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72화 (72/325)

# 72

큰 돈 드는 거 아니잖아

“나는 참 운이 좋다.”

“왜?”

“당신 같은 여자가 나랑 결혼을 해준다니까 말이야.”

이런 기름진 대사, 사실 부산 남자 입장에서는 좀처럼 치기 힘든 대사다.

그런데 내 진심이 그랬다.

그리고 이상하게 이 여자한테는 이런 진심을 숨기기 보다 생각날 때마다 표현해줘야 할 거 같았고.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응.”

“나돈데.”

습관처럼 사이드 기어에 올려놓은 손 위로 강혜선의 손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손등을 살짝살짝 긁으며 강혜선이 말했다.

“나도 당신이란 남자를 만날 수 있어서 참 운이 좋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살아온 성장 환경이 달랐던 나와 강혜선.

그녀는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내가 운전하는데 지루하지 않도록 꽤 재밌는 자신의 성장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니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아 참 많이 싸우면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서로에 대한 경쟁심도 많았고, 지금의 강혜선과 처형의 모습을 보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서로 머리채를 잡아끌며 몸 싸움을 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뭔가를 항상 언니와 나눠 쓰거나 물려받아 써야했던 강혜선.

그리고 자신의 것을 항상 동생과 나눠 쓰고 양보해야 했던 처형.

“난 그런 건 없었어. 누나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잖아. 오히려 난 엄마가 둘인 환경에서 자랐던 거 같아. 누나가 내겐 또다른 의미의 엄마였거든. 어머니가 일을 하셨잖아. 지금도 하시지만. 아버지랑 같이 수선집을 하시느라 당신 어머니처럼 집안 살림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형편이었거든.”

“그랬겠죠.”

“그래서 난 누나에 대한 고마움이 클 수 밖에 없는 거 같네. 어머니가 밖에 나가 일을 하시느라 챙겨주지 못하시는 것들 대부분을 누나가 다 채워줬었거든. 학원, 대학, 어학연수 같은 거 고민할 때에도 거의 난 누나가 옆에서 다 챙겨줬었어.”

“아...그랬겠네.”

“나도 알지. 나처럼 부모, 형제들한테 집착하는 스타일이 남편감으로는 참 피곤하고 별로라는 거.”

“아닌데? 누가 그래요?”

“그런데 난 그럴 수 밖에 없는 거 같아. 당신 그거 알아?”

“뭐요?”

“난 살면서 단 한 번도 어머니, 아버지한테 맞아본 적이 없어.”

“진짜?”

강혜선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응,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래. 대신 누나한테는 참 많이 맞았어. 그냥 나한테 있어 누나, 매형이란 존재는 약간 부모님 같은 존재야. 누나한테 혼나면 매형이 괜찮다 해주시고...”

“나는...당신이 참 고마워요.”

“내가? 내가 뭘 해줬다고.”

“항상 당신이 먼저 고백해서 내가 안심하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잖아.”

“...?”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 사는 거 다 고만고만한 거 아는데, 그래도 내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더 편할 때. 그리고 막상 내 이야기를 해야할 때가 오면 어디까지 숨기고 이야기를 해야할지 난감할 때.”

“그럴 때 있지.”

“난 그런 거 당신이랑 나 사이에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비밀, 약점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런 거 내가 먼저 이야기 하는 게 조금 불안했거든.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당신이 먼저 해주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 같은 그런 기분.”

“그런 기분 뭔지 알지.”

“그러니까. 그런데 당신은 항상 먼저 내가 당신 앞에 솔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잖아.”

“그런가?”

“응, 그래요. 당신 그거 모르죠. 왜 우리 엄마, 아빠가 당신을 예뻐하는지.”

그러면서 처형에 관련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강혜선이었다.

“언니 임신해 있었을 때...형부 여자 있었다?”

“헐...진짜?”

“그걸 들켰어.”

처음 강혜선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눈길조차 받지 못하고, 또 무슨 말만 하면 핀잔 비슷한 소리만 듣던 그녀의 형부 모습이 떠올랐다.

