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이거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
그렇게 난 회사의 바람과 직원들의 야망 사이에서 능력껏 원만한 조율을 해내야 하는 중간 관리자의 위치에 들어왔다는 게 피부로 와닿기 시작한다.
차장이란 타이틀을 받기 전까지야 회사에 충성은 하되, 어디까지나 사원들의 입장에 서있었다.
내게 월급을 주는 회사가 우선이기는 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곧 나의 처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했다.
대회의실을 나와 곧바로 팀장급 미팅을 진행했다.
하고 싶은 말은 일단 뒤로 숨겨둔다.
“문 팀장님.”
양 팀장과 안 팀장을 통해 현재 그들이 맡고 있는 나크리스 오픈 건과 Kidshub에 들어갈 상품 입고 현황에 대해 먼저 물은 다음 문 팀장을 불렀다.
“업체 컨텍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거의 다 끝났습니다.”
“그렇게 한 번에 다 섭외를 끝내놓고 진행하는 것 보다는 이미 섭외가 확정된 업체들부터 차례대로 자리를 마련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업체 섭외에 들어가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리네요.”
“그렇게 할까요?”
“응, 그게 좋을 거 같아요. 괜히 나중에 한꺼번에 진행하다보면 오히려 우리 쪽에서 마진 베이스 부분이 꼬일 수가 있어요. 현재 확정된 브랜드들 부터 회사로 한 번 찾아와주시라고 연락 넣어보세요.”
“어느 선 미팅이라고 전달을 해야할까요?”
“어지간하면 우리 쪽에선 부장님이 진행하는 걸로 전달하세요. 그리고 상황 봐서 영업 이사님이나 그 이상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팅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어갈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난 전무님 주최 하에 이뤄졌던 비상 대책회의 자리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을 팀장들에게 전달했다.
비상 대책회의에 임하던 전무님 이하 다른 모든 임원진들의 분위기, CGM의 한국 진출에 대한 회사의 입장에 대해 내가 보고 들은 그대로 전달했다.
그리고 나의 솔직한 심정을 덧붙였다.
“불편하게 듣지말고, 또 부담도 가지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우선 이건 업무적인 내용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 미팅 중에 사용했던 아이패드와 다이어리를 함께 덮어놓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계신 세 분 팀장님들도 어쩌면 CGM 쪽에서 날린 러브콜을 받은 당사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런 말을 꺼내야 하는 제 입장에선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저같은 내부 고발 배신자에겐 러브콜이란 기회조차 오지 않네요.”
안 팀장의 생각없는 농담에 양 팀장과 문 팀장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난 그런 농담이라도 던져서 불편해질 수 밖에 없는 분위기를 미리 가볍게 잡아주는 안 팀장이 참 고마웠다.
“평상시 같았으면 이런 불편한 부탁을 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결국엔 다 개인플레이 아닙니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각자의 커리어니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을 하는 거죠. 그런데 크게 회사 전체까지 볼 필요도 없이...현재 우리 영업 기획부만 놓고 봤을 때, 지금 상황은 저나 여기 모이신 팀장님들께서 불편함을 조금씩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황에서 솔직한 나의 생각을 전달했다.
“각자가 데리고 있는 팀원들을 한 번씩만 살펴봐 주세요.”
“혹시...러브콜을 받은 인원을 확인해달란 말씀이신가요?”
양 팀장의 물음에 난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정확하게는 그쪽으로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인원을 확인해달란 말입니다.”
그때부터 팀장들의 얼굴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나라도 이런 지시를 받는 건 상당히 싫을 거 같다.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회사의 직접적인 지시도 아니고요. 이건 어디까지나 회사가 하고있는 생각을 저 개인적으로 판단한 내용일 뿐입니다.”
“흐음...”
“해외 영업부를 제외하고는 맨파워가 다 부족합니다. 맞습니까?”
