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그렇게 해야한다고 배웠습니다
몇 가지 연출이 필요하다.
결국은 사람 관계니까.
화장실에서 머리와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뒤 곧바로 상무보를 찾아가지 않고 박 부장과 장 차장을 먼저 찾았다.
그리고 상무보의 직접적인 호출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만들었다.
박 부장이야 상관없다.
어차피 다음달이면 임원 연수를 가는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장 차장은 다르지.
앞으로 영업부 전체를 이끌어갈 대장이고 또 앞으로도 여전히 나의 직속 상사로 있을 존재이니까.
내 직장 생활이 앞으로도 쭉 지금과 같이 탄탄대로가 되기 위해선 누구보다 장 차장의 신뢰를 확실히 사고 또 그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건 본능이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너무나 당연한 거다.
의도치않게 상무보란 존재로 인해 나와 장 차장 사이에 거리가 생기게 되면 양쪽 모두 피를 본다.
내가 무엇을 위해 장 차장의 앞으로 서겠나.
의미없는 그림이다.
“부장님 이거 한 번만 확인해주십시오.”
“이게 뭔데?”
“왜 출장 때 상무보님이 체크하라고 하셨던 부분...”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신 거 아냐? 어차피 감사팀에서 할 거잖아.”
“저도 이제 영업부 일 봐야죠. 밀려있는 게 많습니다. 한 며칠 법인쪽 때문에 제 할 일을 전혀 못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셨더라도 일단 하라고 하신 거 다 끝내놓고 깔끔한 마음으로 최대한 빨리 제 업무로 복귀하고 싶습니다.”
“비품 관련 코스트였지?”
“네.”
“벌써 끝났어?”
“끝나고 자시고 할 게 있습니까, 어디. 어차피 비품이야 다 노코스트 아닙니다. 추가 쇼핑백 코스트 정도만 확인하면 되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래도 좀 꼼꼼히 확인을 해보고 올려야지. 예민한 상황이야, 지금.”
“그래서 가지고 온 겁니다. 확인 한 번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놔두고 가봐.”
“그게 아니라...”
난처한 표정을 지어선 안된다.
그러는 순간 내 난처한 표정이 내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의심을 만들어낼테니까.
“조금 전에 상무보님 호출이 있으셨습니다.”
장 차장을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묘한 시선이 느껴지는 건 기분탓일까?
“사무실로 잠깐 올라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마도 이거 때문에 호출하신 거 같습니다.”
딱 여기까지만 하면 내 입장은 충분히 보여준 거 같다.
그리고 누구보다 나란 사람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장 차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업무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맞겠지, 뭐. 얼른 올라가봐.”
“네.”
난 박 부장과 장 차장 앞으로 차례대로 고개를 숙인 뒤 상무보를 만나러 갔다.
이런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지나치게 부풀려 걱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일전에 금일봉을 전달 때도 그렇고 이상하게 상무보가 나와 자기 사이에 장 차장을 건너뛰려고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 입장에선 부담이지.
난 상무보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장 차장과 일을 해야하는 사람인데, 계속 그 사이 장 차장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건너뛰려고 하니까 불편함이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군대에서 일 잘하는 일병을 편애하는 경험 부족한 소대장을 만난 느낌이랄까.
기분은 좋은데, 기분이 좋은 만큼 상병과 병장들에 대한 불편함도 함께 커지는 기분.
그 상병과 병장들이 내가 잡아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고만고만한 인물들이라면 에라이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도박이라도 해보겠지만, 장 차장이라는 존재는 아직은 내게 벽이다.
장 차장은 내가 묻어가면서 계속해서 그의 노하우와 영업 아이템을 구별하는 선구안, 판단력, 리더쉽 등을 배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의지를 해야하는 존재인데, 그 존재를 불편하게 만들어 내게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싶은 거지.
“차나 한 잔 같이 하자고 불렀어요.”
상무보의 첫마디였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내가 들고온 파일철을 눈짓하며 그게 뭐냐고 물었고, 난 출장 마지막 날 따로 주문하셨던 비품 코스트 관련 서류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상무보는 그걸 벌써 끝냈냐는 듯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고, 난 아직은 계약직인 이지혜의 이름을 거론했다.
