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79화 (79/325)

# 79

사인해드려

“충성은 무슨...”

소맥은 더이상 배가 불러서 안되겠다.

시켜놓은 맥주도 거의 다 떨어진 거 같았고.

난 뒤집어져있는 소주잔을 하나 앞으로 가져와 그 속으로 소주를 채우며 말했다.

“충성...회사에 대한 충성이라...내가 그 충성이라는 단어에 두드러기가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태 씨가 한 말의 뉘앙스는 대충 알겠는데 이상하게 조금 서글퍼지네.”

“왜요?”

“그냥. 꼭 내가 어딘가에 충성을 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잖아.”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다들 회사에 대한 충성도 어쩌구 저쩌구 하잖아요.”

“그러니까. 다 아는데, 그냥 술이 한 잔 들어가서 그런지, 이상하게 그 단어가 오늘따라 홍성에서 보냈던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게 만드네요.”

“...”

“회사에 충성을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아요. 굳이 충성이라는 표현을 쓰자면 그냥 내 삶에 충성을 해왔던 거 같아요, 그동안. 그러다 대학 졸업후 결정한 최선이 홍성이었던 거 같고.”

“하지만 이번에 CGM쪽 제안을 거절하신 것도...”

“내가 찾았던 대안은 아니었던 거죠.”

“대안이요?”

“결국 내가 아직 홍성에 붙어있는 이유도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대안이 없다는 표현이 더 서글프구나. 하하하...”

그리고 박기태와 거의 막잔으로 건배.

“차장님 정도 되면 도전 한 번 해보실만 하지 않습니까?”

“도전? 무슨 도전?”

“업계에서 퇴물 취급 받기 전에 다들 결정을 하잖아요.”

“아, 독립?”

“네.”

“으으음...”

난 단호하게 고개를 흔든 다음 소주를 단번에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임원 진급이 힘들어져서 결국 이쪽 업계에서 퇴물 소리 듣게 되는 한이 있어도 난 내 사업은 절대 안해요.”

“평생요?”

“아마도 그럴 거예요.”

“요즘 시대가 어디 보통 시대입니까. 특히 남자들. 이십대 후반에 사회생활 시작해서 정년까지 진짜 길어봤자 25년? 사실 이쪽 업계는 20년도 잘했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은퇴한 후 다시 남은 30년을 가족들 부양해가며 먹고 살아야 됩니다. 독립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 아닌가요?”

“글쎄요? 어쩌면 정말 운이 좋아 그 안에 노후 세팅을 다 해놓을 수 있지도 않을까요?”

“현실적으로는 힘들죠.”

“독립을 해서 망하지 않는 게 현실적으로 더 힘들지 않나?”

“흐음...”

“난 그게 더 힘들 거 같은데?”

“...”

“내 주위에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나와서 자기 사업 시작하다가 돈만 날린 게 아니라, 가족 잃고, 건강 잃고, 희망까지 잃은...그걸로도 부족해서 주위 다른 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던 사람이 하나 있거든요. 가족 중에...그리고 난 그걸 옆에서 너무 똑똑하게 다 지켜봐야 했어요. 그래서 그런가? 이상하게 난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신이 있어도 내 사업을 할 엄두는 안나네.”

박기태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 안에서 오래전 지옥같았던 시간들을 떠올려봤다.

어지간하면 꼭꼭 숨겨놓고 있는 과거인데, 이제 좀 살만해지니까, 조금 빛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마치 바둑 복기를 하듯 그 지난 시간들을 한 번 꺼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정말 삼류 막장 영화지.

그 추운 겨울 날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아영이는 자기 아빠 때문에 학교에도 못갔다.

채무자들이 아영이의 학교까지 찾아가고 했으니까.

법이 어떻고 저떻고...다 필요 없다.

다 필요 없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지금 당장 돈을 못 받으면 자기들이 죽게 생겼는데, 그런 거 따질 여유가 어디에 있겠나.

돈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 아이가 초등학생이건 유치원 생이건, 아님 말 못하는 갓난 아이건 그런 걸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냥 돈만 받으면 되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어린 나이에 인간의 끝을 맛봤던 거다.

“누나 잠시 은행 좀 갔다올테니까, 누나 올 때까지만 아영이 데리고 있어라.”

“천천히 갔다온나.”

그렇게 아영이를 데리고 누나 집에 있는데, 집에 돈을 받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온다.

매형은 이미 남발했던 어음과 수표를 회수하기 위해 며칠째 밖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상황이었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영이.

그리고 여전히 어리기만 했던 난 그래도 내가 삼촌이라고 어린 아영이를 가슴에 꼬옥 껴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돈 받으러 온 사람들이 집을 어떻게 만들어놓든 아영이에게 장난을 걸고 또 장난을 걸었다.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영이가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았으니까.

정말 다시 생각해봐도 살이 떨리고 소름 돋는 순간이다.

