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우린 반칙하지 말자
CGM.
업계에선 향수 유통으로 아주 유명한 회사다.
경쟁 상대가 없는 독보적인 탑이라고 보면 된다.
CGM 하면 향수, 향수 하면 CGM이 자동 연관이 될 정도로.
유명 럭셔리 브랜드들의 라이센스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전 세계 명품 향수 시장을 반독점 비슷하게 하고 있는 공룡 기업이 바로 CGM이다.
브랜드마다 주력하는 아이템이 조금씩 다 다르다.
그리고 브랜드 기업이 직접 손을 대기엔 부담이 크고, 그렇다고 손을 안 대기엔 경쟁사 브랜드들이 다 하고 있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상 한 발이라도 담글 수 밖에 없는 시장.
그런 대표적인 시장으로 선그라스와 향수가 있는데, 사필로가 많은 명품 브랜드들의 라이센스를 사서 선그라스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면 CGM은 사필로와 같은 방법으로 향수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 향수 시장이 은근히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잘나가는 하이엔드 브랜드 치고 향수나 화장품 쪽으로 진출하지 않은 브랜드는 거의 없으니까.
샤넬, 디올, 블가리, 포르쉐 디자인...
향수 하면 프랑스인데, 어떻게 독일 기업이 그 시장을 장악하고 있냐고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CGM은 원래 프랑스 기업이다.
그러다 그 이름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독일 기업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브랜드 라이센스를 발전시켜 패션 쪽으로도 크게 확장된 컨트롤 공룡기업이고.
거기다 이 기업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가 취급하는 종목이 너무 다양하다는 거다.
향수, 패션 뿐 아니라 투미나 리모바 같은 명품 슈트 케이스 브랜드들도 함께 컨트롤을 한다.
명품 슈트 케이스 시장 역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파이가 엄청난 시장이다.
한국만 봐도 그렇다.
2010년 초반 때 갑자기 불어닥치 리모바 열풍.
물론 그 전부터도 리모바 하면 명품 슈트 케이스로 업계 원탑을 찍던 브랜드였지만, 그 특유의 쇠냄새 풍길 것 같은 디자인이 아시아로 넘어와 큰 인기를 끌면서, 그리고 많은 연예인들이 그걸 들고 공항 패션을 선보이면서 아시아에서 어마무시한 매출 성장을 보여준 브랜드니까.
거기에 투미는 또 어떻나.
스마트한 30대 전문직 남성의 이미지를 연출해주기에 가장 완벽한 해당 브랜드의 백팩 열기는 아직까지 식을 줄을 모른다.
그리고 아직 한국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간 크게 한 방 터질 수 밖에 없는 프라이탁 같은 재미난 컨셉의 크로스 백 브랜드까지 모두 CGM의 지분이 들어가 있거나 라이센스 운영을 하고 있고.
그런데 여기서 더 대박은 그런 막강한 화력을 가진 브랜드, 품목들을 다 가지고 있는 CGM이 유통판까지 쥐고 있다는 거다.
참고로 홍성 인터네셔널이 제집 드나들 듯 편하게 출장을 가는 루가노의 폭스 타운 역시 CGM의 지분이 꽤 많이 들어가 있는 창고형 대형 아웃렛이다.
2년전인가...
CGM이 한국에 들어온다는 말이 한 번 있었다.
들어오는 방식에 대한 예상도 각양각색이었고.
일본처럼 대표 브랜드 몇 개를 추려 시장을 독점하는 식으로 들어올 것이란 예상도 있었고, 아님 폭스 타운과 같이 대형 아웃렛을 준비해서 취급하는 브랜드들을 통째 가지고 들어올 거란 예상도 있었다.
그런 다양한 예상이 분분하던 타이밍에 대형 아웃렛 컨셉으로 들어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한국 시장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 시장인가.
롯데, 신세계가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냥 브랜드 몇 개만 추려서 들어오는 거였다면 오히려 롯데, 신세계 측에서는 반겼을 거다.
어차피 유통판은 자기네 백화점이나 아웃렛이 될테니까.
그럼 우리 홍성을 비롯해 많은 컨트롤 기업들과 마진 경쟁이라는 걸 붙일 수 있었을테니 쌍수를 들고 반겼겠지.
그런데 그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그들과 경쟁을 하는 구도로 대형 아웃렛 그림을 그렸으니 한국 진출이 쉬울리가 없었다.
