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지금 이런 상황이 너무 재밌다
어중간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한다.
침묵도 아니고, 그렇다고 침묵이 아닌 것도 아닌 어중간한 침묵.
대기 중에 흐르는 소리는 침음과 다소 가빠진 호흡이 전부였지만 각자의 표정, 예상, 그리고 머릿속으로 굴리고 있을 계산 등이 서로에게 다 전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흐음...”
“크흠, 큼, 큼...”
“음...”
박 이사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 부장은 무릎 위로 양쪽 팔꿈치를 올려놓고 인중을 긁기 시작했고, 난 그 둘이 무의식 중에 하고 있는 행동들을 가만히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요.”
침묵을 뚫고 장 부장이 말했다.
하지만 장 부장의 말을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박 이사가 이번엔 고개를 푹 숙여 팔짱을 낀채로 넥타이 끝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리고 난 혀끝으로 입술을 살짝 적셔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심결에 툭하고 내뱉은 아이디어였지만, 생각해보니 대형 사고를 칠 수 있는 소스를 내가 뿌려놓은 거다.
살짝 걱정도 됐지만, 걱정보다는 흥분이 압도적인 상황.
그리고 난 박 이사의 표정에서 이게 과연 영업부만으로 핸들링을 할 수 있는 사이즈의 프로젝트인지 견적을 뽑아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장 부장의 표정에선 당연히 유관부서의 협조 없이 영업부 단독으로 진행해야한다는 욕심을 엿보았다.
유관부서가 붙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실적 나눠먹기가 되어버리는 거니까.
다만 장 부장의 욕심이 염려하는 부분은 영업부가 핸들링을 하는 건 당연한 건데, 어떤 레퍼런스를 들고 진행을 해야하는지의 고민 뿐이었다.
“공 차장.”
“네, 이사님.”
“그거, 가지고 온 다이어리 잠깐만 줘봐. 이거 한 장 찢어도 돼?”
“네.”
“아니다, 아니다.”
상당히 산만했다.
박 이사는 내가 건넨 다이어리를 한 장 찢으려고 하다가 그건 아니라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자리로 가서는 자신의 개인 다이어리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한참동안 뭔가를 적어내려가던 박 이사.
급해진 마음이 글씨체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뭐라고 쓰는 건지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괴발개발한 글씨.
그런데 정말 숨 한 번 제대로 쉬지않고 단숨에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워버렸다.
“후우...”
박 이사는 테이블 위로 다이어리를 내려놓으며 그제야 뭔가 머릿속으로 교통정리가 끝났다는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거...영업부 단독으로 갈 수 있겠냐?”
“누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을 모두 끝낸 장 부장의 뜻은 확고했다.
박 이사는 가만히 고개만 한 번 끄덕였고, 그런 박 이사를 향해 장 부장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죠.”
“묵히자는 말이야?”
“아뇨. 공 차장이 조심히 진행은 하되...당분간은 여기 있는 저희 셋만 알고 있는 걸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내가 툭 하고 던진 아이디어에 노련한 영업맨 둘의 노하우가 덧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노련한 영업맨들은 그냥 단순히 영업쪽 일을 오래해서 연식으로 노련함을 산 것이 아닌, 한 때 다들 영업 실적으로 정점을 찍어본 경험이 있는 실력파들이었고.
던질 타이밍을 귀신같이 잡아내는 건 경험이 아닌 영업 본능, 재능이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장 부장이 가진 본능과 재능을 따라올 사람은 내가 아는 한 그리 많지가 않다.
“이미 CGM이 한국진출 선언을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스카웃을 하기 시작했죠. 틀림없이 유통판(백화점이나 아웃렛) 쪽에서도 뭔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불편한 장면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겠지.”
“계약 기간 만료가 얼마 안남은 매장들부터 임대 수수료 퍼센테이지 조율을 시도할 겁니다.”
“브랜드쪽 애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고.”