몸은 다 컸지만, 그런 경험이 전무했던 난 그 상황에 겁을 먹고 뭘 어떻게해야 하는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옆에서 아영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순간 공황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전화기를 놔두고 어딜 가셨는지 전화를 안받지, 아버지는 귀가 잘 안 들리시니, 전화를 걸어서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을 해도 계속 “어? 뭐라고? 뭐라노?” 라고만 하시지...

그리고 누나는 계속 지금 가는 길이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지...

그때부터 매형이라는, 나에게는 진짜 멋있기만 했던 그 산같던 존재가 조금씩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던 거 같다.

이제 내 명의로 된 아파트가 한 채 생겨보니까, 재산이라고 할만한 뭔가가 생겨보니까, 이제야 당시 당신들의 부동산을 처분해서 형제들까지 외면해버린 사위의 빚을 대신 갚아줄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나야 로또로 만든 재산 아닌가.

그런데 부모님은 정말 실땀 하나, 하나로 이루신 재산이고.

그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긴 기분 아니셨을까.

그래도 딸이니까.

자기 자식 낳고 살고 있는 딸의 남편이니까 차마 그의 형제들처럼 매몰차게 외면은 못하시고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던 아파트를 처분하셔야 했던 부모님.

원룸으로 돌아온 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우얀일이고 이 시간에?

“그냥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혜선이는?

“집에 있겠지 뭐.”

-대답이 와 그렇노? 싸웠나?

“아니, 그런 거 아이다. 오늘 회사 사람하고 같이 저녁 먹는다고 못 만났어요.”

-맨날 니는 회사 사람이고. 혜선이가 그런 걸로 뭐라 안하나?

“엄마.”

-와?

“아들이 효도할게.”

-니 뭐 술마셨나. 와 평소 안하는 짓을 하노?

“아빠는?”

-옆에 있다.

“바꿔도.”

-...

“함 바꿔도.”

그리고 잠시 뒤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랑 통화를 할 때엔 폰을 귀에서 멀찍히 떨어뜨려야 한다.

안 그럼 고막이 나갈 수가 있으니까.

-은태가?

아버지의 목소리 만큼이나 크게 소리를 높혀 아버지를 불렀다.

“어버지.”

-은태가?

“하아...아버지!”

-어, 그래!

“밥은?”

-...

“밥은!”

-어?

“밥! 식.사.하.셨.냐.고!”

-어, 밥 먹었다. 니는?

“나.도.”

-그래, 알았다! 얼른 자라!”

그 와중에 웃음이 나왔다.

진짜 오랜만에 아들이랑 통화를 하시는 걸텐데, 고작 밥 먹었냐는 물음 뒤에 알았으니 자라는 게 전부다.

그래도 이렇게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거 같다.

“아버지도 얼른 주무세요.”

-...

“아.버.지.도.얼.른.주.무.시.라.고.”

-알았다! 끊는다!

그리고 난 강혜선에게 이제 막 집에 돌아왔다는 카톡을 하나 남겨놓고, 어플로 내 명의의 아파트 시세를 확인해본다.

이렇게 지치고 감정적으로 다운이 되는 날의 유일한 낙이지.

조금 올랐다.

몇 달 사이에 2천만 원 정도 가격이 올라 있었다.

사자마자 부동산 정책으로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금방 치고 올라가서 5개월만에 2천만 원 정도가 올라 있었다.

난 그 2천만 원을 내 월급으로 환산해본다.

월세로 들어오는 돈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매매, 매도시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차액만 가지고.

5개월에 2천.

또 언제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들쑥날쑥하긴 해도 결론은 오를 수 밖에 없는 입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가 같은 걸 찌르지 않고, 깔끔하게 강남 노른자 소형 아파트에 몰빵 투자를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

여기서 더 욕심을 내어 내가 한 투자에 미련을 갖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스트레스가 되는 거겠지.

그냥 무조건 잘 한 거라고 믿고 기다리자.

이 페이스대로만 쭉쭉 올라가준다면 정말 난 내 삶에, 내게 주어진 환경에 충분히 선방을 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또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하루가 펼쳐진다.

축 늘어졌던 전날과는 달리, 이상하게 출근길이 상쾌한 하루였다.

마침 임원 연수를 떠났던 박 이사님도 회사로 복귀를 하는 날이고, 문 팀장이 섭외중이던 브랜드 회사 사장 한 분도 홍성과의 계약 내용을 확인하겠다고 오후에 회사로 찾아오기로 되어있었다.

일만 보고 가자.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너무 많은 대한민국 30대 중반.

그것들 안 챙기면 안 될 거 같아서 챙기긴 하는데, 그것들 챙기느라 정작 진짜로 챙겨야 할 것들을 못챙기는 현실에 계속 지금 이 결정과 순간을 의심하게 되는 대한민국 30대 중반.

조금 내려놓고, 또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회사 일만 보고 가자.

그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가다보면...결국 세상이 내게 답을 주겠지.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무조건 맞는 것이라고.

“80퍼센트 마진은 사실상 저희한테 죽으라는 말입니다.”

중형 사이즈 회의실.