내 기억 속 강혜선의 형부는 뭔가에 쫓기듯 사위의 역할을 다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애는 쓰는데, 힘이 많이 들어가서 표정과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강했고, 그래서 이상하게 강혜선의 부모님과 섞이지 못하는 물과 기름같다는 느낌을 받게 했었다.

“그때 말했잖아, 상견례 자리에서 엄마가 살짝 그 결혼 틀 작정까지 했다고. 시부모 자리도 별나요. 그래도 딸이 이 남자 아니면 안된다고 하니까, 그리고 또 의사잖아. 그래서 허락을 해줬던 건데 아니나 다를까, 언니 임신해 있는 동안 병원 간호사하고 바람이 나버리네?”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좀이 아니지. 나 그때 형부 다신 안본다 그랬어. 물론 언니 봐서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는 거지만.”

“흐음...”

“본인이 같이 살겠다고 하니까. 또 어쨌든 엄마, 아빠 입장에선 딸 남편이고 손주 아빠잖아요. 그래요. 그래서 우리 엄마, 아빠가 당신을 특히 더 챙기는 거예요. 당신은 안 그럴 거라 믿고 싶은 거지.”

우리 부모님과 다르게 강혜선의 집은 줄곧 장인어른 혼자 밖에 나가 경제 활동을 하시고, 장모님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억척같이 살림을 사셨던 분들이다.

그러면서 딸 둘을 바르게 키우신 분들이고.

그와 반대로 우리집은 어머니가 살짝 대장부 기질이 강하시다.

장모님처럼 가계부 같은 걸 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고, 손도 크시며, 뭔가 하나를 결정 하시더라도 가격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크고 좋은 것들을 고르시는 분이다.

난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

오히려 강혜선에 비해 학창 시절엔 경제적으로 더 풍족하게 자랐고, 모든 게 다 내 것이란 생각, 뭔가를 절약하고 또 내 것을 누군가와 나눠 쓴다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다.

거기다 매형의 지갑만큼 열기 쉬운 지갑이 또 있었을까?

부모님께 받는 용돈 보다 한 번씩 매형한테 받는 용돈이 더 컸던 나였다.

그리고 또 생각을 해보면, 만약 우리 집에 매형의 사업 실패라는 어두운 그릠자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집 형편이 강혜선 집 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더 나았을 거다.

그런데 그 빈자리를 로또가 채워주고 있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참 운이 좋다...당신 같은 남자를 만나서. 당신이 나한테 로또 당첨되고, 그걸로 산 아파트 이야기 했던 날 있잖아.”

“응.”

“나 그날 태어나서 그렇게 안전한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안심이 되더라.”

“크크큭...”

“당신한테 아파트가 하나 있다, 없다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가진 생각이 날 안전하게 만들어줬던 거 같아요. 그런 큰 돈이 생겼는데도 들 뜨지 않고 오히려 침착하게 생각하고 자기 일을 계속 하고 있는 당신 모습에 난 너무 감사했던 거 같아요. 나한텐 그런 당신이 로또지. 그래서 바로 결심했지. 이 남자 무조건 잡아야 한다. 히히히...”

간질간질한 연애초기 단계.

나와 강혜선은 그런 밀당의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곧바로 결혼이란 약속을 전제로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럼에도 우린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달달한 연애 감정은 어지간히 다 누리고 있는 거 같았다.

수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충전을 시켜가며 통화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카톡 메시지 한두 개에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멀리 둘이서만 떠나는 여행 한 번 같이 해보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멀고 흥미진진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 결혼이란 여행의 계획을 꼼꼼히 세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었다.

노 코스트 데이트.

이게 은근히 재미가 있는 데이트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나와 강혜선은 그때부터 백화점이라는 백화점은 한군데도 빼놓지 않고 다 돌아다닌다.

하는 건 마땅히 없다.

그냥 신혼집에 넣을 가구, 가전 제품들의 가격을 비교하러 다니는 거였다.

지금 당장 살 것도 아니다.

천천히 비교할만큼 다 비교해보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가격이 나는 곳에서 구입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상상을 한다.

우리의 신혼집을.

들어가는 돈이라고는 밥값과 커피값 정도가 전부인 데이트인데,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포만감은 그 어떤 데이트보다 더 풍만했다.

