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대우를 바꿔보겠다는 거였다
장 부장의 기준에서는 브랜드 측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로 인해 거둬들일 위약금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지만, 내겐 그 부분이 딱히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어차피 법무팀에서 진행을 할 부분이니까.
그리고 나중에 이야기나 전해듣겠지.
총 몇 개의 브랜드 업체들로부터 이정도의 위약금을 받아냈다는 정도로.
기분상 통쾌하다는 거지, 그걸 영업부의 경비로 떨궈주지는 않을테니까.
하지만 크레딧 노트는 말이 다르다.
이건 진짜 큰 보너스라고 봐야한다.
돈을 떠나서 본사에서 브랜드를 컨트롤하고 있는 영업부 직원들이나 매장에서 고객들을 직접 상대해야하는 매장 직원, 그리고 그 많은 물량들을 핸들링해야하는 창고 직원들 모두가 해피할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될 수 있는 거다.
인벤토리상의 제로 세팅이 가능해진다.
옷, 신발, 가방이라는 아이템이 그렇다.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를 해도 데미지라는 게 생길 수 밖에 없다.
가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옷이나 신발 같은 경우는 고객이 직접 입어보고 신어본 뒤에 구매가 결정되는 품목이다보니 제품에 데미지가 생길 가능성이 무척 높다.
디스플레이를 해놓는 제품 역시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런 데미지가 난 제품들을 브랜드 본사들이 새 것으로 교환을 해주냐.
절대 안해주지.
제품 자체상에 난 하자도 교체가 쉽게 안 이뤄지는 판국에 제품 판매 상에 난 데미지를 교체해줄 애들이 절대 아니다.
이건 바랄 수도 없는 부분이고.
결국은 홍성이 다 떠안아야 하는 로스가 되는 건데, 매장을 하나만 컨트롤한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홍성처럼 전국에 있는 백화점을 상대로 매장을 운영하는 컨트롤 기업의 입장에선 이 부분도 무시하지 못할 코스트가 되는 거다.
그런데 그건 진짜 요만한, 아주 콩만한 코스트일 뿐이고 재고 처리가 더 큰 문제다.
나크리스야 처음 계약을 할 때부터 컨사인먼트(일단 먼저 팔고 올라온 매출에서 물건값을 지불하는 방식)로 계약을 해서 이 부분에 대한 부담이 덜하지만, 거의 모든 명품들은 컨사인먼트 계약이라는 걸 해주지 않는다.
결국은 홍성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물량을 사오는 건데, 재고로 남아서 아웃렛쪽으로 풀린 후에도 다 소진이 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물류 창고 자리만 잡아먹는 일종의 쓰레기가 되는 거다.
그것도 아주 비싼 쓰레기가.
명품들은 ‘창고 대개방’...이런 마진 포기 행사 같은 것도 마음대로 못한다.
어느 정신나간 명품 업체가 자기네 브랜드를 헐값에 팔아버리는 행사를 좋아라 하겠나.
근데 이걸 한꺼번에 모두 모아서 브랜드 측으로 제 값을 다 받고 버릴 수가 있게 된 거다.
그리고 여기서 핵심 포인트는 마진 조율이 되는 거지.
결국 돈으로 돌려받지는 못할 거다.
왜? 다시 계약을 하겠다고 하니까.
이런 경우 크레딧 노트로 잡아놓고 그 금액만큼 주문을 넣어 크레딧 노트를 차감시키는 게 보통인데, 마진까지 크게 떨어뜨릴 수 있게 되다보니 주문할 수 있는 크레딧 노트가 더 커져버렸다.
최소 두 시즌 정도는 재무부장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주문을 넣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고.
이게 현장에서 돈을 버는 영업부의 입장에선 가장 큰 성과라고 봐야한다.
그래서 난 장 부장의 날카로운 칼춤을 옆에서 계속 응원하며 부추겼다.
“차장님 나중에 이거 다 끝나고 저희 기획부 직원들한테 한 턱 내야 하는 거 알고 계시죠?”
내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김 차장에게 말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게 어디 우리 영업 기획부랑 크게 상관이 있는 일인가.
다 기존 브랜드들을 컨트롤하고 있는 영업 마케팅부의 일이지.
우리 영업기획부는 H.I 편집샵부터 Kidshub, 그리고 중국 관련 사업까지 이번 건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부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챙긴다고, 이번 일로 가장 행복한 비명을 크게 지를 수 있게 된 건 누가 뭐래도 영업 마케팅부.
“이번달 우리쪽 운영비로 기획부 회식 한 번 시켜줄게.”
“에이...그걸로 안되죠.”
“그럼?”
“마케팅부도 같이 참석을 해야죠. 영업부 전체 회식 한 번 합시다.”
