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당신들은 도대체 뭐 했노?
너무 날 것의 무엇인가를 본 것 같았다.
날 것.
자켓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앞서 몇 차례 보여주셨던 것처럼 가벼운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다.
표정까지 가벼우셨으니까.
그래서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했다.
그런데 짧은 순간 사장님이 하신 말씀을 되새겨 보니까 한 마디, 한 마디에 뼈가 들어가 있었다.
장난이 걸려있는 표정 때문에 돌려 깐다는 느낌이 강했지, 눈을 감고 사장님이 하신 이야기만 들었다면 이건 그냥 대놓고 까신 거다.
그것도 웃는 얼굴로 그 자리에 모인 임원 모두를.
일명 모두까기.
제대로 먹이신 거지.
그리고 난 졸지에 프리젠테이션 담당자였단 이유로, 그 자리의 중심에 서있었단 이유로 겁을 먹는다.
설마 인사부장을 향한 핀잔이실까.
사장님과 인사부장 사이에 끼어있는 임원이 몇 명인데.
모두가 긴장을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긴장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게로 전염되었다.
“가져가라니까? 자. 자네들이 회사 돈을 그렇게까지 자기 돈처럼 신경을 써서 관리를 해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그러니까, 자. 내 돈 가져가서 파줘.”
다시 한 번 지갑을 흔들며 인사부장을 향해 날 것의 표정, 맹수의 본능을 꺼내보이시는 사장님.
그런데 여기서 더 대박은 바로 옆에 앉으신 전무님의 표정엔 여전히 여유가 남아있었다는 거다.
상무보에게 뭔가를 전달하던 전무님이 회의 테이블 위로 팔짱낀 두 팔꿈치를 올려놓으며 스탠드 마이크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얇은 마이크 대가리를 입술 근처로 갖다대며 한 말씀 하셨다.
“나는 지금 이 프로젝트가 초반 리스크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봤을 땐 법인을 정상화시키기에 적당한 프로젝트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진짜 헷갈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뭐지?
사장이 저렇게 전 임원들을 상대로 모두까기를 시전하고 있는데, 거기서 발언권을 가로채 대화 주제를 바꿔버린다?
그것도 전무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둘의 관계가 끈끈하다고는 해도, 이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날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장면은 사장님이 전무님의 커트를 용인해주고 계신다는 거다.
다시 한 번 피식하는 미소를 흘려놓고 쌉쌀하다는 듯 쓴 입맛을 다시며 회의 의자에 등을 기대시는 사장님.
그리고 전무님을 사이에 두고, 그 뒤에서 상무보에게 우린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뭔가 지시를 내리시는 거 같았다.
그 일련의 과정, 장면들이 정말 짧은 몇 초 사이에 다 벌어졌다.
“인사부장.”
절제된 음성으로 인사부장을 부른 전무님.
인사부장은 사장님이 날린 직격탄을 정면으로 맞은 이후, 시종일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2주 뒤에 영업부장 임원 연수 가잖아. 영업부장 자리 저대로 비워둘 거야? 우리같은 패션 상사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의 타이틀은 회사의 실탄이야. 그 실탄이 조금이라도 빌 거 같으면 어떻게든 빨리빨리 채워주는 게 인사부장이 할 일 아닌가? 승진 발표하고는 상관없이 내년 상반기 영업부 승진 대기자들 리스트 뽑아서 비즈니스 카드 제작 새로 들어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부터 시작해서 여기 모인 임원들 모두 반성해야 돼.”
갑자기 분위기가 엄숙하게 변해버린다.
그런데 느낄 수 있었다.
사장님이 차마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해온 팀장, 대리 앞에서 다 보여주지 못한 화를 전무님이 그런 식으로 대신 풀어주고 계신다는 걸.
“매뉴얼대로만 할 거면 다들 임원 딱지 내려놔야지. 임원 딱지 내려놓고 매뉴얼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없는 타이틀로 갈아타야 하지 않겠어? 그게 양심적인 거잖아.”
난 지금 어떻게 해야되는 걸까?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좁은 사회자 포션 뒤에라도 좀 숨어있고 싶었다.
당연히 날 향한 비난은 아니겠지만, 서 있는 자리가 자리인지라 전무님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모든 임원들의 눈초리가 내게 향하고 있는 거 같았다.