양 팀장과 안 팀장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CGM쪽에서 설마하니 그동안 중국 법인 관련 일만 해왔던 해외 사업부 인원들에게 러브콜을 날렸겠습니까? 분야가 다르죠. 한국 시장을 뚫어보겠다고 오는 쪽인데, 중국 전문가들에게 손을 내밀리는 만무하니까요. 양 팀장님과 안 팀장님이 조금 불편하겠지만, 현재 데리고 있는 직원들 체크 한 번씩만 해주세요.”
“뭐라고...”
“혹시라도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미리 좀 말을 해달라고.”
양 팀장은 그제야 내 뜻을 눈치챘다는 듯 콧등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맨파워만 짱짱하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근데 현재 맨파워도 맨파워지만 각 팀별로 맡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하나같이 대형이잖아요. 말그대로 다들 일당백을 해주고 있는 상황인데...그렇다고 더 좋은 조건을 제안받고 가겠다는 사람들을 역적으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겠다는 사람들은 마음 편히 갈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남아있는 사람들이 최대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만들어줘야 하는 거고요.”
“...그렇죠.”
“미리 알아야 업무를 하나 주더라도 조금 덜 중요한 업무를 맡기고, 인사부에 인원 보충을 요청해서 최대한 맨파워에 대한 구멍이 없게끔, 조금이라도 여유있게 업무 인수인계를 시킬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조금 피곤하시겠지만, 자연스럽게 알아봐주세요. 그리고 혹시라도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인원이 있다면 괜한 부담감 가지지 않도록 배려 잘 해주시고요.”
“한 결 같네요, 우리 홍성은.”
양 팀장의 말에 안 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문 팀장은 양 팀장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팀장은 당시 중국 법인에 있었기에 잘 모를 거다.
몇 해 전 참 많은 팀장, 대리급들이 대거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었다.
그때 홍성은 떠나겠다는 사람들을 잡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들이다.
아니, 마음이 떠났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각자가 가진 형편, 상황상 이미 마음이 그쪽으로 기운 사람들이다.
이것저것 잴 거 다 재어보고, 흔들릴 만큼 충분히 다 흔들려보고 결정을 내린 사람들일텐데, 무슨 수로 그들의 마음을 다시 홍성으로 돌릴 수 있겠나.
불가능이라고 봐야한다.
그렇게 실력있는 경력직 인원들이 대거 빠진 후 홍성은 외부에서 경력직 직원들을 보강한 것이 아닌 자체적으로 승진을 시켜 그들의 빈자리를 채웠고, 또 신입사원들을 대거 받아 새로운 회사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의 작전을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입장이고.
“솔직히 말해서 저 개인적으로는 우리 홍성이 이 부분은 참 잘 못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터져나오는 양 팀장의 불만.
“다른 회사에서 우리 홍성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부르는데요?”
“영업 전문학교라고 부릅니다.”
“푸흡...”
그 말의 뜻이 너무나 가슴에 와닿아,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영업 관련 노하우 다 배워서 다른 회사로 이직. 결국엔 다른 회사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있잖아요.”
“뭐 어쩌겠습니까? 위에서 그 부분에 대해 큰 아쉬움을 못 느끼고 있는데.”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하는 양 팀장.
그리고 우리 모두는 중간 관리자의 입장에서 양 팀장이 가진 회사에 대한 불만을 어느정도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불과 며칠 안 지난 어느날, CGM 한국 사업부 지부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더 도착을 한다.
내 쪽에서 일전에 보낸 메일 확인을 해놓고도 일부러 답장을 안했단 걸 뻔히 다 알텐데, 거기에 대한 불편함은 전혀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일전에 보냈던 내용과 비슷한, 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인 구애의 뜻을 담은 내용의 메일을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다시 보내왔다.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그럼에도 솔직한 기분은 숨겨야 했던 거고.
“또 메일이 왔네요.”
그리고 난 곧바로 장 부장에게 그쪽에서 장교실이라는 지부장이 러브콜을 또 보내왔다고 고백했다.