“그야 당연한 거지. 설마하니 내가 염치없게 우리쪽 운영비 카드만 전달하겠어? 이거만 깔끔하게 끝내놓고 장어 한 번 먹으러 가자, 부장님까지 모시고.”
“크흐...역시 최소 배우신 분이라니까.”
영업 기획부 핵심 인원들 대부분을 영업 마케팅부로 핼퍼 보냈다.
특히 장향은과 이지혜가 가장 큰 활약을 해준다.
팀은 다르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장향은에게 센터 업무를 배우고 있던 이지혜, 그리고 자타공인 영업부 최고의 센터로 올라선 장향은.
그 둘이 영업 마케팅부로 며칠간 출근 도장을 찍으며 브랜드 업체들을 제대로 압박해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난 영업 마케팅부와 우리 기획부 사무실을 오르내리며 낮에는 장 부장을 도와 브랜드 업체들과 백화점 쪽을 압박하는 업무를 쳐내고, 점심 시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되는 Kishub 프로젝트와 중국 법인쪽으로 보내게 될 한국 브랜드 선정에 매달렸다.
결국 하나로 묶여야 하는 사업이었다.
만토바 제품들을 중국으로 가져가기 위해선 현재 법인이 가지고 있는 중국 시장 채널을 넓혀야 했고, 그렇게 만토바 브랜드를 앞에 내세워 채널을 넓혀가다보면 한국 브랜드를 깔 수 있는 채널도 자연스럽게 함께 넓혀질테니.
그리고 안 팀장을 따로 부른다.
“지금 안 팀장님 입장에선 타이밍이 너무 좋아요.”
“제가요? 어떤 부분이요?”
“만토바가 가진 브랜드들 덕에 기존에 중국 법인이 가지고 있던 채널이 더 넓어지게 생겼잖아요.”
“근데 그게 Kidshub랑 무슨 상관이...아!”
“원래 중국 법인에 있을 때부터 해보겠다고 했던 한국 아동복 편집샵 프로젝트.”
안 팀장의 두 눈에 지진이 일어난다.
“그것도 같이 준비합시다. 어차피 Kidshub에 들어갈 브랜드 선정은 진작에 다 끝났잖아요. 향은 씨, 아니 장 대리 다시 기획부로 넘어오면 그때부터 한국 아동복 브랜드 업체들과 컨텍 시작하세요.”
“...네. 근데 그렇게 되면...”
“포장 잘 해서 문 팀장한테 토스해줍시다. 거기서 올라올 실적은 안 팀장님과 문 팀장님이 공평하게 반띵할 수 있도록 판 깔아줄게요.”
“크흐...충성입니다!”
그리고 또 문 팀장을 따로 부른다.
“만나봐야 하는 브랜드 업체가 두 개 더 남았나요?”
“두 군데가 더 늘었습니다. 총 네 군데 남았습니다.”
“...?”
“이번 만토바, CGM 관련 기사로 업계에 소문이 다 퍼졌어요. 처음에 거절을 했던 업체들이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곳에서 더 연락이 와서 기존에 저희가 제안했던 레퍼런스대로 미팅을 한 번 해보고싶다고 하더라고요.”
“다 받아주세요. 미팅 하는데 돈 드는 거 아니잖아.”
“네.”
“일단 문 팀장이 봤을 때, 중국에 가지고 들어가도 홍성의 이미지에 큰 데미지가 없겠다 싶은 브랜드들이면 미팅 다 잡아주고 저한테 보고만 해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문 팀장님은 좋겠네? 중국 채널 확보가 훨씬 더 쉬워져서.”
내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문 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때 죄송했습니다.”
“뭐가요?”
“왜, 처음 브랜드 매각 관련 기획서 올렸을 때요.”
뭔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 고개만 갸웃거렸고, 그런 날 쳐다보며 문 팀장은 입술을 숨긴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
“해외 사업부가 이리저리 찢겨나가고 있는 게 눈에 보였고, 그래서 처음 제 이름을 달고 진행 중이었던 프로젝트가 공중에서 먼지가 될 거 같아 마음이 급했었습니다. 차장님이 해외 사업부가 하던 업무를 제대로 파악할 정신이 없으셨을 거란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급한 마음에...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늦었지만 제대로 사과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난 또 뭐라고.”
“그때 저 때문에 부장님께 많이 혼나셨죠?”
“아뇨, 별로 안 혼났는데?”
“아닌 거 알고 있습니다. 제 앞에서도 그런 핀잔을 들으셨는데, 제가 없는 자리에선 얼마나 더 싫은 소리를 들으셨겠어요.”
진짠데...
진짜 장 부장한테 기분 나쁜 소리는 별로 안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지고 이번 프로젝트 중국 법인과 손잡고 성공시키겠습니다.”
“화이팅!”
난 엄지를 치켜세워준 뒤 그녀가 가져온 서류에 사인을 해서 넘겨줬다.