조온나 불편하네...하는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매뉴얼대로 하는 일이야 밑에 사람들이 다 하는 건데, 당신들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몸을 사려버리면 회사 입장에선 낭비지. 당신들한테 주는 월급 말이야. 차라리 그 돈으로 매뉴얼대로 움직여줄 젊고 빠릿빠릿한 경력직 사원 서너 명 더 뽑는 게 훨씬 남는 장사 아냐?”
“...”
“임원 쯤 달았음 그때부터 모가지 내놓고 매뉴얼을 잡고 흔들어줘야지. 그렇게 흔들다가 얻어걸리면 그게 매뉴얼 업데이트가 되는 거고. 위기다, 이 사람들아. 왜 그걸 감지를 못하나. 회사가 위기에 걸리면 자네들한테는 기회가 되는 거야. 수습하는 놈, 몸 사리는 놈, 현상 유지만 하겠다는 놈...이럴 땐 아무 필요가 없어요. 이럴 때 이때가 기회다 하고 치고 나가주는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도 없어? 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자네들이 해야할 일들을 저기 저 대리, 팀장들이 다 하고 있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
“...”
“상무보가 직접 팀 꾸려서 중국 법인 다녀오고, 현장 재정비 하는 동안 여기 있는 당신들은 도대체 뭐 했노? 눈치만 살피면 어디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아니, 씨바 이럴 거면 왜 프리젠테이션을 하라고 했지?
그냥 임원 회의를 따로 가지던가.
바로 그 순간 장 차장과 눈이 마주친다.
베베꼬으지 말고 자세를 바로 잡고 서있으라는 신호가 날아왔다.
난 입술을 모두 안으로 숨기며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열중 쉬어 자세로 가만히 서있었다.
“회사에 큰 불이 났는데, 가만히 자기 자리 지키고 앉아서 말이야...법인에서 터진 일이니 내 일 아니다, 그런 거야? 지금 우리 홍성을 업계 1위로 올려준 1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중국 법인이야. 부정할 수 있는 사람 있음 손 한 번 들어봐. 그런데도 옆 집에 난 불 구경하듯 걱정하는 시늉만 하고...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옆집에 불이 나면 소방차 오기 전에 다라이에 물이라도 받는다. 그게 정상 아냐? 지금까지 우리 다 그렇게 해왔잖아. 그렇게 지금의 홍성을 만든 거 아냐. 근데 요즘엔 다들 왜 그래? 그렇게 가만히 뒷짐지고 서서 입으로만 걱정을 할 거면 차라리 나가서 영업부에서 하는 일 데모도라도 쳐. 그럼 한심해보일지언정, 그냥 능력이 거기까지인가보다...하고 이해라도 해줄라니까.”
그렇게 난 임원들이 갈굼을 당하는 현장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똑같다.
일반 사원들 사무실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노골적이었다.
이곳은 임원들의 목숨이 계약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자리같았다.
“다들 말이야, 많이 가져가고 싶어하면서, 정작 몸은 게을러터졌어. 봐라, 이게...여기 있는 당신들이 홍성의 미래다. 답이 나오나? 난 오늘 이런 부족한 프리젠테이션이라도 없었다면 진짜 답이 없다고 본다.”
순간 난 나도 모르게 임원들의 입장이 되어본다.
아, 이런 거구나...
이래서 하루하루, 회의 한 번 한 번이 살얼음판이라고 하는 거구나...
사원들의 사무실에서 오고가는 과감없는 욕, 직격탄이 없다 뿐이지, 그 대화의 내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원 사무실 공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종의 협박에 가까운 압박이었다.
그리고 임원이라는 존재들은 밖에선 빛나 보일지언정, 자신들의 분야와는 상관없이 이런 자리에서는 입을 딱 다물고 그런 협박과 압박을 감수해내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근데 사장님 몸 불편하신 거 아닙니까?”
프리젠테이션을 다 끝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장 차장에게 조심히 물어봤다.
몸이 불편하셔서 매일같이 출근을 못하시고, 대략적인 건 재택 근무로 해결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누가 그래?”
“누가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오늘 보니까 사장님이 어디 아파 보이시더나?”
