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For what?
“중국 시장이요? 치노?”
“생각 있으십니까?”
“글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박수를 친 다음, 그 박수친 두 손바닥을 슥슥 비벼대기 시작하는 스폰짜.
노련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함께 노련함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다간 도리어 잡아먹힌다.
이런 상대에겐 포커 페이스도 소용없다.
“우리가 왜?”
“그냥 이야기나 한 번 해보는 겁니다.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 같이 한 번 해보자고.”
“아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게, 말은 같이 해보자고 하면서 정작 홍성한테 득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보통 이런 제안은 뒤에 뭔가 아주 큰 걸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뭘 위해서요?”
“뭘 위해서라니?”
포 왓.
스폰짜에게 내가 물었다.
포 왓. 도대체 뭘 위해서 내가 뭔가를 숨기고 당신을 만나러 왔겠냐고.
내가 뭔가를 당신에게 숨겨서 얻을 게 뭐가 있겠냐고.
정해진 월급.
그 월급에서 뭔가를 더 얻기 위해선 실적이라는 걸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 실적을 현재 가장 크게 만들어주고 있는 곳이 바로 만토바에서 받고 있는 물건들이다. 그런 만토바를 상대로 내가 무슨 꿍꿍이를 가질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세일즈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요?”
“세일즈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최고의 퇴직금은 돈이 아니라 인맥이라고.”
“오호...”
“이탈리아는 어떻습니까? 한국과 많이 다른가요?”
“그 부분엔 국경이 없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한테 미스터 스폰짜, 당신이라는 든든한 인맥이 있었기에 쉽게 H.I 편집샵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었고, 또 그로 인해 스폰짜 창고가 바빠진 거 아닐까요?”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들을 한국에서 홍성이 대신 컨트롤해서 중국으로 보내주겠다?”
“여기서 이제 저희 홍성이 기대하는 부분은 약간의 마진 조율이 되겠죠. 현재 H.I 편집샵 관련으로 저희가 발주를 넣고 있는 물량에 한해서만 마진을 조금 낮춰주시면, 거기서 발생하는 마진 수익으로 창고 인원들을 조금 더 뽑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어차피 비어있는 창고, 가만히 놀게 만들면 뭐하겠습니까? 그렇게 사용하는 거죠.”
“중간에서 환율 차액도 조금 볼 거고?”
“그거야 뭐 몇 푼이나 된다고요. 어떨 땐 마이너스가 잡히기도 할 부분이죠.”
“진짜 뭐가 있는데, 분명히.”
그리고 카드를 한 장 오픈시킨다.
“CGM이 한국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폭스 타운?”
“아뇨, 폭스 타운이야 CGM의 지분만 들어가 있는 곳이고, CGM 몸통이 들어올 계획입니다.”
“걔네들은 참 지저분하다. 한국 들어가서도 유럽에서 했던 거랑 똑같이 할 거 아니에요?”
“마진 경쟁 준비하겠죠.”
그제야 스폰짜는 손가락으로 날 여러차례 가리키며 그게 여기까지 자신을 만나러 온 진짜 목적이냐는 듯 미소를 흘렸다.
그래서 난 무덤덤하게, 그리고 왜 그런 미소를 짓느냐는 식으로 어깨를 살짝 들었다 놓았다.
“거 봐, 내가 뭔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
“아니라니까요, 진짜. CGM이 한국에 들어오건, 안 들어오건 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전...그냥 영업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
“CGM에서 저한테 프로포즈를 하더라고요. 같이 일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조건도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아직 보류하고 있는 중이에요. 상황 봐서 그쪽이 더 괜찮겠다 싶으면 옮기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에 CGM이 한국을 거쳐서 중국에 진출을 해버리면, 그래서 중국 시장을 다 먹어버리면 과연 만토바는 어떻게 될까?”
눈알을 살짝 위로 치켜뜨는 스폰짜.
“현재 만토바에 물건 떼러 오는 사람들의 6,70퍼센트 이상이 한국, 중국, 일본 아닙니까?”
“...그렇죠?”
“그 중에서도 중국 비율이 압도적일 것이고.”
“압도적이라고 할 것까지야...”
“어쨌든 한국, 일본 합한 것 보다는 중국이 더 많을 거 아닙니까.”
“...”
