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나 뭐하는 사람이에요?
“차장님.”
양 팀장과 함께 찾아온 이 대리.
혼자서 날 찾아오는 건 회사를 떠나는 마지막날까지 불편했던 모양이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홍성 인터네셔널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 대리.
여기서 우린 이 대리가 홍성을 떠나는 건 그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 위해서 떠난다는 정도로만 이해해주기로 무언의 약속을 하게 된다.
난 보고 있던 기획안을 잠시 덮어두고 명함 한 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무 책상을 빙 돌아서 이 대리 앞으로 다가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난 프로젝트들을 함께 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진심으로 아쉽습니다.”
“결혼식 날짜 정해지면 청첩장 꼭 보내주십시오.”
“물론이죠, 이 대리 결혼식날 저 파리 출장갔다가 공항에서 바로 식장으로 달려갔던 거 기억하죠?”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그리고 흐르는 어색한 침묵.
“다른 말 다 필요없고, 응원한다, 좀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곳으로 옮기게 된 걸 축하한다는 말만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뒀던 명함을 이 대리에게 건넸다.
엄지로 명함에 찍혀있는 홍성 인터네셔널이라는 상호를 스윽하고 닦아내던 이 대리.
그 순간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나 담백하게 이별을 했고, 또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회사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아군으로 만나게 되길 기대했다.
총 네 명의 직원이 홍성을 떠나 CGM 쪽으로 옮겼다.
영업부에서는 이 대리를 포함해서 두 명이 빠지게 된다.
나머지 한 명은 개인적으로는 말 조차 길게 섞어보지 못한 영업 마케팅부의 신입사원이었고.
영업 지원팀과 QA팀에서 대리급이 각각 한 명씩 CGM쪽으로 갈아탄 것으로 알고 있다.
홍성의 입장에선 적다면 적은 피해였고, 또 한 번에 네 명을 빼앗긴 부분에 있어서 크면 크다고 할 수 있는 자존심 상의 피해였다.
그리고 며칠 뒤, 영업 마케팅부의 김 차장이 준비한 영업부 전체 회식 자리.
“부장님...”
양 손에 소주병과 빈 잔 하나를 각각 들고 영업 마케팅부 방 대리가 우리 테이블로 찾아왔다.
장 부장과 김 차장, 그리고 내가 다른 팀장급들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있던 긴 테이블이었다.
처음 방 대리가 그 테이블로 다가와 장 부장을 부를 때까지만 해도 우리 모두는 그가 그렇게까지 취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장 부장을 부르기 전까진 그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왔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자신의 잔을 먼저 채워놓고 장 부장에게 자신이 주는 술을 받아달란 뉘앙스로 소주병을 내밀 때 난 방 대리가 벌써 살짝 취해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영업하는 사람들 회식 자리가 다 그렇지 뭐.
장 부장은 기분 좋게 방 대리가 주는 술을 받았다.
“싸랑합니다, 부장님!”
저 멀리, 원래 방 대리가 앉았던 테이블 쪽에선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방 대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 부장과 건배를 하고 잔을 비워낸 방 대리.
그런데 그의 타겟이 나라는 건 그 뒤부터 알았다.
“차장님.”
“...?”
당연히 김 차장을 부르는줄 알았지.
자기 부서 차장은 내가 아닌 김 차장이니까.
그런데 그때부터 분위기가 살짝 묘해진다.
김 차장을 건너뛰고 내게 소주병 주둥이를 겨냥하는 방 대리.
모두가 불편해지는 순간이다.
“여기 차장님 계시잖아요.”
김 차장을 향해 손을 뻗어 그쪽으로 먼저 술을 권하라고 했지만, 그게 더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자기들끼리 얼마나 마셨길래, 아무리 기분 좋게 마시는 회식자리지만 똥 오줌 조차 구분을 못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별로 가깝게 지고싶지 않은 스타일이다.
회식자리에서까지 긴장을 하며 술을 마시란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켜줄 건 지켜주면서 마셔야지. 다 자기보다 상급자들인데, 여기서 자기 기분을 앞세우는 건 조금 과하단 생각이 든다.
이것도 내가 꼰대라서 그런 걸까?
“제가 이번에 차장님을 제 직장생활 목표로 잡았습니다.”
그때부터 방 대리가 무슨 말을 하건, 그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켜서 최대한 빨리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만드는 게 최선이란 생각 밖에 안 들었다.
“그래요, 한 잔 합시다.”
