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하던대로 해, 하던대로
“흐음...”
장 차장의 표정이 영 별로다.
좋아할 줄 알았다.
이번에도 꽤 괜찮은 아이템을 물어왔다고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장 차장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꼭 “이번 건은 좀 실망인데?” 하는 듯,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돌려서 표현하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커미션 장사를 하자?”
“노 코스트 입니다. 그리고 중국 법인쪽 맨파워가 제대로 갖춰질 때까지 시간을 조금 벌어주자는 의미도 포함이 됩니다.”
“흐음...”
이 대답이 더 실망이라는 듯한 표정.
뭐지?
이정도면 진짜 괜찮은 아이템 아닌가?
나 역시 일주일 넘게 문 대리가 올린 기획안을 눈에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살피고 또 살폈었다.
이정도면 단타성으로는 노 프로핏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꽤 재밌는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노 리스크 사업이다.
“뭔데? 줘봐, 나도 한 번 보자.”
그래, 박 부장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보자.
파티션 넘어에서 박 부장이 손을 뻗었고, 난 장 차장이 고개를 갸웃거린 기획안을 박 부장에게 건넸다.
한 10초 정도 됐나?
어쩌면 그보다 더 짧았을 수도 있다.
과연 기획안을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 싶을 정도로 짧게 훑던 박 부장이 더는 볼 것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모르겠다. 너희끼리 알아서 해라.”
무척 홀가분한 표정의 박 부장.
지금부턴 자신이 아닌 장 차장의 영업부고 자신은 곧 갈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얼마전부터 진하게 풍겨대던 박 부장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은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생각을 해봐도 장 차장의 생각처럼 이건 좀 아닌 거 같다는 거였다.
“나는 잠시 마실이나 좀 나갔다 오련다.”
아주 그냥 세상 속 편한 사람의 모습으로 현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와 장 차장을 남겨놓고 자리를 피해버린 박 부장.
임원 연수를 앞두고 때론 복잡한 심정, 또 때로는 말년 휴가를 복귀한 병장처럼 모든 게 홀가분한 사람처럼 한 발씩 영업부로부터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그였기에 딱히 놀라울 것도 없었다.
“문 대리...좀 불러와봐. 아니다. 그냥 회의실 하나 잡아.”
“...”
“두 사람한테 해줄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11층에 있는 사원전용 회의실.
“문 대리, 이거 문 대리 프로젝트 아니지?”
장 차장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문 대리에게 물었다.
그 물음엔 확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문 대리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난 그 짧은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내가 놓쳐선 안될 것을 놓치고 해외 영업부의 사기를 위해 기획안에만 모든 정신을 팔아놓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누구 프로젝트였어?”
“박 팀장 프로젝트였습니다.”
“흐음...문 대리가 박 팀장 밑에서 일했었나?”
“...네.”
“박 팀장이 만든 프로젝트였다...”
“아이디어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디테일을 잡은 건 저였습니다.”
장 차장은 알만 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꽤 오래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를 새끼 손가락으로 난처하게 긁적이며 침묵을 깨뜨렸다.
“첫 단독 프로젝트?”
“네.”
“문 대리 이름으로 진행하자고 했을 거고?”
“...네.”
“애착이 강할 수 밖에 없겠네. 근데 이거 하면 안돼.”
“...”
“이거 커버용이야.”
“커버용이요?”
“그러니까...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돼? 쉽게 말해서 감사 대비 커버용이라고.”
쉽게 이해가 안되는 걸로 봐선 그만큼 복잡한 계산이 들어간 프로젝트였단 말이겠지.
“물론 법인 쪽 비리가 터지지 않았다면 별 의심없이 통과할 수 있었을 프로젝트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게 무슨...”
“노 프로핏 비즈니스...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냐. 박 팀장이 문 대리한테 말은 그렇게 했겠지. 길게 보고 들어가는 프로젝트라고. 그런 말 하지 않았어?”
“...네, 그랬던 거 같아요.”
“당연히 그렇게 말했겠지. 꼭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그런 뉘앙스로 문 대리가 이 프로젝트 자체에 기대를 하게 만들었겠지.”
“...?”
“법인 쪽과 본사 해외 사업부쪽에서 비리에 연루됐던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을 보면 다들 하나같이 마진 낙차가 컸어. 인정해?”
“...네.”
