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쌩깠죠, 그냥
너무 오래 한 자리에, 그것도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켜주실 줄 알았던 박 부장이었다.
그런데 홍성의 로고가 들어간 플라스틱 감사용 박스 두 개가 영업부로 도착했고, 박 부장이 직접 그 안으로 자신의 사무용품들을 담기 시작하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장 차장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고, 결재를 받고 나오는 김 팀장 역시 그동안 차장 승진으로 들떠있던 기분이 싹 사라져 있었다.
“진짜 시간 빠르네.”
곧바로 자기네 사무실로 가지 않고 잠시 우리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김 팀장.
그는 부장, 차장 공간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이제야 진짜 실감이 나네요.”
“다 거뒀어?”
“네, 여기...”
난 책상 서랍을 열어 그 안에서 상품권 봉투 묶음을 꺼내 김 팀장에게 전달했다.
부장이 임원 승진을 할 때 부서원들이 조금씩 돈을 거둬 선물을 해주는 전통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입사한 이래로 영업부에서 임원 승진을 한 부장은 박 부장이 처음이니까.
잘은 몰라도 다른 부서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있기야 하겠지만, 정말 극히 드문 케이스.
부장까지야 어떻게든 꾸역꾸역 올라가겠지만, 사실 거기서 임원 계약까지 올라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니까.
우린 그 힘든 일을 해내고,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자극과 희망을 주고 떠날 준비를 하는 박 부장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인턴, 계약직, 평사원 까지는 딱히 그 감동이 덜할 것이기에 제외를 시키고 대리 직급 이상부터 백화점 상품권을 조금씩 거뒀다.
하는 일이 백화점, 대형 아웃렛을 상대하는 일이다보니 명절이나 연말이면 선물로 상품권이 참 많이 들어온다.
일종의 영업맨들을 위한 품위 유지비 명목인 것인데, 우린 그 상품권으로 홍성 디스카운트까지 받아가며 그렇게 우리가 취급하는 브랜드 매장에서 옷과 구두, 그리고 서류 가방, 벨트 등을 산다.
박 부장이 영업 이사 타이틀을 달고 첫 출근을 할 때를 대비해 그를 위한 고급 정장을 한 벌 맞춰주기로 했다.
장 차장과 나, 그리고 김 팀장과 손 팀장이 부담을 거의 다 했고, 그래도 그 성의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다른 팀장과 대리급의 상품권도 함께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김 팀장이 출근과 동시에 박 부장의 자리 위로 우리 영업부 전직원들의 응원과 감사함을 담은 정장 한 벌을 꽃다발과 함께 올려놓았다.
회사의 성격상 가장 많은 파워를 부여받고 그와 동시에 책임감과 부담을 모두 떠안아야 하는 영업부.
그곳의 수장으로 오래 있으면서 참 많은 성과를 만들어내신 분이다.
우린 그 성과를 감히 업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고.
영업부 사무실을 떠나는 마지막까지 영업부의 조직도를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어놓고자 애를 쓰신 분이다.
성격이 조금 불같고 시도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꼰대끼 가득한 사자후가 조금 지랄맞아서 그렇지, 사실 박 부장 같은 상사 밑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건 복이다.
회사의 입장이 아닌, 한 명의 샐러리맨, 그의 부하 직원의 입장에서 그는 크게 흠잡을 곳이 없는 리더였고, 또 닮고 싶은, 마땅히 그렇게 해아하는 가장 바람직한 부장상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최고의 대장이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영업부 전체 회식 자리에서 박 부장은 영업부 경비가 아닌 자신의 사비로 1차를 쏘겠다고 말했다.
“어이고 많이 나올 건데...그럼 어쩔 수 없이 더 먹어야겠네?”
양 대리의 장난에 순간 폭소가 터져나왔고, 그럼에도 박 부장은 이혼당할 각오하고 쏘는 거니까, 영업부 실적으로 자신의 노후를 책임지란 은근한 부담감을 농담으로 희석시키고 있었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영업부의 덩치가 무척 크다.