일전에 장향은이 처음 우리팀으로 오면서 약간의 헤프닝이 있었는데, 그때 이지혜가 만든 포멧 덕분에 서류 관리가 무척이나 수월하게 이뤄지고 있다면서, 어떤 부분을 확인하고 싶다고 하셔도 10분 안이면 어지간한 건 다 바로 찾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진짜 일 잘하네.”
“아닙니다.”
“다른 팀들도 그렇게 서류 관리를 하나요?”
“장 차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영업부 전팀이 같은 포멧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장 차장을 물고 가야한다.
그리고 내 앞에 세워야 한다.
내 앞에 장 차장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는데, 그 스타를 쏙 빼먹고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벌써부터 받는 건 싫었다.
세상 편한 부분대장으로 가능하면 꿀을 빨며 말년까지 군생활을 하고싶지, 골치아픈 분대장 완장을 벌써부터 차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단 말인가.
국수처럼 길고 가늘게...그러면서도 내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
이미 매달 200만원이 넘는 공짜 수입을 가져다주는 14억짜리 아파트와 그 아파트를 함께 관리해줄 강혜선이라는 든든한 인생 파트너가 생긴 지금의 난 회사로부터 뭔가를 더 받아내려고 무리수를 둘 이유도 없고 또 쓸데없는 욕심을 품을 이유도 없다.
그냥 지금 이 패턴으로 안전하게 정년까지 직장 생활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안전한 정년을 위해선 내 앞에 언제까지고 장 차장이 서있어 줘야 한다.
내가 그린 그림은 그렇다.
로또가 내게 노예 해방을 허락해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스스로 회사, 관계의 노예가 되겠다고 예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장 차장님...믿음직스런 분이시죠.”
상무보가 찻잔에 입술을 붙인채 인정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에 비해 과소평가 되고 계신 분이기도 합니다.”
“과소평가? 장 차장님도 다른 분들에 비해 승진이 빠른편 아닌가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승진이 인정의 모든 척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 부장님이 보통 분이십니까. 그런 박 부장님 옆에 계시면서 단 한 번도 박 부장님이 실수를 안하시게끔 만든 존재가 바로 장 차장님이시죠. 차장이라는 포지션 자체가 서포팅을 하는 포지션이어서 그렇지, 앞으로 부장 승진하고 나면...정말 대단하실 겁니다.”
“보기 좋네요.”
“...”
“이렇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겠다고 자신의 능력에 겸손하려고 하는 끈끈한 부서가 우리 회사에 있다는 게 고마울 지경이네요. 그리고 그 부서가 회사의 핵심인 영업부라 더 기대가 되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해야한다고 배웠다...”
“...네. 장 차장님이 항상 가지고 계신 직장관입니다.”
“장 차장님 부럽다. 이렇게 뒤에서 대놓고 띄워주는 부하직원도 다 있고. 내가 생각이 짧았네. 공 팀장님 지금 이 자리 은근히 부담스럽겠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공 팀장이 의외로 어려운 사람이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원하는 게 없는 사람만큼 어려운 사람은 없죠. 뭘 원하는지를 모르겠네.”
“...”
“중국에서 공 팀장이 참 예리하고 꼼꼼한 눈썰미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비서실로 와서 앞으로는 그 꼼꼼한 눈썰미로 내 사람이 한 번 되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뭘 원하는지를 모르겠으니 어떤 미끼를 어떻게 던져야할지 감이 안오네요.”
그저 난 미소만 지었다.
때론 금일봉보다, 그냥 형식상 하는 연봉 협상이 아닌 그 자리에서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몸값을 한 번 정도는 물어봐주고 진행을 하는 것 보다, 예상치 못한 승진이 이뤄지는 것보다...이런 인정의 한 마디가 더 큰 동기 부여가 되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상무보가...참 좋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월급받는 입장에 있는 나지만, 그런 상무보가 조금 더 갈리고 갈려, 닳고 닳아 꽤 괜찮은 사장이 되어주길 속으로 응원하기 시작했던 거 같다.
“부담을 주긴 싫어. 일 잘하고 있는 사람한테 괜한 바람을 넣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그래도 지금 내가 여기서 한 제안...생각은 한 번 해봐요. 나쁘지 않잖아, 비서실...”