취한 사람 잡아놓고 김 차장한테 먼저 술을 주란 말을 계속 하는 것도 우습지 않나.
그런데 이 인간이 달라는 술은 안주고 계속 엄한 소리만 들어놓기 시작한다.
“지켜봐주십시오.”
아, 도대체 뭘!
뭘 지켜보란 말인가.
“제가 딱 우리 공 차장님을 제 직장생활 롤 모델로 잡았습니다.”
저렇게 쉰소리 삑삑해대다가 다음날 술 깨고 지금 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건 최소 이불킥 각이다.
“최연소 팀장, 최연소 차장...그 기록 제가 다 깰 겁니다.”
“야, 방 대리야.”
그런 방 대리의 손을 꼬옥 잡으며 장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있던 소주병을 빼앗아 그의 잔을 먼저 채워주고, 또 내 잔을 채워주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 차장.
그리고 양 팀장은 아주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얼굴에 드러냈고, 영업 마케팅부 팀장들은 방 대리의 실수에 자신들의 얼굴이 대신 화끈거리는지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네, 부장님.”
“공 차장은 그냥 보내줘라.”
“...네?”
그런데 참 이상했던 게 장 부장이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다시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기 시작하더라는 거다.
난 여전히 김 차장을 보기가 민망해서 딱 죽을 맛이었는데.
“목표가 있는 건 참 중요한데, 그래도 공 차장은 먼저 가게 그냥 보내줘라.”
“...?”
무슨 말일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지금 공 차장은...”
순간 난 장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장 부장은 그 시선을 다시 김 차장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지금 공 차장은 나도 못잡는다.”
“...!”
모두가 순간 멍을 때리게 되는 순간.
눈치 빠른 안낙현이 폭소를 터뜨린다.
“푸하하하하...”
그리고 그 폭소가 모두에게 전염이 되는 순간, 다행히 김 차장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속으로 난 감탄만 할 뿐이고.
이런 게...짬밥이구나.
장 부장이라는 이런 벽을 내가 무슨 수로 뛰어넘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난 방 대리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이런 벽이 내 뒤에 버티고 서있어줘서 난 참 고마웠다.
그렇게 회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니, 집엔 이미 강혜선이 다녀간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었다.
세탁기 속에 이미 돌아간 빨래들.
그 앞으로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있다.
시간이 없어서 세탁기만 돌려만 놓고 돌아가니, 아무리 많이 취했어도 꼭 널어놓고 자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본다.
그 안까지 싹 다 정리를 해놓고, 청소기까지 한 번 돌려놓고 간 모양이었다.
“자?”
난 곧바로 강혜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이제 자려고.
“뭐하러 왔어, 피곤할텐데...”
-그냥 잠깐 들렀어. 많이 마셨어요?
“아니, 그냥 2차까지만 따라갔다가 중간에 나왔어.”
-내일...엄마가 당신 데리고 보약 지으러 가래.
“왜?”
-핑계라도 만들란 말이지. 보약 먹는단 핑계로 술 좀 자재하게 만들라네.
“영업하는 사람들한테 그게 핑계가 되나, 어디. 아무튼 내일 낮에 데리러갈게. 자.”
-당신도 일찍 자. 일찍도 아니다. 벌써 11시야. 얼른 자요. 양치하고.
“네, 알겠습니다.”
상견례 날짜까지 받아놓은 상태에서 나와 강혜선은 동거를 하지 않는다 뿐이지 거의 결혼을 한 거나 다름 없는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난 더 미안해진다.
나도 깨어있는 남자들처럼 가사를 분담하고 싶고, 조금 더 로맨틱한 데이트들을 연출해주고 싶은데, 현실이 그런 것들을 못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못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강혜선을 가사 도우미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건 진짜 미안한 거다.
솔직히 아직 결혼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애인이 혼자 사는 원룸에 애인 몰래 우렁각시처럼 찾아와서 빨래와 청소까지 해놓고 돌아가는 강혜선.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강혜선이 더는 그러지 못하게끔 내가 집안을 깨끗하게 해놓고 살아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퇴근만 하면 녹초가 되어버리는 컨디션 때문에 이것 역시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 다음날 강혜선에게 이 부분에 대해 조금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봤다.
“부담스러워?”
“부담이 아니라 미안한 거지. 나만 일하는 거 아니잖아. 당신도 일을 하는 사람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
커피숍.
공인 중개소 소장과의 약속 시간까지 2시간 정도가 더 남아서 나와 강혜선은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당신이 경제활동을 책임지고 해야해, 우리 결혼하면.”
