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그게 당신의 수갑이 되어선 안되잖아
장모님의 생신이 다가오고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강혜선으로부터 귀띔이 있었다.
그러실 줄은 알았지만, 역시나 가족들 다같이 모여서 하는 식사 자리에 날 초대하겠다 하셨고, 식사는 집이 아닌 괜찮은 한정식당에서 하는 걸로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핑계로 오랜만에 가족들 다같이 모여 분위기를 내고싶으셨던 거겠지.
원래는 그냥 집에서 간단하게 생일상을 차려놓고, 아침이나 저녁 식사를 다같이 하는 모양이었는데, 앞으로 어머님 생신 땐 무조건 나가서 먹는 걸로 하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제 어르신들 두 분 모두 나이가 드셨고, 또 강혜선이나 그녀의 언니가 딱히 생일상을 맛깔나게 차리는 실력이 못 되어서 어머님이 직접 본인의 생일상을 차려왔는데, 그게 귀찮으시단다.
남편, 자식들 생일상은 직접 차려도 본인의 생일상은 조금 마음 편하게 받고 싶으신 거겠지.
“이번에 루가노로 출장가는 인원이 있는데, 가는 길에 장모님 드릴 가방 하나 사다달라고 부탁해보는 건 어떨까?”
어떤 선물을 준비해드려야 할지 꽤 고민이었다.
강혜선은 현금만한 선물이 어디에 있겠냐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거기서 사면 많이 싸?”
“원래도 싼데, 우리 직원이 가서 사면 좀 더 싸게 살 수 있긴 하지.”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야? 나중에 회사에서 문제 생기는 거 아냐?”
“으으음...그런 거 아냐. 어디 뭐 나쁜짓 하는 건가? 내 돈 주고 내가 필요한 거 사는 건데. 한 번씩 루가노나 만토바 같은데 출장 갈 일 있는 사람들한테 필요한 거 부탁하는 건 기본이야.”
“얼마나 싼데?”
“브랜드에 따라 다 다른데 어지간한 브랜드는 한국 면세점에서 하나 살 돈으로 거기가면 세 개 정도는 사. 가방이니까 그거 보다는 조금 더 줘야하긴 하겠다.”
처형 되는 집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걱정만 없으면 내 입장에선 큰 무리가 없는 선물이다.
그래서 내가 이런 아이디어를 하나 낸다.
“이참에 당신 거랑 언니 것도 하나 씩 내가 해줄게.”
“돈 많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단칼에 핀잔을 주는 강혜선이었다.
“응, 돈 많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하지만 내 생각은 이런 거였다.
사치를 하겠다는 게 절대 아니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내 쪽에서도 어느정도 성의는 보여드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
정말 이렇게 쉽게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결혼.
혼수, 예단...이런 건 일체 안하기로 했다.
결혼할 때 남자집에서 준비해줘야 하는 신부 보석 3종 세트 이런 것도 안하기로 했고.
거기다 더 구체적인 부분은 상견례를 하면서 조율을 해봐야 하겠지만, 일단 결혼식 역시 버스를 대절해 서울까지 올라와야하는 우리집 쪽 하객에 맞춰서 규모를 정해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우리집에서야 당연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고, 강혜선의 부모님 역시 그런 형식적인 것들에 쓸 돈으로 신혼집 준비에 집중을 하라는 입장이셨다.
처음엔 그 모든 배려가 너무나 감사했는데, 점점 결혼 이야기가 구체화되면서 왜 내가 굳이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되려하는 것일까란 의문이 들기 시작했던 거 같다.
나만 염치가 없으면 상관이 없는 건데, 아무래도 결혼이라는 과제는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기에 자칫 우리 부모님까지 염치가 없는 분들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절약은 하되, 염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형편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이유는 없었다.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다가 나오신 분이 거기서 받은 퇴직금으로 편의점을 차려 카운터를 보고 계시던 모습.
물론 보기에는 좋았다.
뭐라도 할 일이 있으신 거니까.
그런데 그런 것과는 별개로 그렇게 일평생 한 기업에 몸담아 일하시며 딸 자식 둘 시집 밑천까지 마련해주시고, 그게 행복이고 당신의 책임을 다했다 여기는 게 왜 당연한 것일까...란 생각.
그렇게 귀하게 키우신 딸을 너무 염치없게 달라고 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
결혼자금으로 1억을 보태주신다고 하셨다.