그 뒤엔 어차피 머지않아 내가 사장이 될 건데...하는 말이 숨어 있는 거 같았다.
“지금 바로 옮기자는 것도 아니고, 체계가 바뀐 영업부가 어느정도 안정화가 되면 그때 가서 천천히...길게 보고 나랑 같이 가자는 말이에요, 내 말은.”
“...네, 길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잡하네.”
“뭐가...”
“막상 또 지금 공 팀장이랑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회사의 근간은 영업부잖아.”
“...그렇죠. 뭐라도 팔아서 돈을 만들어야죠.”
“그러니까요. 그런 영업부가 어쩌면 역대급 맨파워를 갖춰갈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여기에 변화를 줘도 되나...하는 그런 생각이 드네. 이거 진짜 생각이 많아진다. 행복한 고민이네. 하하하. 알았어요. 내려가서 일 봐요.”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저녁 강혜선의 아버지, 그러니까 예비 장인 어른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된다.
우연히 만났다.
강혜선을 알게 된 이후로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이 편의점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담배를 보루로 사기 시작했다.
가급적이면 아는 집에 가서 팔아주는 게 좋지 않나.
그 아는 집이 처가가 될 집이라면 더더욱 그런 거고.
고작 한 갑을 사겠다고 그 편의점까지 찾아갔던 건 아니고, 언제부턴가 그 앞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잠깐 들러 한 보루 씩 사놓고 일주일 정도 나눠서 피우기 시작했다.
“어?”
“여긴 우짠 일이고?”
“아버님이 왜...”
편의점 조끼를 입고 계산대 앞에 서계신 강혜선의 아버지.
나도 나지만 아버님이 살짝 당황을 하셨다.
내가 갈 때마다 알바생들만 있었지, 아버님, 어머님이 계셨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최저 시급이 올라가면서 어쩔 수 없이 알바 한 명을 줄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중간에 알바가 비는 시간엔 아버님이 운동삼아 내려와서 계산대를 지키고 계신다고.
강혜선에게 따로 들은 이야기는 없었는데, 하시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벌써 한 달째 이러고 계시는 모양이다.
“집에 있으면 뭐하노, 노는 삼아 내려와 있는 거지. 뭐 살라고 왔노?”
“...담배요.”
“담배? 끊어라.”
“...네.”
“뭐 피우는데?”
“필라멘트...하이브리드 오.”
“오늘 혜선이 안 만나나?”
“회식 있다고 하던데요?”
“아...근데 이거 살끼라고 여기까지 온기가?”
“아뇨, 집에 가는 길이잖아요. 잠깐만 돌아가면 되니까...한 보루.”
“한 보루?”
“요즘 여기와서 한 보루 씩 사놓고 피웁니다.”
“이거를 내가 니한테 고맙다고 해야하는 기가, 아님 담배 끊으라고 잔소리를 해야하는 기가?”
“하하...”
“밥은? 저녁은 우짜노?”
“먹어야죠. 아버님은요?”
“내야 뭐 나중에 집에 가서 먹으면 되지.”
그런데 이상하게 네, 알겠습니다...하고 그냥 담배만 사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님 역시 뭔가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눈치셨고.
그래서 알바 교대가 언제냐고 여쭤보니 마침 또 금방 올 거라고 하셔서 그럼 같이 저녁이나 하지 않겠냐고 여쭤봤다.
소머리 국밥을 잘하는 집이 근처에 있다고 하셔서 그곳으로 갔다.
비싼 저녁이 되어버린다.
아버님과 단 둘이 하는 식사인데 소주가 빠질 수 있겠나.
대리 기사님을 부를 작정을 하고 소주를 받았다.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강혜선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아버님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하니 믿지 못하는 눈치여서 깜짝 놀래주기 위해 아버님을 바꿔주는 장난을 쳐보기도 했다.
“안 그래도 맨날 술일낀데, 영업하는 사람 붙잡아놓고 내가 또 술을 먹인다.”
“아닙니다. 회사일로 마시는 거 하고, 이렇게 아버님이랑 마시는 게 어디 같겠습니까?”
“누가 영업하는 사람 아니랄까봐...”
“아버님.”
“와?”
“어떻게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임원까지 되실 수 있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