그리고 며칠 뒤 진짜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CGM관련 헤프닝으로 가장 노골적으로 홍성에게 등을 돌렸던 강남점 점장이 홍성 본사를 찾아온다.
이 백화점의 시스템이 재미가 있어서 롯데, 신세계, 현대, 갤러리아...그렇게 자기네 브랜드를 달고 운영을 해도 결국엔 점장이 월급사장을 하고 있는 독립된 사업장이라고 봐야한다.
물론 그 안에서도 지점에 따라 백화점 브랜드의 컨트롤을 강하게 받는 지점도 있고, 또 매출에 따라 그 컨트롤이 느슨한 지점도 있겠지만, 반드시 따라야 하는 백화점 컨셉과 기본 매뉴얼을 제외하고는 포지셔닝 시키는 브랜드, 그 브랜드를 넣어주고 받아먹는 매장 임대료 퍼센테이지가 다 다르다.
강남점 정도면 사실 어떤 백화점이든 매출 상으로는 핵심 중에서도 핵심에 알이 박힌 지점.
자연스럽게 그 지점의 점장 파워는 높을 수 밖에 없다.
최소 백화점 브랜드 본사의 상무는 되어야 점장이 될 수가 있다.
어떨 땐 전무가 점장 대리를 하는 경우도 있고.
홍성이 아주 강력하게 불쾌함을 표현하고 또 홍성의 브랜드를 모두 빼겠다고 엄포를 놓은 지점.
그리고 그 지점으로 인해 앞으로 홍성은 해당 백화점 전 지점을 상대로 순차적으로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들을 뺄 것이라고 예고를 했었다.
그 점장은 최소 모가지가 떨어지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듣기로 우리 사장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먼저 연락을 해왔다는데, 사장님이 어디 보통 분이신가.
타이틀을 물어보고 그에 맞는 상무보에게 그를 상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단다.
이미 그것만으로 우리 홍성맨들의 사기는 올라갈대로 올라갔다.
상무보를 케어하기 위해 박 이사와 장 부장이 상대측과의 미팅에 참석을 했고, 그 미팅의 내용을 장 부장이 내게 말해주었다.
“어차피 버릴 수는 없는 패 아니냐.”
“그렇죠. 배짱은 부려도 결국엔 같이 가야하는 상대죠.”
“근데 상무보.”
“...네.”
“생각보다 카리스마 있더라.”
“왜요?”
장 부장이 약간은 의외였다는 표정으로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걸 왜 자기한테 말하느냐고 되묻더라고.”
“...?”
“실무자들끼리 있었던 일 아니냐고. 그럼 실무자들끼리 조율을 해야지, 자기를 찾아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냥 좋게 넘어가자고 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되묻더라고.”
“...”
“여기서 자기가 알았다,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앞으로 잘해보자...해버리면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입장이 뭐가 되겠느냐고 말이야.”
“크흐...쌩뚱맞게 멋있네. 결국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는 걸 뻔히 다 알텐데.”
“사과를 하고 조율할 게 있으면 실무자들끼리 하게끔 만들어보자고 하면서 이야기를 끝내더라고. 상대도 뭐 더 할 말 없는 거지. 거기서 더 질퍽대면 자기가 내린 지시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될테니까. 상무보가 나름 짧게나마 현장에서 굴러본 짬밥이 있다고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더라고.”
그때부터 해당 지점의 매니지팀으로부터 계속해서 연락이 들어온다.
모든 팀장들의 파워와 사기가 동시에 올라가는 순간이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이미 회사 자체적으로 이야기가 다 끝난 부분입니다. 내년 2월 계약 기간 완료되는 즉시 브랜드 철수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자연스럽게 감수해내야 했던 백화점 매니지팀들의 갑질.
어디 그 뿐일까.
매장을 관리하는 실장들의 비위까지 맞춰내야 했다.
중간에 끼어서 실장들과는 백화점 매니지팀들을 욕하고, 백화점 매니지팀 관리자들이 쏟아내는 매장 직원 관리에 항상 죄송하단 말만 반복해야했던 우리였다.
“왜 매장 임대 수수료 1퍼센트가 말이 안됩니까? 왜 그게 없는 퍼센테이지죠? 샤넬은요? 에르메스는 현재 몇 퍼센트를 매장 임대 수수료로 지불하고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 그 지점 샤넬은 그냥 들어가서 전기세 정도만 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희가 지금 잘못알고 있는 건가요? 생각 잘하셔야 됩니다. 지금 이야기 중인 브랜드가 샤넬의 네임드와 같다는 말이 아니라, 현재 저희 홍성이 취급하는 전 브랜드의 영향력이면 그 정도는 될 거란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동안 백화점 매니지팀들로부터 받아온 갑질의 설움이 터져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다만...
그냥 다만 앞으로의 대우를 바꿔보겠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