이런 건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밝혀지면 괜히 입장만 곤란해진다.
그런데 장 부장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한 번 만나봐.”
“네?”
순간 난 장 부장이 날 실험하고 있는 거 같단 생각에 살짝 불쾌, 피곤해지려고 했던 거 같다.
내가 그에게 CGM쪽에서 온 러브콜을 고백했던 건 피곤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약을 치는 것이었는데, 그런 걸 뻔히 다 알 거면서 도리어 날 실험한다고 생각했으니.
하지만 장 부장의 입장을 듣는 순간 그에 대한 오해를 곧바로 풀 수 밖에 없었다.
“뭐 어때? 안 궁금해?”
“뭐가요?”
“그쪽에서 생각하는 네 몸값이 어느정도나 될지.”
“...?”
“내가 너였음 그게 궁금해서라도 한 번 만나본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그냥 편하게 생각해. 어떤 조건을 내걸지, 그리고 또 그 쪽에서 현재 어떤 방향으로 한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지...그쪽에선 현재 우리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데, 우린 그쪽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잖아.”
“아...”
“그리고 또 말이 연봉 협상이지, 우리가 매년 인사부랑 하는 게 어디 제대로 된 연봉 협상이냐? 그냥 내년엔 이만큼 줄게, 여기 사인해...하는 게 고작이잖아. 이참에 그쪽에서 생각하는 업계 차장급 최고 몸값이 어느정도나 되는지 재미삼아 한 번 알아봐. 근데 이 새끼들...왜 나한텐 메일 한 통이 없지? 이거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 나한테 연락했음 진작에 가서 정보 다 털어왔을텐데...”
그리고 난 담배 한 개피를 피우며 장 부장이 한 말을 곰곰히 생각을 해본다.
궁금해진다.
CGM 정도면, 그것도 두 차례나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러브콜을 보낼 정도면 장 부장의 말처럼 업계 최고 대우를 보장해줄 것 같았다.
그 업계 최고 대우라는 게 과연 어떤 것일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다시 사무실로 내려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회사 몰래 나쁜짓을 하듯, 장교실이라는 사람에게 답장을 보낸다.
-일전에 받은 메일까지 오늘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어봤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목적으로 이런 메일을 보내신 건지 만나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한국 사업부 지부장, 장교실이라는 사람과 약속을 잡게 된다.
이름만 봤을 땐 남자인지 여자인지 감도 없는 상태였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식사는 불편하고 그냥 편하게 차나 한 잔 같이 하자는 명목으로 논현동에 있는 임페리얼 펠리스 호텔 1층 로비 라운지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그리고 지부장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지나치게 젊은 내 또래의 여성이 혼자 나와 있었다.
이런 걸 상고 머리라고 하나?
왜 90년대 한창 유행했던 머리 스타일.
옆머리, 뒷머리 모두 기계를 대어 올린 머리.
그런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마치 스트리트 파이트에 나오는 달심이나 할 법한 상당히 큰 링 귀고리를 하고 있었는데 묘하게 중성적인 이미지, 여자라고 하기 보단 그냥 꽃미남 아이돌에 가까운 개성있는 인물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를요?”
“네.”
“제 이야기를 어떻게...”
“혹시라도 괜히 미리 말해서 불편해 하실까봐 메일에서는 말을 안 했는데, 한국에 들어가게 되면 공은태 팀장님을 꼭 한 번 만나보라고 막스가 그러더군요.”
“막스?”
“아, 한국 이름은 김형찬이죠. 현재 나크리스 본사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아...서로 아는 사이셨습니까?”
“유럽 현장에서 뛰고 있는 한국인이라고 해봤자,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난 그녀 앞으로 새로운 명함을 내밀었다.
“팀장은 아니고요. 처음 뵙겠습니다. 홍성 인터네셔널 영업 기획부 공은태 차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