“그 부분에 대한 커버용이었다고. 이걸 역으로 생각을 해보면 이런 거야. 지금 문 대리가 올린 이 기획안을 메인으로 둔갑시켜놓고, 그동안 법인과 해외 사업부가 해왔던 낙차 큰 마진 베이스의 당위성을 확보하려고 했던...상식적으로 그렇잖아. 이런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선 다른 아이템에서 프로핏을 많이 남기는 수 밖에 없잖아.”
“...!”
“아웃당한 사람들 중에 억울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 사람들이 어디 회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그쪽으로 한 번 발 담군 거, 아예 이성줄을 놓는 거지. 마약이야. 쉽게 돈 버는 맛을 봤는데, 어디 이성이 살아있겠나. 자기들도 알아. 언젠간 걸린다. 고로 정년까지 갈 회사는 아니다. 그럼?”
“그럼?”
“최대한 빨리 해먹고 나가자. 도박을 하게 되는 거지.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그 도박을 위한 포커페이스인 거고. 공 팀장, 문 대리.”
“네.”
“네.”
“자, 내가 설명한 거 떠올리면서 다시 이 기획안 뜯어봐. 어떤 느낌이야?”
나와 문 대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일주일의 수고가 다시 본 기획안으로 인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순간 난 지하주차장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을 한 번만 살려달라고 했던 박 팀장의 절실한 얼굴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자신은 온 핸즈 온스 건으로 2퍼센트 밖에 먹은 게 없다며, 그것도 자신이 먹겠다고 먹은 게 아니라, 당시 법인 본부장이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로 챙겨줘서 먹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던 그 얼굴.
정말 소름이 돋았다.
“문 대리는 올라가 보고.”
“네.”
문 대리가 나간 뒤 한참동안 장 차장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맛만 다셨다.
“야, 인마. 공 팀장.”
“네.”
“너까지 중심 못 잡으면 안되지.”
“...죄송합니다.”
“이게 지금 얼마나 쪽팔리는 거냐?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뻔히 보이는 걸 그것도 제대로 못 보고.”
할 말이 없었다.
“많이 급했냐?”
“하아...정신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걸 핑계라고 대냐?”
“...죄송합니다.”
“생판 모르는 부서를 떠안게 돼서 심리적으로 급해진 거 이해하는데, 그래도 네 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은 판단하고 커트를 해줘야지.”
그리고 또 잠시 침묵 뒤 이런 말을 흘린다.
“하긴, 그건 내 욕심이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혼을 냈으면 모르겠는데, 나란 사람을 의지했던 자신의 실수라는 뉘앙스에 자존심이 갈라지고 있었다.
“한참 프로젝트 짜내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시기에 판단하고 평가를 해야 하는 위치에 올라갔으니 부담감이 남들보다 더 클 수 밖에 더 있겠어? 자, 이거 잘 봐라.”
이건 또 뭘까.
기획안을 내 쪽으로 돌려서 밀어주는 장 차장.
그리고 자켓 안주머니에서 꺼낸 볼펜으로 하나하나 체크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 뭐냐?”
“죽어있는 국산 브랜드를 중국 기업에 넘겨주고 중개료를 받는 겁니다.”
“여기서 걸리는 부분은?”
“...”
“모르면 모르겠다고 해.”
“모르겠습니다.”
“우리 홍성 쯤 되면 사회적 윤리라는 게 있어요.”
순간 과외를 받는 줄 알았다.
“아무리 돈도 좋지만 한국 사람들의 뱀심 만큼은 피해야 돼. 요즘 뭐 인터넷으로 검색 안되는 거 뭐가 있어?”
“...”
“국산 브랜드를 중국에 팔아 넘긴다? 이거 은근히 안좋게 보는 사람들 많다? 사업적 내용과는 별개로 우리 한국 브랜드인데, 왜 중국에 넘겨?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 떠벌리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야. 까려면 밑도끝도 없이 계속 깔 수 있는 부분이고. 너 아닌 말로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현대 자동차가 중국에 넘어가서 중국 브랜드가 됐다고 생각해봐라. 기분 좋냐?”
“...아뇨.”
“네 회사 아니라도 기분 별로 안 좋잖아. 그런 거라니까.”
“네.”
“근데 이게 재밌네.”
장 차장은 뜬금없이 백종원표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하지 않았던 식당에서 의외의 맛을 발견했을 때 백종원이 짓는 웃음.
“여기서 이것만 걷어내면 어쩌면...아니 어쩌면이 아니다.”
“...”
“대박 치겠다.”
“어떻게...”