“이번 기회에 누가 우리 홍성에게 의리를 지켜주는지 확인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 순간 난 바닥부터 시작해 회사의 별이라고 하는 임원까지 올라선 박 이사의 잔인함을 발견한다.
평소 보여주던 포근한 미소가 아닌, 무척이나 차가운 미소를 입꼬리에 걸어놓고 박 이사가 말했다.
“그래, 이참에 털어낼 놈들은 다 털어내자. 백화점 놈들이나 CGM쪽으로 가겠다는 놈들이나 각자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은 아프지만 결국엔 다 자기 살 길만 찾아 떠나는 거 아냐.”
“...당연한 거죠. 거기에 안타까움을 섞으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방법을 찾았다 뿐이지, 이 방법이 적중할 거란 보장은 없는 거니까요. 직원들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을 찾아 떠날 자유가 있다면, 회사에게도 더 묵직하고 안정감 있는 직원들만 데리고 갈 권리가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비록 공 차장이 낸 아이디어가 불발이 나서 우리가 승기를 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홍성 인터에 들어와 일하고 싶어하는 애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의리는 한 쪽에서만 지킨다고 성립되는 게 아니죠.”
“그 당연하다는 말이 언제부턴가 무책임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엔 진심으로 잡아주고 어떻게든 진탕물을 피하게 해주려고 애를 썼는데, 요즘엔 그렇게 하면 꼰대 소리 듣잖아.”
“꼰대 소리를 듣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칫 충성을 억지로 강요하는 거라 오해를 사는 게 무서운 거죠. 인정하시면 편합니다. 그런 선후배간의 끈끈한 낭만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하긴 그 낭만 속에서도 따지고보면 각자의 이기심은 충만했어.”
“...”
“도대체 그 당연한 걸 다들 왜 모를까? 회사는 업무 능력이 아닌 버텨내는 체력을 가진 사람을 실력있다고 봐준다는 걸. 결국엔 그런 애들이 승진을 하잖아.”
“다들 너무 똑똑해서 그렇죠.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비꼬우는 게 아니라 진짜 똑똑한 애들입니다. 다들 어딜가나 여기 보다 좋은 대우 받으며 일 할 애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수 밖에. 아까 내가 했던 말 취소.”
“...”
“두 사람 다 휴가 나중에 가라. 이거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가라고 하셨어도 안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힐링 할 게 뭐가 있나.
이미 난 로또 뽕으로 매일매일이 새로운 하루인데.
“장 부장, 공 차장 두 사람 이번주에 바로 만토바 출장 계획 잡아.”
“아닙니다.”
하지만 장 부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든다.
“공 차장 혼자 보내십시오.”
“...왜?”
“이탈리아 놈들 눈치가 어디 보통입니까? 한 몇 년 코빼기도 안 보였던 제가 뜬금없이 찾아가면 분명 뭔가가 있다고 눈치를 깔 겁니다. 시작부터 매달리는 입장이 될 필요는 없는 거죠.”
“그래도 공 차장 혼자 괜찮을까?”
“충분합니다. 낚시질로 상대를 살살 긁는 거는 저보다 은태 이 놈이 한 수 윕니다.”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그제야 킥킥거리는 웃음이 흐르기 시작한다.
“지금 저랑 이사님도 동시에 이놈한테 낚인 거 아닙니까.”
“크크크...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하하하...아놔, 이 새끼 이거 진짜 골 때리는 놈이네. 거기서 어떻게 만토바를 엮을 생각을 다했어?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지? 자, 오케이. 이렇게 정리하는 걸로 하자.”
일단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박 이사가 신호를 주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박 이사 역시 위로 보고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겠다고 한다.
완벽한 세팅을 해놓고, 그 어떤 반박의 건덕지도 찾지 못하게끔 보고를 해보고 싶다는 거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영업 이사 진급 후 처음 진행하는, 그리고 어쩌면 회사의 운명이 달라질지도 모르는 사안이라 조심스러울 수 밖에.
