사장님.”
“딱 지금처럼만 끌고가라.”
“명심하겠습니다.”
“공 차장이 낸 아이디어였다고?”
분명 사장님이 묻기는 박 이사에게 물었는데, 박 이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나만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장 부장 역시 고개를 반쯤 숙인채 날 쳐다보는 눈치였고.
“그게...소 뒷걸음 치다가...”
“쥐를 잡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럼 그 소는 진짜 대단한 소네. 뒷걸음질로 쥐를 잡았으니까 말이야.”
난 이게 농담인 줄 몰랐다.
전무님이 피식하고 먼저 웃음길을 터주지 않았다면 사장님이 하신 말씀을 놓고 꽤 오래 그 말뜻을 이해해보려고 애를 써야 했을 거다.
이문 차장님이 사장님 개인 비서를 통해 벨벳 소재 천이 깔린 쟁반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그 위엔 홍성 인터네셔널 로고가 들어간 금일봉 봉투 두 장과 차 키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뭘 해줘야 이번에 영업부가 낸 성과에 합당한 보상이 될런지 진짜 오랜만에 행복한 고민을 해봤다. 최근들어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진짜 예외인데...이거 임원들한테만 주는 차다.”
“...!”
장 부장이 부장 딱지를 달자마자 임원 전용 회사 차를 선물 받는다.
우와,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데 소름이 올라왔다.
정말 내가 받는 거 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나와 장 부장에게 각각 금일봉 봉투가 한 장씩 전달된다.
“공 차장 너는 나중에 인사부에서 따로 호출이 있을 거다.”
“...네.”
“아마 업계 최고 차장 대우를 해줄 거다. 연봉협상 말이다. CGM쪽에서 프로포즈 했던 것 보다는 높아야 하지 않겠어?”
다 알고 계시는 모양이다.
난 입술을 숨기며 가만히 고개만 숙였다.
“내가 아까 임원 회의 자리에서도 한 번 말했지만, 이번 CGM관련해서 우리 회사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발견했다. 비단 우리 회사 뿐 아니라 컨트롤 기업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겠지.”
모두가 입을 다문채 사장님의 입에서 흘러나올 다음 말만 기다렸다.
“결국 우리 브랜드가 없어서 그래. 맨날천날 남의 브랜드 떼다가 대신 팔아주는 일만 하다보니까 브랜드 쪽도 그렇고 유통판 쪽한테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거야. 브랜드 헌팅 들어가자. 시장에 나온 괜찮은 유럽 명품 브랜드 있으면 작업 들어가자.”
“...!”
“자네들같은 인재들을 딴데로 못 가게 꼭 붙잡아놓을 수 있는 방법이 사실 회사 입장에선 크게 없어. 무작정 충성을 해달란 염치없는 부탁만 할 수는 더더욱 없는 거고. 결국 나는 자네들이 뛰어놀 수 있는 판을 조금 더 키워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어. 하아...항상 이 때쯤 되면 고민 아닌 고민을 하게 돼. 여기까지만 할까, 아님 여기서 뭔가를 좀 더 해야되나? 그런 고민을 할 때마다 여기서 내가 멈추면 자네들도 함께 멈출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지를 수 밖에 없는 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