“문 대리가 그래도 일을 잘하네. 죽어있는 브랜드들 리스트를 아주 훌륭하게 잘 뽑아왔어. 하나, 둘, 셋...열 일곱 개. 이거 다 마음만 먹으면 인수 할 수 있는 회사들이야?”
“일단 미팅 자리를 마련할 수는 있는 회사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더 좋고. 홍성이 자금줄을 조금만 터 주면 공장을 돌릴 수 있는 브랜드들 위주로 다시 추려봐라.”
“그건 또 뭐 때문에...”
“선주문 넣어주면 되잖아. 그럼 어떻게든 공장은 돌릴 수 있을 거 아냐. 우리 입장에선 마진 베이스 제대로 떨어뜨려서 물건 받을 수 있는 거고.”
“아...”
“어차피 지금 중국 법인 여성복 브랜드 다 철수시켜야 되잖아.”
“...네.”
“거기에 이 브랜드들 넣으면 되지. 우리가 지금 공장 돌릴 수 있는 자금줄을 선지급으로 터주겠다는데 중국 라이센스가 문제야? 중국 라이센스 뿐 아니라 해외 라이센스 자체를 따낼 수도 있는 거야, 공 팀장 네가 딜만 잘 치면.”
속으로 상황과는 전혀 달리 18...이라는 욕이 계속 솟구쳐 올랐다.
당연히 장 차장을 향한 욕은 아니었다.
그냥...난 왜 이런 걸 지난 일주일간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 하는 짜증에 솟구쳐 오른 욕이었다.
“중국 법인은 그렇게 돌리는 게 더 낫지 않겠나? 어차피 유통 채널이야 확보가 된 상태잖아.”
그리고 딱 일주일 뒤, 정확하게 일주일 뒤 상무보가 나와 장 차장을 동시에 호출한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장 차장이 그 건을 박 부장을 거친 다음 다이렉트로 상무보에게 보고했다는 걸.
“공 팀장님, 이번에도 또 한 건 하셨네요? 전무님이 프리젠테이션 준비해보라고 하시네요.”
“이건 제가...”
이건 내 아이디어가 아니라 장 차장의 아이디어라는 걸 말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날 보며 엄한 표정으로 장 차장이 나의 입을 막아버린다.
“이야...진짜 이러니 내가 탐이 안 날 수가 있나.”
“그거...”
이건 좀 아닌 거 같았다.
그래서 장 차장이 무슨 엄한 표정을 하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걸 말하려고 하는데, 장 차장이 또 내 앞을 막았다.
“지금 공 팀장 정도 되면 그냥 아이디어가 샘솟을 때입니다. 뭘 해도 되는 타이밍에 딱 걸려있는 거죠.”
“뭘 해도 되는 타이밍이다...그렇네. 딱 그런 거 같네요. 아무튼 공 팀장님은 지금 내려가서 이거 프리젠테이션 준비해주세요.”
“...네.”
상무보 몰래 얼른 내려가라는 신호를 주는 장 차장.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상무보 방에서 내려온 장 차장에게 내가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 차장은 피식하고 웃으며 담배나 한 대 같이 피러가자고 했다.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 저번에 상무보 만나러 가서 이상한 소리 했다며?”
“제가요?”
“뭐 장 차장이 어떻고 저떻고...낯 간지럽게 막 나 띄워줬다며?”
“누가 그럽니까?”
“누구긴 누구야 상무보가 그러더만. 그날 너랑 이야기 하고 나 따로 부르시더라고. 같이 소주 한 잔 했다.”
“아...”
“야, 인마. 설마하니 내가 너한테 묻어가겠냐?”
“아니, 전 그런 의도로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또 빚지고는 못 살거든. 그건 또 자존심이 허락을 안해요.”
“...”
“그리고 은태야.”
“...네.”
“부장 정도 되면...그때부터는 내가 잘하는 건 아무 의미없다. 내가 스타가 되어선 안되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사실 팀장때부터 지금까지 스타 플레이어로 뛸 만큼 뛰었고.”
“...”
“근데 내가 요즘 진짜 걱정이 되는 게 뭔지 아냐?”
“뭡니까?”
“네가 차장 된다고 쓸데없는 부담감을 너무 많이 안고 있는 거 같다는 거야. 차장 달면 이런 일을 해야되고, 부장 달면 이런 일을 해야된다...그런 게 어딨냐?”
“후우...”
난 하늘을 쳐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그거 다 옛날 말이다. 요즘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 자리의 퀄리티를 결정짓는 세상이야. 하던대로 해, 하던대로. 뒤는 내가 다 봐줄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