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그게 더 저한테는 모욕 아닙니까?
“하다보니 거기까지 하게 된 거지...근데 그건 와?”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하면 느그회사 임원한테 물어봐야지, 전혀 다른 계통에 있었던 내한테 물어본다고 어디 답이 나오나? 와? 인자 결혼 할 생각하니까 이것저것 욕심이 생기나?”
어쩌다보니 아버님께 상무보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전달하게 됐다.
어쩌다보니가 아니다.
사실...약간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회사에서 이만큼 인정 받으며 일하고 있습니다...하는 식의 자랑을 그렇게 돌려서 했던 거 같다.
그리고 내심 회사 사람이 아닌 다른 인생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기도 했고.
“잘했네. 참 잘했다.”
“그렇죠?”
“응, 잘한기다. 영업하던 사람이 그 비서실 가서 뭐 할낀데? 업무 성격 자체가 완전 상반된다이가. 느그 회사 사장 아들이라는 그 친구는 내가 봤을 때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 니 그거 한다고 했으면 입장 난처해질 뻔했다.”
“왜...”
“비서실은 안있나, 완성된 사람들이 가는데다. 완전 쫄따구들이 아닌 다음에는. 삼성 사장단들 봐라. 전신에 다 비서실 출신 아이가. 근데 영업 하던 사람을 덜렁 거기 앉혀놓고 뭘 기대하겠노?”
“그러니까요. 저도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까 내한테 어떻게 임원까지 해먹고 나올 수 있었냐고 물었제?”
“...네.”
“때를 판단해라.”
때를 판단해라...무슨 말일까?
“니는 영업적인 센스, 사람 상대하는 기본 틀이 잘 잡혀있어가 딴 거 이야기 해 줄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딱 이것만 명심하면 니는 어지간하면 임원까지 해먹지 싶다. 때를 잘 판단해라. 때는 기다리는 게 아니다. 지금이 때일 수도 있는 기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든 시간이 그 때였을 수도 있는 기다. 그리고 암만 기다리도 안 올 수도 있는 기고. 그걸 판단할 줄 알아야 된다.”
뭐라고 하시는 거지?
“니 바로 위에 있다는 정 차장이라는 사람...”
“장 차장이요.”
“장이나 정이나. 아무튼 그 사람 뒤에 바짝 붙어 있어라. 저 위에서 올리주는 거 말고 그 양반이 끌어주는데까지가 딱 니 위치다. 니 위치를 더 올리고 싶으면 니가 그 양반 뒤에 바짝 달라붙어가 그 양반 위치를 더 올리뿌라. 그 양반이 니가 봤을 때 그정도로 실력이 있는 양반이라면. 그라고 니한테 그럴 실력이 있다면...”
“...”
“그렇게 있다가 니 위에 그 양반이 정체된다 싶으면...그런데도 이상하게 니는 좀 더 올라갈 수 있겠다 싶으면 그때가서 치고 나가면 되는 거고.”
“...네.”
“임원은 있제...해보니까 뻐댈때까지 뻐대다가 다는 게 제일 좋은 거 같다. 물론 너무 늦게 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너무 일찍 다는 건 더 별로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내가 했던 직장 생활을 돌이켜보면 부장까지가 참 재미가 있었다. 내년에 차장 단다고 했제?”
“네.”
“인자 마 한 몇 년 본격적으로 일하는 게 재미가 있어질끼다.”
“...”
“그래도...일만 한다고 앞으로 꾸리게 될 가정에 소홀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잘 할끼라고 본다.”
그리고 다음날.
해외 사업부의 문 대리가 날 찾아왔다.
또각또각 거리는 그녀의 힐 굽 소리가 은근히 거슬렸지만, 의도한 소리가 아니란 걸 알기에 지적하기가 애매했다.
“팀장님, 이거 진행하셔야 되는 겁니다.”
내 책상 위로 올려놓은 하나의 기획안.
난 그녀가 올려놓은 기획안이 아니라 조급해하는 그녀의 표정에 더 관심을 보였다.
난 문 대리를 빤히 쳐다봤고,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음성이 지나치게 절박했단 걸 눈치챈 듯 음성을 가다듬었다.
“이건 법인 쪽에서 나왔던 비리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프로젝트입니다.”