거절할 수 없었던 게 그건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건 강혜선의 부모님이 당신들의 딸에게 주는 것이지, 나에게 주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관여해선 안되는 부분이라고 처음부터 선을 그었던 거 같다.
사실 뭐 신혼집 구하는 거야, 전세가 아니라 강혜선이 꼭 사서 가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더라도 그쪽 부모님 도움 없이 마음만 먹으면 14억 짜리 아파트 담보로 대출을 내어 얼마든지 매입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강혜선은 그 1억을 받기를 원했다.
아니, 원했다가 아니라 안 받으면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우리집과는 다르게 자매들끼리는 그런 은근한 질투심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언니가 받았으니 나도 받아야 된다...하는 그런 조금은 유치한 질투심.
물론 그 질투심엔 그만큼 형편이 괜찮은 집이라는 배경이 깔려있는 것일 거고.
그리고 난 처음부터 예단 혼수 같은 부분을 다 생략하고 신혼집과 거기 들어갈 살림까지 다 돈을 합쳐서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감사한 마음도 컸고.
마음 편하게 결혼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부분에 대한 감사의 표시 정도는 부족하나마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정도도 안해버리면...우리 부모님 얼굴을 깎아내리는 염치가 될 거 같았으니까.
내 입장을 전해들은 강혜선은 그제야 그런 이유라면 나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루가노 폭스타운 출장을 준비하고 있던 안 대리와 박기태에게 개인적인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을 좀 했다.
그런데...
그런데 현타를 한 번 제대로, 아주 진하게...찌이이이인하게 맞는 일이 생겨버린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젠 뭐 대한민국에 가을이란 날씨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된 거 같다.
바로 얼마 전 추석이 지나고 조금 쌀쌀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 즈음 열린 장모님 생신 자리에서 센스있는 생일 선물로 참 많은 칭찬을 들었다.
더군다나 뜬금없는 가방 선물을 받게 된 처형 되시는 분이 백퍼센트, 아니, 백십퍼센트 내 사람이 되어주셨다.
그렇게 난 처가 쪽에 사랑받는 예비 사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장인 어른이 강혜선과 내게 부산에 다시 내려가서 상견례 날짜를 받아오라고 하셨다.
“전화 통화로 물어보지말고, 내려가서 얼굴 비추고 어?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쭤 봐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주에 강혜선을 데리고 부산에 내려갔는데, 전혀 생각도 못했던 그림을 보고 현타를 맞게 된다.
현재 부모님과 누나 내외, 아영이가 사는 집은 외관은 완전 신식인데, 그래도 지어진지 20년이 다되어 가는 집이다.
부산 마린시티가 형성될 때 같이 올라갔던 아파트다.
집 내부는 약간 구식이다.
그래도 나름 부산에선 메이커가 있는 아파트고.
세탁실이 안쪽으로 좁게 만들어져 있는데, 오랜만에 부산 부모님 집에 와서 식사를 하다보니 조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아무리 강혜선이 옆에 있어도 이제 그정도 편한 모습은 서로에게 다 들킨 상태라 큰 문제될 건 없었고.
파자마 같은 게 있으면 하나만 달라고 했는데, 누나가 세탁실로 쓰고 있는 베란다에 나가보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이상한 물건을 하나 발견한다.
내복. 남성 타이즈.
사실 부산이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나.
거기다 아버지는 체질상 몸에 열이 많으셔서 평생을 타이즈 같은 건 안 입어보신 분이고.
딱 봐도 매형의 타이즈였다.
“매형 타이즈 입나?”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없이 없었다.
누나한테 그렇게 물어보니까, 누나가 하는 말이...
“어.”
“이 날씨에?”
“그래도 새벽에 춥다이가.”
“...”
전혀 생각을 못했던 거지.
재래 시장 야간 경비 일을 하고 있는 매형.
그래서 매번 강혜선을 데리고 올 때마다 가족들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을 못하는 매형.
그 재래 시장 야간 경비 일이라는 걸 직접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보지도 못한 매형의 근무 환경이 계속 눈 앞에 아른 거렸다.
스토브 같은 게 하나 있다고 한다.
그걸 틀어놓으면 따뜻한데, 또 너무 오래 틀어놓으면 내부가 건조해져서 천식이 있는 매형에겐 안좋다고.
그래서 가끔씩 그 스토브를 끄고 환기를 시켜야 하는데, 그럴 때 춥기 때문에 타이즈를 꼭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짜증이 확 밀려들어왔다.