이게 참 아이러니 한 게, 만약 CGM이 아웃렛 컨셉으로 들어오면 우리 홍성과 같은 컨트롤 기업 입장에선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초반이야 홍성 입장에선 미리 롯데나 신세계에 깔아놓은 매장들이 많으니 이리저리 눈치를 봐가며 CGM쪽 문을 두드려 브랜드를 넣어야겠지만,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지점이 늘어나면 컨트롤 기업 입장에선 브랜드를 넣어주는 조건으로 롯데, 신세계를 상대로 좀 더 나은 매장 월세 수수료 마진 협상이 가능해니지까.
그런데 브랜드만 취급하는 컨트롤 기업 형태로 들어와 버리면 강력한 경쟁자가 생겨버리는 거다.
어느쪽 컨셉을 잡고 들어와도 누군가는 피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
거기다 내게, 그것도 헤드헌터를 통하지 않고 그쪽 한국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직접 러브콜을 보내올 정도면 아무래도 롯데, 신세계가 아닌 우리 홍성같은 컨트롤 기업과 파이를 나눠먹자고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한다.
“어차피 소비자들 입장에선 좋은 거야.”
대회의실.
의외로 임원진들의 표정은 가벼웠다.
그리고 차장급엔 나만 있을 줄 알았는데, 영업 관련 다른 유관부서에서도 차장급들이 대거 회의에 참석을 했다.
자칫 회의실 안 공기가 무거우면 어쩌지 하는 우려, 그럼에도 똥줄이 타는 임원들의 모습에 대한 기대가 반반인 상태였는데, 막상 회의가 진행되고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전무님이 회의를 이끌기 시작하자 덩달아 마음이 가벼워졌던 거 같다.
전무님은 CGM이 어떤 방향을 잡고 한국 시장에 들어오더라도 크게 위축되지 말자고 말씀하셨다.
“그놈들이 우리랑 파이를 나눠먹든, 백화점 놈들이랑 파이를 나눠먹든 경쟁을 피할 수는 없을테니까. 그럼 뭐 자연적으로 거품이 조금씩 거둬지지 않겠어? 그동안 이쪽 시장이 너무 좋았어.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하자.”
전무님의 그 한 마디에 임원석 여기저기서 그 말에 동의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사실 그동안 돈 쉽게 벌었잖아.”
그거야 회사 말이고.
그 회사에서 죽어라 야근을 해가며 일하고 있는 우리는 정해진 월급, 그리고 조금의 성과급 외엔 구경조차 한 돈이 없다.
아무튼 전무님이 하신 말의 의도는 대충 이해가 갔다.
“거기 함 부장.”
“네, 전무님.”
아이티 영업부 함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앉아. 앉아서 들어.”
다시 자리에 앉는 함 부장을 향해 전무님이 말씀하셨다.
“첫 째 이제 대학들어갈 때 안 됐나?”
“아직 고2입니다.”
“그렇구나. 시간 참 빠르다, 그지? 사장님 모시고 자네 결혼식 찾아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 벌써 20년 정도 안됐나?”
“네. 19년 째 입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의미없이 고개만 끄덕이시던 전무님.
전무님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임원들 역시 자기네들끼리 지나온 홍성 인생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상당히 생소했고, 또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연출을 해도 되는 장면인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임원진이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한순간 좌중은 조용했다.
“이젠 회사가 연식이 올라서 모르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겠지만, 처음 사장님 모시고 이 홍성을 만들었을때부터 지금까지 홍성은 단 한 순간이라도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어. 멀리 갈 것도 없잖아. 재작년에 회사 덩치 키워보겠다고, 성심, 한성물산 한 번 잡아보겠다고 했을 때 생각들 좀 해봐.”
“...”
“지금보다 더 위태롭지 않았어? 하루에도 서너 명씩 퇴사를 희망하고, 또 실상은 그게 아닌데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홍성이 부도가 날 것처럼 소문이 퍼지기도 했었잖아.”
“어디 그 뿐입니까? 명동점 기억 안나십니까?”
전무님과 약간 떨어진 임원석에서 이제는 추억이라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다는 식으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왜 기억이 안나? 그걸 어떻게 잊어? 노진형이었나? 당시 명동점 점장.”
“아마, 그럴 겁니다.”
“봐, 내가 아직 그 놈 이름까지 기억한다. 지금은 영업하기 진짜 수월해진 거야. 예전에 노진형이라고 명동점 점장이 우리 홍성이 컨트롤하는 매장 몇 군데 돌면서 이거 예쁘네, 이거 우리 와이프가 하면 참 괜찮겠다...요즘 마땅히 입을만한 와이셔츠가 없네...하면서 말이야 양아치짓을 참 많이 했었어.”
“진짜 양아치죠.”