“CGM이 중국에, 그것도 아마 창고를 튼다고 하면 광저우 이우쪽이 되지 싶은데, 그 쪽에 창고를 틀어버리면 한국, 중국, 일본에서 소매하는 사람들이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이곳 만토바까지 올까요? 비행기 값, 호텔 값, 왔다갔다 걸리는 시간...이것저것 다 계산해보고 딱히 큰 차이가 없다면 앞으로는 어지간하면 다 중국에서 해결을 하겠다고 하지 싶은데...”
“그건 미스터 공 말이 맞네요.”
“물론 미스터 스폰짜 입장에선 작은 손님이겠지만, 한국의 롯데나 신세계가 자체적으로 만든 아웃렛 브랜드들도 앞으로는 CGM쪽에서 다 소화를 할 가능성이 높죠.”
“흐음...”
“저는 그냥 개인적으로 미스터 스폰짜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홍성 소속이 아닌, 그냥 미스터 스폰짜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한 명의 친구로 말이죠. 그리고 만약 미스터 스폰짜가 이 부분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다시 홍성 인터의 공은태로 돌아와서 그 방법을 한 번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왜...”
“...”
“왜 CGM 쪽으로 안갔습니까? 홍성 보다는 그래도 CGM이 글로벌 기업 아닙니까. 미스터 공의 입장에선 그쪽으로 갈아타는 게 개인 스펙에도 큰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이제 스펙 따질 포지션은 넘어섰죠. 그리고 무엇보다...거긴 별로 재미가 없을 거 같아요.”
“그거 중요하죠.”
“그러니까요. 아무리 작은 프로젝트라도 제 이름을 달고 성사시키는 짜릿함이 은근히 중독인데, 거기선 월급은 조금 많이 받을지 몰라도 그런 짜릿함은 덜할 거 같더라고요. 그래도 아직 모릅니다. 만약 CGM이 한국을 거쳐 중국을 장악해버리면, 저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그 쪽으로 갈아타는 수 밖에.”
“제가 조만간 한국을 한 번 가야겠네요.”
“제가, 아니...홍성이 다 준비해놓겠습니다.”
“H.I 건으로 가져가는 물건들 마진은 얼마나 조율을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CGM 한국 진출 건으로 미스터 스폰짜가 현재 생각하는 심각성 만큼 조율해주시면 될 거 같은데요.”
“만토바엔 언제까지 계시는 겁니까?”
“일단 다른 창고들도 찾아가봐야 합니다.”
“저랑 같이 가죠.”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리고 다시 4박 5일간의 만토바 출장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땐 김 차장의 영업 마케팅부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CGM 측이 백화점 쪽에 자기네들이 들고 들어올 브랜드 목록을 전달했고, 그 부분에 대해 백화점 측이 영업 마케팅부가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에 조율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게 참 웃긴 거다.
분명 우리 홍성은 브랜드 본사와 단독 계약으로 한국 라이센스를 유지하고 있는건데, 유통판 측에선 공룡 기업과 손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는 자기들이 브랜드 본사까지 잡고 흔들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착각을 하기 시작한다.
“아놔, 이 새끼들 진짜...”
장 부장 역시 살짝 당황한 상태.
회사는 이미 초 비상 사태 모드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쩌실 겁니까?”
“일단 브랜드 본사 측과 접촉 해보라고 시켜놨어.”
그리고 잠시 뒤 김 차장이 들어온다.
“위약금을 물더라도 계약 파기 하겠답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
이정도로 CGM의 화력이 막강하단 말인가?
3번의 재계약, 즉 6년간 우리 홍성에 한국 라이센스를 맡겼던 브랜드 하나가 계약 기간이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위약금을 물리더라도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한다.
보통은 기다려주지 않나?
보통은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 쪽에 넘긴 물량이 어느정도 빠지는 걸 확인하고 계약 연장을 안하겠다고 하는 게 맞는 건데, 이건 뭐 아무런 맥락도 없이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물량을 전체 회수해주고 또 그에 따른 위약금을 물리겠으니 계약을 끝내달라고 하는 거다.
이때부터 법무팀이 붙기 시작한다.
“이럴 땐 위약금 장사도 나쁘지 않아.”
장 부장은 만토바 카드에 확신이 가득한 상태였다.
사실 거기에 희망을 거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계약 파기 하겠다고 하는 브랜드 있음 매달리지 말고 다 받아주세요.”
“네, 부장님.”
김 차장이 나가고 난 뒤 장 부장에게 내가 말했다.