해외 사업부까지 해외 영업부로 편입이 되면서 인턴 수까지 다 합치면 그 규모가 50명이 훌쩍 넘는다.
거기다 주량이 무기인 사람들 아닌가.
이렇게 작정하고 마셔도 되는 전체 회식날이면 이모님 소주 한 병이요, 두 병이요 하는 식으로 술을 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만만한 고깃집 하나를 통째 빌려놓고, 술 냉장고를 거덜내 버린다.
나중에 가서 술이 술을 마시는 지경에 이르면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은 술까지 마시는 경지에 오르기도 하니까.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신의 홍성 2라운드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부장님!”
“이사님, 인마.”
“들어가십시오, 이사님!”
“들어가십시오!”
비틀거리는 박 부장을 택시에 태워, 그 옆으로 우리 모두가 한마음으로 준비한 그의 정장과 꽃다발을 넣어주고 그렇게 우린 그를...보냈다.
50명이 넘는 인원이 차도에 우르르 모여, 이제 막 떠나는 택시의 뒤에 대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
술이 조금 취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이런 맛으로 지랄맞은 직장생활 하는 거지.
이런 기분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부하 직원들 다 보는 앞에서 상사에게 개털리고, 그런데도 짬 차이 얼마 안나는 부하 직원들은 겉넘을 기회만 엿보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짬 차이 많이 나는 부하 직원들은 내 기준에선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고 우리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개선된 사무실 문화에 자기네 세대의,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도 안되는 외국 기업의 표준만을 예로들며 그걸 또 어이없게 주장한다.
그럼에도 우린 그럴 거면 그냥 그런 문화가 잘 갖춰진 외국계 기업에 취직을 하지 왜 홍성으로 왔냐는 빈정거림 한 번 제대로 해주지 못한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하나같이 나쁜놈들 뿐이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면 하나같이 멍청한 놈들 뿐인 거 같아서 항상 외롭고도 지랄맞은 직장 생활.
그래도 이런 분위기 연출 한 번이면 다시 또 일주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것이지.
“누구 2차 갈 사람 있어?”
그 와중에도 영업부 안의 서열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 차장이었다.
장 차장은 영업부 법인 카드를 내게 건네며 자신은 먼저 들어가보겠다고 했다.
김 팀장과 손 팀장이 아닌 내 손에 들어온 법인 카드.
순간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될 뻔 했던 걸 김 팀장이 요령껏 무마시킨다.
“아이고, 나도 가야지. 노땅들 끼면 재미 없잖아? 손 팀장.”
“네.”
“흐음...나랑 둘이 오랜만에 소주나 한 잔 할까?”
“좋죠.”
그렇게 장 차장이 떠난 이후, 김 팀장과 손 팀장 역시 택시 한 대에 같이 타고 떠났다.
그리고 나 역시 장 차장에게 건네받은 법인 카드를 양 대리에게 넘겨주며 먼저 가보겠다고 말했다.
“나도 먼저 들어가볼테니까 편하게들 마셔요. 집에 가야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잡지 말고.”
그렇게 택시 한 대가 내 앞으로 멈춰섰을 때였다.
해외 영업부 문 대리가 서둘러 택시 뒷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민망했다.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건지.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장님.”
그냥 이런 기분이었다.
마치 동네 꼬맹이들끼리 모여 골목대장 놀이를 하는...
꼭 역할을 나눠 소꼽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넌 차장, 난 팀장이야.
자, 다들 잘 봤지? 내가 애를 차장 대우 해주니까 앞으로 너네들도 날 팀장 대우해줘야 돼...하는 식의.
그리고 그녀가 열어준 차에 올라 영업부 직원들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 사이 들려온 그들의 인사소리.
“들어가십시오, 차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차장님!”
“좋은 밤 되십시오, 차장님!”
차장이라...기분이 참 좋네.
박 부장이 떠나고 그 자리에 장 부장이 새로 자리를 잡은 영업부.
짧은 시간안에 참 많은 변화가 온다.
우선 영업 마케팅부와 영업 기획부의 사무실이 분리된다.