“그러니까. 근데 당시에만 해도 백화점 점장쯤 되면 신이었어. 특히 우리처럼 어떻게든 매장 하나 확보해보겠다고 하는 중소 컨트롤 기업 입장에선. 어떻게 해? 줘야지. 그럼 또 직접 줄 수가 없으니까 점장 밑에 따라다니는 애한테 말해서 점장 차 키 받아다가 지하 주차장까지 필요하다는 거 다 카트에 챙겨서 내려간다? 그리고 트렁크에다가 다 실어주는 거야. 그것도 뭐 하나씩 챙겨줄 수 있냐? 셔츠 스무 개씩 넣어주고 그랬어. 그럼 또 그걸 본사 로스로 잡는 거고.”
“하아...진짜 당시 그 놈 많이 해먹긴 많이 해먹었어요.”
“그런 더러운 관계 한 번 청산해보겠다고 사장님이 다이렉트로 본사에 컴플레인 넣었다가 도리어 다른 지점에 들어간 매장까지 다 빼란 소리까지 나왔잖아. 우리 그 때 홍성 문 닫는 줄 알았어.”
여기저기에서 추억에 담긴 가벼운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고, 그런 옛날 추억팔이를 하자면 자기들도 할 말이 많다며 군데군데에서 그 시절을 추억하는 소리들이 새어나왔다.
“어디 그뿐입니까? 백화점 본사애들이 매장 여직원들을 좀 많이 건드렸습니까?”
“지금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당시엔 너무나 당연하게 이뤄졌었지.”
그리고 그 모든 추억팔이를 잠재우며 전무님이 현실을 직시한다.
“우리 홍성이 언제부터 업계 1위였나?”
“...”
“얼마 안돼. 그리고 업계 1위가 우리 목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안 그래? 항상 사장님이 주시는 타겟은 전년대비 성장이지, 업계 1위를 차지하고 그걸 지키라는 게 아니셨잖아. 사실 우리가 성심, 한성 물산 한 번 잡아보자고 했던 것도 업계 1위 타이틀 때문이 아닌, 당시 흐름자체가 그런 타겟이라도 잡지 않으면 힘들었기 때문이었지, 진짜 업계 1위를 하자는 건 아니었어. 하다보니 업계 1위가 된 거지, 이게 우리의 목표는 아니란 말이야. 물론 1위를 하다가 2위로 밀려나면 그 기분은 상당히 참담할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작년보다 나은 매출, 내년엔 올해보다 나은 매출을 올릴 수 있다면 우린 잘하고 있는 거야. 내가 이 말 전하려고 차장급까지 다 부른 거야. 사장님 전달사항이거든. 동요하지마라.”
그 순간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무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상무보는 정말 고민없는 얼굴로 두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를 내게 보냈다.
“지금 사장님께서 제일 우려하고 계시는 건 CGM 그 놈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확정이 난 게 없는 상태에서 지레 겁을 먹고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을까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놈들이 진짜로 들어오면 또 뭐 좀 어때? 한 번 붙어보는 거지, 뭐. 자신들 없냐?”
“자신은 무슨...그 놈들이 어디 뭐 IMF보다 무섭겠습니까, 환율보다 무섭겠습니까? 기껏해봐야 우리보다 덩치 조금 더 큰 기업일 뿐인데, 우리가 언제 우리보다 덩치 작은 기업들이랑 경쟁해본 적 있습니까? 항상 우리보다 큰 기업들이랑만 붙어왔지.”
“바로 그거지.”
이 노땅들이 펼치는 처절한 격려.
그럼에도 노땅들의 저력이 가슴에 와닿는다.
“사장님이 마지막으로 이 한 말씀 덧붙이셨다.”
모두는 전무님의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린 반칙하지 말자.”
“...!”
“반칙하지 말고 우린 그냥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 더 잘하려고 몸에 힘 넣지 말고, 지레 겁먹어서 몸 무겁게 만들지도 말고 그냥 현재 하는 거 그대로 계속 해달라시는 당부. 사장님은 무엇보다 직원들 가오가 중요하신 분이잖아. 그런데 여기서 사장님 말씀에 내가 이 한마디만 딱 덧붙이자. 받은 건 꼭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려줘라.”
참 재밌게도 그때부터 전무님은 다른 사람들 다 놔두고 나만 쳐다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직원들 빼가는 거? 뭐 그럴 수 있다고 봐. 자기들도 시스템 갖추고 뭐하고 하려면 경력직들 많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회사 입장에서도 CGM놈들보다 좋은 대우도 못해주면서 의리로 남아있어달란 염치없는 소리 같은 건 안하고 싶고. 그런데 그 적당히라는 선을 넘어가 버리면 그때부턴 반칙이 되는 거야. 반칙하는 놈들을 상대로 우리만 정정당당하게 페어플레이를 할 수는 없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