뭐라도 매형이 일을 해서 참 좋은데, 더이상 집에만 있지 않고 뭐라도 하러 나가서 참 반가운데, 왜 하필이면 이런 이야기를 내가 들어야 하는 것일까란 짜증...
사실 짜증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그래서 현타가 찾아왔던 거 같다.
나란 인간, 참 나쁜 놈인 거 같다는 생각에.
로또에 걸려 여유가 생겼으면서도, 그런 매형과 누나를 외면하고 있는 지금의 난 참 나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회사 사람들, 처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바른 사람, 괜찮은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이쁨을 받기 위해 얼굴에 가면을 쓰면서, 정작 내 가족들에게 난 왜 이렇게 모질지? 하는 생각...
그런 내 갑갑함을 강혜선에게 들켰던 모양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
내 모든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았지만, 알아서 내 모든 모습을 살펴주는 사람.
그런 강혜선에게 어쩌면 이번 기회에 진짜 내 바닥이란 걸 다 들키게 된 거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하고 그랬다.
다음날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전 강혜선이 아영이가 공부하는 독서실에 잠시 찾아가자고 했다.
“거긴 왜?”
“항상 그랬다며?”
“뭐가?”
“서울 올라가기 전에 아영이랑 같이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 불러서 맛있는 거 사주고 올라갔다며? 예전에 당신 매형이 당신한테 해줬던 것처럼.”
“...”
“가자.”
그날 강혜선이 돈을 참 많이 쓴다.
롯데 백화점 온천점에서 아영이와 아영이 친구들을 불러 스파게티를 사주는 자리에서 아영이가 쓰던 스마트 폰을 유심히 살피던 강혜선이었다.
핑계는 카톡 친구를 맺자는 거였는데, 그렇게 아영이의 스마트 폰을 만지다가 “기계 바꿔야겠다.” 라는 말을 한다.
그러더니 “이거 먹고 나가서 새거 하나 사자.” 라고 한다.
나도 놀랐지만, 아영이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숙모가 하나 사줄게.”
“아니요, 괜찮은데요.”
“하나 사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거든요?”
아영이 녀석의 친구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리고 난 그 녀석들의 얼굴에서 오래전 부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던 혁재, 지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짠순이 강혜선이 진짜 아영이를 데리고 가서 최신 기종 가장 비싼 스마트 폰을 사버린다.
옆에서 난 가만히 보고만 있었고.
그렇게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내가 왜 그랬냐고 물었다.
내가 해줘도 되는 건데, 안 그래도 곧 고등학교 올라가서 입학 선물로 내가 해주려고 했던 거였는데, 왜 그랬냐고.
그랬더니 강혜선이 이런 말을 했다.
“딱 거기까지.”
“뭐가?”
“난 당신이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겠어. 물론 내 바람이야. 당신이 더 하겠다고 해도 상관은 없어요.”
“...”
“응원해줄거야. 하지만...더 큰 부담을 가지지는 마요, 누님, 그리고 매형한테.”
“...!”
“당신이 어렸을 때 당신 매형이 당신한테 해줬다는 것들? 그거 다 내가 아영이한테 해줄게. 나중에 아영이 대학 들어가면 어학 연수까지는 당신이 시켜주고 싶다며? 그거 내가 준비해줄게. 그럼 되잖아? 당신이 받았던 것들에서 내가 이자까지 붙여서 조금 더 아영이한테 해줄게.”
난 입을 꼬옥 다문채 코로 바람을 내뿜었다.
“앞으로 나랑 50년 더 같이 살아야 돼요, 당신. 근데 그 50년 동안 당신이 매형한테 뭔가를 계속 받기만 했던 시절 속에 계속 갇혀 있을 거예요? 그건 나까지 숨 막히는 거지. 매형과 좋았던 기억, 추억들이 지금의 당신을 있게 만들어줬다고 믿는 건 좋은데...그게 당신의 수갑이 되어선 안되잖아.”
“...그렇네.”
“나 못 믿어? 나 이런 거 완전 잘해요. 여우라며. 나더러 곰같은 여우라며. 맞아. 나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요령껏 잘 챙길테니까...당신은 더이상 미안해하지 마요, 당신과 당신 매형의 추억한테. 그럴 이유 없어. 그건 당신 매형도 안 원할 거 같은데?”
“과연 그럴까?”
“아니면 또 뭐 어쩔 거야? 당신은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이상 뭘 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