“아무래도 전자제품은 한 곳에서 묶음으로 사는 게 훨씬 더 싸겠어. 인터넷이랑 비교를 해봐도 여기서 신혼 패키지로 한 방에 사는 게 더 싼 거 같아요.”

“그러니까.”

“여긴 신한카드 5퍼센트 할인도 준다잖아.”

그렇게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가며 몇만 원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에 과장된 희열을 느끼며 또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고마운 상대인지를 확인하는 나와 강혜선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주 기분 좋은 긴장감이 회사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H.I 편집샵과 나크리스의 연이은 대박.

그리고 시작부터 전국 87군데 매장을 확보해 이미 대박이 확정된 Kidshub(명품 아동복 편집샵 브랜드)의 뒤를 이을 해외 영업팀의 프로젝트에 사장님이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신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중국통으로 오래 계시면서, 다른 사업들에 비해 유독 중국 법인 관련 사업에 큰 애착을 보이시는 사장님이다.

회사엔 일주일에 한 번이나 출근을 하실까 싶을 정도로 일반 사원 입장에선 그림자조차 발견하기 힘든 사장님.

그 사장님이 직접 해외 영업부 프로젝트 프리젠테이션에 참관을 하시겠단 뜻을 내비치셨다.

긴장?

사장님이 참관을 한다고 해서 쓸데없는 긴장하지 말고 그냥 하던대로 발표를 하라는 장 차장.

하지만 난 오히려 재미가 있었지,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그냥 신기했던 거 같다.

내가 사장님이 앞에 계시는 자리에서 프리젠테이션 발표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막 극적인 발표는 아니었지만, 준비한 내용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제대로 프로젝트의 핵심을 다 설명했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그렇게 발표가 다 끝이나고 앞으로 나와 임원진들을 향해 고개를 숙일 때였다.

“팀장이라고?”

“네, 사장님. 영업 기획부 공은태 입니다.”

전무님이 차가운 겨울같은 분이시라면, 사장님은 화사한 봄과 같은 분이셨다.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를 놓지 않으셨고, 가끔가다 딱히 재밌는 건 아니었지만 전사적 회의라는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농담도 툭툭 던질 줄 아는 분이셨다.

“이걸 팀장 포지션이 다 컨트롤 할 수 있을까? 이거 총괄은 지금 누가 하는 건가?”

장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사부장의 해명.

“내년 상반기 인사 때 둘 다 부장, 차장 진급을 준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 그거야. 나도 들었어, 영업부 전반적으로 대대적인 인사가 있을 거라는 것 정도는. 우리 홍성이 언제부터 회사에 돈 벌어다주는 영업맨들의 타이틀에 그렇게 인색했나?”

인사부장이 당황해서 끼고있던 안경태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는 동안 사장석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전무님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얼굴에 띄워놓고 상무보의 앞에 놓인 서류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상무보는 전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고.

“명함 하나 새로 파주는데 큰 돈 들어?”

“...”

“안에서 자네들끼리 쓰는 호칭이야 알아서들 하고 말이야. 대외적으로는 그런 게 아니지. 그래도 명색이 홍성 이름을 달고 이정도 사이즈 나오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데, 그 타이틀이 차장, 팀장이면 가오가 안 살잖아.”

그러면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자켓 안주머니에서 장 지갑을 꺼내시는 사장님이었다.

“내 돈 줄까?”

“...”

“자, 자, 가져가. 내 돈 줄테니까 얼른 명함 하나씩 새로 파줘라. 거래 업체 입장에서 자기네 회사 운명이 달린 일에 차장, 팀장, 대리가 찾아온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무시하나 싶을 거 아냐. 그래도 홍성 부장, 차장, 팀장이 직접 움직인다고 하면 아쉬운대로 어느정도는 대우를 받는단 느낌이 들지 않겠냐고. 밖에 나가서 회사 돈 벌어다 준다고 전쟁하는 친구들이야. 그럼 그 친구들 가오 정도는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챙겨줘야지. 어차피 올릴 거였다면 말이야. 큰 돈 드는 거 아니잖아.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조심들을 하나. 그렇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들은 신경도 안써서 법인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놓고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