난 곧바로 만토바 출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장 부장은 본격적으로 김 차장이 맡고 있는 기존 브랜드들 중 백화점 측과 매장 임대 계약이 끝나가는 브랜드들 위주로 재계약을 준비한다.
사실 이건 부장 선에서 할 일은 아니다.
차장 선에서 할 일도 아니고.
매장 임대 재계약 같은 건은 해당 브랜드를 컨트롤하고 있는 팀장 선에서 결정을 하고 보고만 하는 되는 사안인데, CGM이 엮여있는 사안이라 장 부장이 직접 손을 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뭐라고 합니까?”
“이 새끼들 봐라...”
“퍼센테이지를 올리자고 합니까?”
“그야 당연한 거고...”
“그럼...”
“앞으로는 최소 매출 개런티를 해달란다.”
“헐...미친새끼...”
홍성의 입장에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우리 홍성의 자존심을 짓눌러서 이참에 서열을 정하겠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홍성이 깔아주는 브랜드가 몇 개인데, 그런 홍성을 상대로 최소 매출 개런티를 해달라니.
그것도 매출이 없는 지점이 아니라, 핵심 지점에서.
백화점 측에서 일방적으로 특정 목표 매출을 잡아놓고 그 이상 매출이 안 올라와도 매장 임대료로 얼마를 지불하란 말이다.
보통은 전체 매출에서 퍼센테이지 계약을 해서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는데, 이젠 자기들이 완벽한 갑의 위치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소리.
말 그대로 겨우 매장 하나 확보한 개인 사업자들에게나 제시할만한 조건을 내걸고 있다.
미친놈들이지.
“어쩌기로 했습니까?”
“일단 계약 완료 기간이 조금 더 남았으니까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고 끊었어.”
“이야...이렇게 얼굴을 싹 바꾸나요?”
“자기들 회사 아니거든.”
“...?”
“어차피 백화점 점장들도 다 월급쟁이 이사, 상무들 아니냐. 이 참에 우리랑 CGM을 경쟁 붙여서 임기 기간 동안 자기 개인 실적 올릴 수 있을만큼 다 올려놓고 다음 임기 달고 오는 점장한테 싸놓은 똥 치우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다른 지점들도 상황은 비슷할 거 아닙니까?”
“일단 그렇다고 봐야겠지.”
“CGM이 크긴 크네요. 아직 들고 들어오겠다고 확정된 브랜드도 없는데, CGM이 들어온단 소리에 저렇게 백화점들이 하루 아침에 얼굴을 싹 바꿀 정도라면...”
“은태야.”
“네.”
“나는 지금 이런 상황이 너무 재밌다.”
“크크크...”
“회사는 똥줄이 타겠지만 말이야.”
“저돕니다.”
“우리...”
“알고 있습니다. 이참에 업계 전체에 우리가 왜 홍성인지를 확실하게 한 번 보여주겠습니다.”
“지금부터 난 백화점들한테 우리 홍성이 넣고 있는 브랜드들 다 빼겠다고 말할 거다. 전 지점.”
“그렇게까지...”
“백화점 새끼들 상대로 나도 그정도 갑질 한 번 해볼 수 있도록...만토바 놈들 확실하게 엮어 와라.”
이번 만토바 출장이 얼마나 비밀스러운 출장이었냐면, 회사의 움직임을 영업부 전 직원들에게 숨기기 위해 나 혼자 떠났다.
그것도 출장비 내역을 만들 수가 없어서 박 이사의 법인 카드로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했을 정도로.
회사라는 공간은 어쩔 수 없이 비밀이 존재할 수 없는 유리다.
특히 지금처럼 CGM의 한국 진출로 인해 회사 전체, 아니 업계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는 상황에선.
목요일 아침.
난 만토바 제일 창고 사장인 스폰짜와의 만남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하이, 미스터 공!”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미스터 스폰짜.”
노트북, 심지어 아이패드 조차 챙기지 않은 출장.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내야 하는 출장이다.
이번 출장에서 내가 가져와야 할 실적은 스폰짜의 욕심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