“아웃렛 쪽으로 푼 물건들도 이참에 다시 백화점으로 빽 시키시죠.”
“크흐...그렇지, 그렇지...그렇게라도 다 긁어서 받아야지. 김 차장님!”
김 차장을 다시 부른 장 부장.
“아웃렛 쪽으로 뺀 최신 상품들, 지금 바로 정상가로 돌려 백화점으로 재입고 시키세요.”
“네.”
하지만 백화점 측에선 지금 당장 얼굴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아직 CGM이 바로 들어와서 빈 매장을 채울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여기서 박 이사의 컨펌을 받은 장 부장의 본격적인 미친짓이 시작된다.
매장 재계약 건으로 타협안이 나오지 않은 상황.
“지금 우리가 깔아주고 있는 브랜드들 계약 끝나는대로 차례대로 다 뺀다고 하세요.”
정확하게 2주 뒤, 드디어 만토바에서 스폰짜와 몇몇 창고 사장들이 홍성 본사를 찾아온다.
그리고 홍성은 이미 CGM 측에서 했던 것처럼 만토바 측과의 계약 건을 언론에 보도하기 시작한다.
만토바냐, CGM이냐.
백화점 측에선 상당히 헷갈리기 시작할 거다.
그리고 브랜드 본사 측 입장에선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는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할 거고.
아무리 CGM이라도 패션의류 브랜드 권만 놓고 보면 만토바의 업계 파워를 견뎌낼 수는 없을테니까.
작은 한국이라는 시장 속에서 업계 대표 공룡 두 마리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CGM이라는 조금 약한 공룡이 조금씩 뒷걸음을 칠 준비를 하지만, 이미 늦었고.
만토바라는 이탈리아 촌 구석에 박혀있던 거대 공룡의 시야를 확보하고 있는 홍성 인터의 집요함을 보여줄 차례가 됐다.
“끌로에 매장 재계약 건으로 백화점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김 차장의 말에 장 부장이 그동안 꽉 막혀있던 한숨을 그제야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뭐라고 하던가요?”
“기존 계약 방식 그대로 재계약을 해주겠다고.”
“해주겠다고? 해달라는 게 아니라 해주겠다고 하던가요?”
“...네.”
“미친새끼들...됐다고 하세요. 앞으로 그 지점엔 홍성 물건 안 들어갈 거라고 똑똑하게 전하세요.”
“하지만...”
“기어들어올 때까지 조으란 말입니다. 현재 거기 매장 임대 수수료 3퍼센트죠?”
“네.”
“1퍼센트까지 내리세요.”
“1퍼센트요?”
“제로 퍼센트도 감당을 해야 합니다, 그 지점은. 대형 브랜드 다 빠지고 얼마나 괜찮게 장사할 수 있을지 한 번 지켜봐줍시다. 그리고 이 말은 진짜 토시 하나 빼먹지말고 그대로 전하세요. 해당 지점으로 인해, 홍성은 앞으로 귀사 브랜드 전체 지점을 상대로 차례대로 계약기간 끝나는대로 브랜드를 철수시킬 거라고.”
“네.”
그리고 곧바로 시작되는 브랜드 업체들의 접촉.
이 부분에서 장 부장은 좀 더 잔인한 면모를 보여준다.
“뭐 어쩌겠어요, 받아줘야지. 그래도 일단 반품하기로 된 물량은 다 보내주세요. 그거 크레딧노트로 받아서 신상품으로 교체하겠다고 하세요.”
이때부터 김 차장 역시 승기가 확실히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는 걸 확신하고 조금은 가벼운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마진 조율도...”
“당연히 다시 해야죠. 자, 이번 헤프닝으로 홍성을 등진 브랜드들 리스트 모두 뽑으세요. 그리고 전달하세요. 홍성이 아니라도 컨트롤해주겠다는 업체가 있음 찾아가라고. 근데 그러려면 만토바 쪽으로 물건을 풀 수 있는 루트는 막힐 거라고 하세요. 이미 그 부분은 만토바 측이 우리쪽 카드로 써도 된다고 약속을 한 부분이니까.”
“네.”
“그리고 조율 시작하세요. 최소 3퍼센트 밑으로는 안됩니다.”
“다 긁어보겠습니다.”
“크레딧노트 확실히 챙기고, 계약 파기 관련 위약금도 부담해야 할 거라고 전달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