“아뇨, 그래서 좀 놀랐습니다.”
들고 있던 파일철로 내 가슴을 툭하고 때리며 장 차장이 말했다.
“우리 홍성처럼 2군 기업이 갑자기 업계 1위 타이틀을 달고 대기업이 되어버리잖아? 그럼 우린 모르는 윗선들의 암묵적 조직도가 함께 어그러질 수 밖에 없어.”
“...?”
“하꼬방 회사일 때부터 함께 사장님, 전무님과 동고동락하며 지금의 홍성을 만들어낸 초창기 맴버들. 무슨 수로 그런 사람들과 단박에 기계처럼 관계를 정리하겠나?”
“아...”
“힘들어.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보여준 사이 아니야. 얼마나 고맙고 또 후회스런 장면들이 많으시겠어? 그렇다고 회사가 지금 이렇게 커있는데, 구멍가게 시절처럼 운영할 순 없는 거고. 때론 애증관계로 발전된 사람들도 있을 거고, 또 때론 분배가 못마땅해 회사욕을 하며 떠난 사람도 있겠지. 그리고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간의 의리, 정 때문에 계속 붙어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복잡하지 않겠어? 그런 복잡한 관계들이 여전히 회사에 남아있는데 예전처럼 사장님이 맨날 회사에 나와서 얼굴을 보여주면, 그 위치에 대한 권위가 약해질 수 밖에. 완전 1군 대기업은 몰라도 우리 같은 회사는...상무보가 사장을 달기 전에 한 번은 거쳐야 할 진통같은 장면이야...라고 예전에 부장님한테 들었다.”
“푸흡...”
“그래서 가장 날카로운 전무님한테 회사의 파워를 몰빵해놓고, 사장님은 한 번씩 나오셔서 전무님을 터는 거지. 그것만큼 밑에 사람들 입장에선 무서운 게 없거든.”
사장님이 참석한 그 한 번의 프리젠테이션으로 회사에 기분좋은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유관부서 업무 협조가 이렇게 간편하게 이뤄진 적이 있었던가.
거짓말 같았다.
다음날 바로 무거운 박스 하나가 영업부로 배달되어 온다.
감리작업을 하는 디자인 팀에서 날아온 것으로 봐 사이니지나 배너일 줄 알았다.
그래서 뭔가 싶어 박기태를 시켜 가지고 와보라고 했다.
근데 웃으며 그 박스를 들던 박기태의 이마에 힘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뭔데 그래요?”
“명함이라고 적혀있는데요?”
명함이 단 하루만에 제작이 되어 도착했던 거다.
하긴 생각을 해보면 기본 디자인이 다 되어있는 회사 명함이 아닌가.
이름만 바꾸면 되는 건데 그동안 이 명함 하나 받는데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했을까?
그리고 그때부터 재무부장이 영업부를 제 집 드나들 듯 시도때도 없이 찾아온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통은 우리가 직접 찾아가야 한다.
그것도 큰 건이 아니면 며칠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그런데 그 콧대높은 재무부장이 아예 박 부장과 오전 시간을 같이 보낼 정도로 영업부에 눌러앉아 버린다.
영업 지원팀장 역시 갑자기 바빠진다.
평소엔 현수막 하나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넣으면 뭐는 이래서 안되고, 뭐는 또 이래서 안되고, 안된다며 안되는 이유를 찾아내는 게 자기 일이었던 지원팀장.
이젠 아예 내게 차장님이란 호칭까지 붙여가며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보기 시작한다.
“다들 조금 이상한 거 같지 않습니까?”
“왜?”
장 차장은 오히려 표정 관리에 들어가느라 웃지도 않았다.
“다들 왜 저렇게 의욕적입니까?”
“누가 홍성에 돈 벌어다 주냐?”
“우리 영업부죠.”
“이게 정상이야. 그동안이 약간 비정상이었던 거고.”
“...”
“그날 프리젠테이션 이후로 전무님이 우리 부장님한테 작정하고 힘 실어주고 계시잖아. 다들 잘 보여야지. 임원 단 순서랑은 상관없이 그래도 파워만 놓고 보면 이사중에선 가장 끗발이 높은 게 바로 영업 이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