영업 마케팅부가 기존의 영업부 사무실을 통째 쓰기 시작했고, 영업 기획부는 해외 사업부가 쓰던 사무실 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장 부장은 단독으로 부장 사무실을 쓰기 시작했고, 김 차장의 책상은 영업 마케팅부 정 중앙으로 자리잡게 된다.
명함상으로만 미리 한 승진이었지만, 어느새 공 차장이라는 타이틀이 더이상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즈음이었다.
매우 익숙한 글로벌 컨트롤 기업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게 된다.
의외였다.
홍성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공룡같은 패션 유통 컨트롤 기업 CGM.
독일 기업이다.
그곳에서 나란 사람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도 의외였는데, 그 메일이 한국 사람으로부터 온 메일이라 더 놀라웠다.
그리고 그 메일의 가장 끝에 달려있는 포멧 직함에 한국 사업부 지부장 장교실이라는 타이틀과 이름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건 충격이었다.
“뭐? CGM 한국 사업부?”
“네, 여기...”
그리고 난 그 메일을 출력해서 장 차장에게 보여줬다.
물론 장 차장은 화들짝 놀랐고.
“이 새끼들 진짜 한국 들어오는 모양이네?”
“이거 반칙 아닙니까? 이렇게 소리 소문없이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소리 소문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
“하지만 그동안 잠잠했잖아요.”
“씨발...그러니까 말이야. 우와, 이 새끼들 진짜 고단수네?”
“이정도로 조용히 들어와서 지부를 틀었다는 건...”
“작정한 거지, 뭐. 그리고 네가 이런 메일을 받았다는 건 그 상대가 뭐건 본격적으로 스카웃을 시작하겠단 소리고. 업계가 발칵 뒤집어지겠네.”
타이밍이 참 절묘하다.
어떻게 박 부장이 임원 연수를 가기가 무섭게 곧바로 이런 초대박 사건이 터지는 걸까?
CGM은 한마디로 패션 유통 쪽으로는 아마존 같은 기업이다.
CGM이 들어오는 순간 한국의 어지간한 컨트롤 기업은 다 죽는다고 봐야한다.
그걸 막아보겠다고 그동안 국내 많은 컨트롤 기업들이 백화점 본점을 상대로 얼마나 많은 약을 쳐왔던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장 부장.
하지만 이내 다시 침착을 되찾고 내게 물었다.
“뭐라고 답장했는지...물어봐도 되냐?”
“답장은 무슨...쌩깠죠, 그냥.”
“크크크...미친놈.”
그쪽에선 내 타이틀이 여전히 팀장인줄 알고 있었다.
그런 걸 다 떠나서라도 굳이 지금의 안정됨을 포기하고 모험을 할 이유는 없는 것이고.
사실 어느정도 대략적인 스카웃 조건이라도 걸어놓았다면 관심이라도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쪽의 제안은 만나서 이야기나 한 번 해보지 않겠냐는 거였는데, 그럴 위험을 떠안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침묵을 하는 사람들 중엔 정말 이 내용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도, 그리고 나와 같은 메일을 받아 상황이 돌아가는 걸 관찰하기 위해 간질거리를 입을 억지로 막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 침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곧바로 해당 내용을 위로 보고한 장 부장.
회사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하는데, 아니 업계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힐 위기에 처해있는데 침묵이 유지될리가 있겠나.
우리같은 실무자들 입장에서야 팝콘각이다.
하지만 임원진들의 입장에선 똥줄이 타는 뉴스가 되는 거고.
급하게 임원 비상 대책 회의가 열린다.
이틀 정도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컨트롤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인맥이 있는 직원들을 통해 다른 기업들도 초 비상 모드에 들어가 있다는 정보가 쏙쏙 들어오기 시작한다.
-공 차장.
“네, 부장님.”
장 부장으로부터 걸려온 내선 전화.
지금 바로 자기자리로 올라와 달라고 했다.
다이어리 하나만 챙겨서 급하게 올라가니 전무님 주최 하에 비상 대책 회의가 또 열린다며, 이번엔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