“저한테는 그걸 따져볼 시간이라는 게 필요하죠.”
“하지만 기존에 상대 업체쪽과 잡았던 약속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냥...이곳 본사에서 다이렉트로 브랜드를 매각하길 희망하는 한국 업체와 중국에 있는 매입 희망 업체를 이어주고 커미션을 받는 게 전부인 프로젝트입니다.”
“그 약속...조금만 뒤로 미루면 안됩니까?”
“아니...”
“왜 그렇게 급하세요?”
“...”
“이 프로젝트 박살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박살이 나도 그 책임은 지금부터 저한테 있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중간에서 브랜드 매매 중개만 하는 건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세요? 프로핏도 거의 안나오는 노 가성비, 노가다 프로젝트 아닙니까. 난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는데, 제가 잘못 파악한 부분이 있나요?”
“하지만...”
“좀 천천히 가면 안됩니까?”
“언제까지...”
“...?”
“해외 사업부에 남아있는 직원들이 언제까지 이런 은근한 분위기 속에서 의심을 받아야하는 건가요? 그동안 저희가 했던 모든 프로젝트가 의심을 받는 거 같아서...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저희 팀원들 모두 상당히 모욕감을 받고 있습니다. 비리를 저질렀던 사람들의 그림자 모두를 저희가 다 떠안게 된 거 같아서요.”
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채 의자 등받이 깊숙히 등을 기댔다.
삐꺽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리고 문 대리를 쳐다봤다.
“비리에 연루되지 않은...그래서 여전히 해외 사업부에 남아 있는 저희 팀원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의심을 받아야하고 또 어느 프로젝트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감수해야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부당합니다.”
“그걸 왜 그렇게 해석을 하시죠?”
“이 프로젝트만 벌써 3일째 검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팀장님 말씀대로 노 프로핏에 가까운 프로젝트입니다. 그만큼 깨끗한 프로젝트고요.”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단 생각은 왜 안 해주십니까?”
“...”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노 프로핏 프로젝트에 문 대리가 이렇게 열을 올리는 이유를. 그게 고작 사인 하나 해주는데 3일이나 걸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
“문 대리가 진행하고 있었던 이 프로젝트에 비리가 있단 의심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동안 해외 사업부가 진행해오던 업무에 아직 제가 적응을 못해서 시간이 걸리고 있는 거라고요. 거래 업체들과의 상관관계를 좀 따져봅시다, 나도. 그래야 왜 문 대리가 지금 이렇게까지 절박한지를 알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거 하나 제대로 설명을 안해주고, 차장 대리라 그정도는 당연히 알아야지...하는 식으로 꼭 싸우자는 사람처럼 사인만 계속 바라면 저더러 뭘 어쩌라는 겁니까?”
일부러 언성이 살짝 올렸다.
그리고 그 언성에 같은 사무실을 쓰던 모든 직원들은 숨소리까지 죽였고.
내가 팀장을 달기 전까지는 직함이 아닌 서로 이름을 부르던 사이였다.
은태 씨, 가은 씨...이렇게.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유관부서 업무 동조 차원으로 친분은 두터웠던 관계.
이제 그 상대를 유관부서 동료가 아닌 부하직원으로 둬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적지 않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이라면 제대로 해야하는 거니까...
“왜 이렇게 재촉을 하십니까? 제가 천잽니까? 전혀 몰랐던,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그래서 그런 프로젝트가 있었는 줄도 몰랐던 사람한테 고작 차장 대리 달았다고 마치 오랫동안 해왔던 업무처럼 능숙하게 판단하고 여기에 내 사인을 넣으라고 하면 그게 더 저한테는 모욕 아닙니까? 저 그렇게 뛰어난 사람 아닙니다.”
“...”
“그리고 상대 업체는 현재 우리 회사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까? 고작 며칠 더 기다려줄 여유조차 없는 업체를 상대로 왜 우리가 노 프로핏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합니까? 기다리세요. 나도...숨 좀 쉽시다.”
며칠 뒤 영업 기획부 팀장 미팅자리.
일부러 가장 구석진 자리로 자리를 잡고 앉은 문 대리.