“...”
“물론 나도 아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일을 할 거고, 또 아기가 태어나도 어느정도 휴직 기간을 가진 뒤 다시 일을 할테지만 애를 키우면서 언제까지 동료들 눈치 안보며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거고.”
“그런 거랑은 조금 별개의 이야기지.”
“나는 지금 당신한테 물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실제로도 그렇고. 여기서 치고 나가야지 왜 엄한 생각을 해?”
“...”
“난 한계가 있어. 아무리 은행이 철밥통이라고 해도 나는 한계가 분명 있단 말이야.”
“안 속상해?”
“뭐가?”
“그냥 뭐...다른 여자들처럼 애인이랑 해외 여행도 다니고 싶고 할 거 아냐.”
“내가 어디 뭐 꽃띠 이팔청춘이야? 어디 하루종일 당신이랑 같이 시간 보내면서 얼굴이나 뜯어먹고, 손가락 빨 일 있냐고. 결혼은 현실이잖아. 내 남자가 밖에 나가서 돈 잘 벌어오고 엄한데 한 눈 안팔고, 아니 팔 정신도 없는데 거기서 내가 뭘 더 바래?”
내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강혜선이 말했다.
“딱 지금처럼만 해줘요. 나중에 진짜 결혼해서도. 그럼 진짜 완벽한 남편이다. 그리고...”
“응.”
“오늘 보러 가는 집 그거 그냥 계약하자.”
“더 안 봐도 되겠어?”
“어지간한 건 다 봤잖아. 오늘 다시 보러가는 집도 벌써 세 번째 가는 거고. 그냥 그걸로 해.”
“당신이 그러자고 하면 하는 거지.”
“그리고...그 집 당신 명의로 해요.”
“뭐래? 뭐라는 거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게 좋을 거 같아.”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라.”
“그런 게 중요해?”
“난 한 번씩 당신 볼 때마다 좀 이상해.”
“뭐가?”
“아, 몰라, 뭐가 이상한지. 근데 진짜 좀 이상해.”
“나 청약 통장 한 번 써야 될 거 같아.”
“...뭐?”
“청약 통장. 나 지금 엄마, 아빠 집에서 세대분리 시키면 1순위야. 아깝잖아.”
그때까지만 해도 난 강혜선이 무슨 말을 하고싶어 하는 건지 전혀 감을 못잡고 있었다.
“지금 마포에 분양 준비중인 아파트 있잖아. 나 그거 34평짜리로 한 번 찔러보려고. 오늘 보러가는 집 그거 공동명의로 해버리면 기회도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소유 주택이 있어서 아예 시도조차 못하는 거고. 혼인 신고 하기 전에 한 번 시도해보자. 꼭 마포 그 물건 아니더라도, 괜찮은 거 나오면 말이야.”
“집을 또 하자고?”
“당신만 스트레스 안 받는다면 해보고 싶어.”
“...”
“혼인 신고해서 자가주택 소유자랑 세대 합치면 그때부터 난 분양권 기회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흐음...”
“당신이 그 부분에 스트레스 받을 거 같으면 안하고.”
“현재 우리한테 그럴 돈은 있어?”
“뭐 어차피 걸려도 계약금 10퍼센트만 먼저 주면 되는 건데. 그 정도 계약금은 현재 당신 소유의 아파트에서 대출 끌어다 채워도 되는 부분이고. 지금 당신 월급, 그리고 내 월급이면 조금 빠듯하긴 해도 충분히 이자 갚아가며 진행할 수 있다고 봐. 어차피 나중에 뭐가 될지는 몰라도 하나는 우리가 들어가서 살고, 나머지 두 개는 월세 돌리면 되잖아.”
이 부분은 내 전공이 아니다보니, 잘 모르겠다.
“우리 그렇게 우리 노후 준비하는 걸로 해요. 안 그럼 나중에 당신 혼자 경제활동 하게 될 때 당신 숨 막혀서 힘들어.”
“근데 현재 월세 돌리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정도 대출이 나와? 그리고 나중에 은행 이자 감당 되겠어?”
“나 뭐하는 사람이에요?”
“응?”
“나 은행 다니는 사람이야. 그 부분에 나보다 더 전문가가 있을 거 같아요? 그건 나만 믿어. 당신은 그냥 지금 하는대로만 해주면 돼. 앞으로도 내가 하라는대로만 해주면 되고. 지금 딱 좋아.”
“흐음...”
“우리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좀 더 힘내서 욕심내자. 그러라고 있는 젊음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