브랜드 업체 사장과 그 회사의 상무라는 사람이 함께 홍성 본사를 찾았다.

나와 장 부장, 그리고 문 팀장이 함께 참석을 한 회의였다.

우리 홍성은 상대 업체에게 우리가 직접 중국 시장 유통 채널을 뚫어볼테니 마진을 80퍼센트로 낮춰보자고 제안했다.

“저희 홍성의 입장에서는 모험입니다.”

팽팽한 신경전.

마진 1, 2퍼센트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10퍼센트, 15퍼센트 단위를 조율하는 자리다.

“저희는 그동안 홍성이 취급해왔던 명품들과는 다릅니다. 마진을 그렇게 맞춰주려면 저희 입장에서는 단가 자체가 안맞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공장부터 돌리는 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합의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계속 팽행선만 달리는 양 측의 입장.

하지만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해외 영업부와 홍성에 묻혀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공장을 돌려야 하는 브랜드 측.

그렇게 했던 말의 반복, 설득이 오고가는 가운데 회의실문이 열린다.

그리고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우리 영업부 전 직원이 함께 선물한 정장을 차려입은 박 이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참 찾았네.”

나와 장 부장, 그리고 문 팀장은 거의 동시에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상대 브랜드 업체측 사람들에게 이사님을 소개했다.

“어디까지 진행됐어?”

이사님의 질문을 받은 장 부장은 아직까지 타협이 되지 않고 있는 마진 베이스와 몇 가지 문제 포인트를 집어냈다.

그러자 이사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참석해야하는 회의였던 것처럼 장 부장이 앉았던 자리로 파고 들어왔고, 장 부장과 난 옆으로 한 칸씩 밀려 앉게 된다.

이것저것 군소리는 필요없다는 듯 상대측에게 이번 비즈니스의 핵심부터 말해버리는 이사님.

“어차피 한국에서 택갈이 하셨던 거 아닙니까?”

“...!”

“예전에 한국에다가 풀었던 마진이야 중국 공장에서 찍어내고 한국에 가져와 택갈이를 해야했던 제품들이었을텐데, 그때 마진이랑 지금 중국 현지에서 바로 받겠다고 하는 마진을 비교하시는 건 말이 안되죠. 물류비도 현지 국내 물류비만 드는 거 아닙니까. 이건 80퍼센트가 아니라 82퍼센트, 83퍼센트까지 낮춰주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마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이, 장사에 존재하지 않는 마진이라는 게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 이건 어떤가요? 홍성이 중국에 깔 매장 전체 인테리어까지 다 책임지는 걸로.”

그 한 수로 인해 상대의 초점이 방향을 잃기 시작한다.

마진 협상 다음으로 진행되어야 할 매장 인테리어 비용.

하지만 이사님은 그 부분은 별개로 놓고 협상할 부분이 아니라는 뜻을 명확하게 내비쳤다.

“매장 인테리어, 저희 홍성이 100퍼센트 책임지고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귀사 측에선 공장만 돌려주시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강력한 장 부장의 서포팅.

“더 정확하게는 브랜드만 제공을 하는 거죠. 제품이야 기성 제품 찍어내는 공장에 물량맞춰 비용 청구해서 돌리는 거고, 그 외 부수적인 택작업 정도만 사람 시켜서 하는 거니까요.”

“...”

상대의 바닥을 노출시켜놓고 그 바닥을 못 본척 다시 그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전법.

박 이사는 길게 끌 필요도 없다는 듯 거기에서 마무리 멘트를 친다.

“일단 한 번 같이 살려봅시다.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한 번의 계약으로 서로 돈을 벌겠단 욕심 부리지 말고, 사장님은 어차피 시장에 묻히게 될 귀사 브랜드에 어떻게든 숨을 불어넣는단 생각만 하시고, 또 저희 홍성은 괜찮은 파트너 하나 만든단 생각으로 투자하겠습니다.”

“80퍼센트 밑으로는 힘듭니다.”

“그럼 80으로 하면 되죠, 뭐. 장 부장.”

“네, 이사님.”

“그 정도도 괜찮잖아?”

“하지만 매장 인테리어를...”

“됐어. 괜찮아. 우리가 뭐 어디 오늘만 보고 말 사람들도 아니고, 멀리 보고 하는 사업인데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거지.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하하하...”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어야겠죠?”

순간 박 이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저희 홍성과 하게 될 계약 기간동안 귀사 브랜드는 절대 다른 곳으로 매각되어선 안됩니다.”

“...!”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하더라고요. 거래 업체가 기껏 주문량 채워줘서 살려놨는데, 그 주문량을 증명해서 다른 업체에게 브랜드를 팔아버리는...설마 그럴 일은 없겠죠?”

“무, 물론이죠.”

“그럼 여기 이 조항도 하나 넣읍시다. 만약 그럴 시엔 저희 홍성이 투자하는 매장 인테리어 비용의 세 배를 위약금으로 물리겠다는.”

“...!”

“공 차장.”

“네, 이사님.”

“계약서에 그 조항 첨부해서 사인해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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