양 대리가 문 대리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내가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으로 얼른 바꾸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해요, 문 대리. 해외 영업부 일로 미팅을 하자고 한 건데, 문 대리가 중간에 와 앉아야지.”
미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대리가 이런 말을 한다.
그 말을 꺼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거 같았다.
“진행중이던 모든 프로젝트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게 좋을 거 같습니다.”
문 대리는 한숨을 들키기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런 문 대리 앞으로 며칠 전까지 잡고 있었던 기획안을 건넸다.
그리고 보는 앞에서 사인을 해줬다.
“다른 프로젝트 다 스톱하고 이거부터 진행합시다.”
“팀장님...”
“안 대리님이 그러더라고요. 이건 무조건 해야하는 거라고. 맞나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조심히 입을 여는 문 대리.
“네, 허락만 해주신다면요.”
“그럼 이 프로젝트부터 하나씩, 하나씩 진행하면서 기존 해외 사업부 시스템을 해외 영업부에 맞는 시스템으로 새롭게 잡아봅시다. 그게 더이상 모욕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판단이 들었습니다. 해외 영업부가 모욕을 받았다는 건 곧 우리 영업 기획부 전체가 모욕을 받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절대 안될 말이죠. 양 대리님?”
“네, 팀장님.”
“양 대리님도 현재 맨파워 부족한 거 아는데...”
“알고 있습니다. 이지혜 보내서 해외 영업부 서류 보고 체계부터 새로 다 잡아주도록 하겠습니다.”
해외 영업부.
부장, 차장은 물론이고 팀장 둘까지 모두 아웃을 당했다.
가장 선임 대리였던 문 대리가 차고 나가야 하는 부서가 되어버린 해외 영업부.
사실 내 입장에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참 난감한 부서였다.
영업 이사 진급을 코 앞에 둔 박 부장.
그는 해외 영업부를 내게 떠넘기며 전년 해외 사업부 전체 매출의 마이너스 90퍼센트까지 커버를 쳐주겠단 약속을 한다.
싹 다 걷어내란 말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하란 소리였고.
기존에 중국 법인에서 컨트롤을 했던 국산 여성복 브랜드 모두 마진 베이스를 새로 잡겠다는 이유로 일시 중지를 시킨다.
해당 브랜드에서 볼멘 소리 조차 낼 수 없는 게 해외 사업부가 저지른 모든 비리에 그들 역시 다 연루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에이전트를 찾을 수도 없다.
계약이 그렇다.
중국 수출 중지를 시킨거지 계약을 파기한 건 아니니까.
중국 현지 에이전트들로부터 날이 선 컴플레인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온다.
어째서 추가 주문을 받아주지 않느냐고.
기다리라고 했다.
중국 법인과 여러 중소규모 에이전트들 사이에 있었던 비리를 모두 공개하며, 현재 그 에이전트들을 상대로 홍성 법인이 진행중인 국제 소송에 대한 이야기도 전달했다.
다른 파트너를 찾아도 좋다고 솔직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 홍성은 그 부분에 대해 그 어떤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입장이란 말과 함께 앞으로 최소 한 달 정도는 체질 개선이 필요하단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 새롭게 영업 기획부로 편입된 해외 영업부 직원들과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새로운 대박 아이템을 준비했다.
10년, 20년 전 쯤 한국에서 인지도가 꽤 괜찮게 있었던 중저가 브랜드들...
하지만 쥐도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춰버린 브랜드들...
브랜드 라이센스는 유지하고 있지만 자금 고갈로 더이상 공장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그 브랜드들...
그 브랜드들을 중국 기업들에게 매입을 하도록 소개해주는 프로젝트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중국 법인.
그곳 나름대로 자생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선 법인의 맨파워가 크게 필요없는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한 때 한국에서 크게 달아올랐던 라피도라는 스포츠웨어 브랜드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죠, 몇 년 전에 중국 기업에 넘어갔잖아요.”
“얼마에 넘어간지 아십니까?”
“글쎄요...”
“그걸 중개했던 업체가 커미션으로 얼마를 챙겼는지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문 대리.”
“네, 팀장님.”
“그냥 말을 해요, 얼마 벌었다고. 왜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고 그래?”
“푸흡...제가 그랬나요?”
“웃기는...아, 그래서 커미션으로 얼마나 받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