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A급입니다
차장이라는 타이틀.
참 모순인 게 앞으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차장이라는 타이틀 자체만 놓고 보면 별 거 아닌 거 같다.
이미 난 회사로부터 차장 승진을 약속 받았고, 또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차장, 부장이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지.
분명 나도 곧 하기로 되어있고, 또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차장이란 타이틀인데 왜 아직 장 차장이란 존재는 내게 벽인지 모르겠다.
수입 명품 아동복을 취급하는 몇 군데 업체를 장 차장과 함께 돌아다니며 난 그를 다시 보게 된다.
다시 보게 됐다고 하기 보다는 설마 이런 것까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항상 얼굴을 맞대고 생활을 하기에 이젠 조금 가깝고 편해질만도 한데, 이상하게 그게 안되는 유일한 인물, 장 차장.
그보다 훨씬 입사 선배인 김 팀장도 이젠 조금 만만하다.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고, 그의 약점은 이미 모두 다 간파를 했으니까.
장 차장과 비슷한 기수인 손 팀장?
솔직히 이런 말 해서 조금 그렇긴 해도 내 손바닥 안이다.
다 보인다.
그가 뭘 생각하고 있고, 또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지 눈에 다 보인다.
그런데 유독 장 차장을 상대로는 그게 잘 안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난 본능적으로 그가 ‘실력’이 나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걸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실력’.
이것 만큼 강한 무기가 어디에 있겠나.
학벌, 인맥...
난 사실 그런 건 별로 두렵지가 않다.
그런 부분에 있어 손해를 봤던 경험도 크게 없고, 또 지금은 이미 그런 걸 따지는 시기를 지나쳐버린 거 같으니까.
자기 아빠가 사장이 아닌 다음에는 입사만 하면 다 똑같은 거지, 뭐.
하지만 실력은 다르다.
장 차장에겐 확실히 그게 있다.
업무 능력도 업무 능력이지만, 그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를 쥐락펴락 해버리는 그의 말주변과 표정, 강단 등은 내 입장에선 영업맨으로서 흉내조차 내기 힘든 수준이다.
“저희 홍성 인터네셔널이 귀사가 취급하는 브랜드를 함께 판매한다고 해서 귀사의 해당 브랜드 매출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미 브랜드 본사들로부터 컨펌을 모두 따냈다.
사실상 라이센스 업체들을 찾아다니며 이런 자리를 가질 필요도 없는 거고.
본사가 하라고 했다는데, 라이센스 업체가 뭐라고 하겠나.
하지만 장 차장은 홍성 인터네셔널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그들을 납득시키고 또 불필요한 잡음을 최소화 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정해진 파이를 나눠먹자는 게 아니라 파이의 크기를 함께 키워보자는 겁니다.”
“글쎄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여기서 키울 수 있는 파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상대는 이미 빈정이 크게 상해 있는 상태였다.
미팅 시작과 동시에 홍성 인터네셔널의 스티커가 붙은 정관장 한 박스와 함께 해당 브랜드 본사로부터 받은 컨펌레터를 보여줬으니까.
상대는 이미 그렇게 진행이 되기로 되어 있으면서 여긴 왜 찾아와서 사람 염장을 지르느냐는 듯한 반응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혹시 만화책 좋아하십니까?”
“...?”
“지금은 먹고 사는 게 바빠서 끊었지만 소싯적엔 주말만 되면 이만큼씩 쌓아놓고 읽고는 했었죠. 정말 기똥찬 만화를 하나 읽게 됐습니다. 스토리도 마음에 들고 그림체도 딱 제 취향인 만화였죠. 대부분 그런 만화는 저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나 역시 장 차장이 거기서 왜 뜬금없이 만화책을 예로 드는지 궁금했었다.
“그런 만화를 한 번 읽고나면 아, 이제 이런 거 하나 읽었으니까 다른 거 읽어봐야지...이럴까요?”
“...?”
“아닙니다. 사람 심리라는 게 비슷한 만화를 찾게 됩니다. 비슷한 스토리, 비슷한 그림체의 만화를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만 그런지 알았는데, 만화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저와 비슷하더라고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유아, 아동복 코너가 모여있는 같은 층에 같은 브랜드를 두 곳에서 판매를 합니다. 이게 어떻게 파이를 나눠먹는 거겠습니까? 더 많은 노출을 유도해서 파이를 키우자는 거죠.”
“하지만 그런 편집샵이 들어가면 저희같은 오리지널티 샵들의 매출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거죠.”
“해보셨습니까?”
“...!”
“아직 안해보신 거 아닙니까? 이번에 홍성이 론칭한 H.I 슈즈 편집샵. 저희가 그걸 론칭해서 그 편집샵에서 취급하는 브랜드 단독 매장들의 매출이 줄었을 것 같습니까?”
“흐음...”
“공 팀장.”
“네.”
난 기다렸다는 듯 준비한 자료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단독 매장에서 보다가 편집샵으로 와서 비교를 해보고 구입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가장 처음 임팩트 있게 눈에 들어온 모델. 그 비슷한 느낌의 아이템을 계속 찾게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쇼핑 심리 아니겠습니까.”
“근데 바쁘신 분들이 여기까지 이런 이야기나 하자고 오신 건 아닐 거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온 게 맞습니다.”
“...!”
“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홍성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저희는 결코 우리가 홍성이다...를 과시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 부분에 대한 오해를 최소화 시키기 위해 귀사 뿐 아니라 전 업체를 다 돌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다른 업체에선 또 다른 카드를 꺼내드는 장 차장이었다.
“해당 브랜드만 취급하는 게 아니신 모양입니다?”
“브랜드 하나만 취급해선 위험하죠.”
“저기 저 브랜드는 백화점에 들어가 있는 브랜드 인가요?”
“들어간 지점도 있고, 들어갔다가 빠진 지점도 있고 그렇습니다.”
“한국 브랜드죠?”
“네, 요즘은 또 인기가 시들시들해져서 주로 아웃렛 쪽으로 풀고 있습니다.”
“홍성이 이 브랜드에 한해 약간의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거 같은데...혹시 이 브랜드 해외 라이센스도 함께 가지고 계십니까?”
“에이, 그런 라이센스가 필요한 수준의 브랜드는 아닙니다. 잘나가는 브랜드였음 왜 백화점에 들어갔다가 뺐겠습니까?”
“그럼 얼른 중국쪽 라이센스 사십시오.”
“...?”
“이번에 홍성에서 국내의 가능성 있는 유아, 아동복 브랜드들을 중국으로 가져가 컨트롤 해보겠단 확정이 났습니다. 사장님께서 이 브랜드 마진을 브랜드 본사 마진만큼만 따내주신다면, 굳이 브랜드 본사와 같이 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책임지고 힘써드리겠습니다.”
장 차장이 여러 업체들을 나와 함께 돌며 했던 건 통보가 아니라 설득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유대를 형성하는 작업이었다.
굳이 그걸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설명을 했고.
“화가 많다. 요즘 사람들 말이야. 진짜 우리같은 일반 직장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많은 사람들이야. 나도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하루하루가 살얼음일 거 아니야. 여유라는 게 분명 우리보다는 부족한 분들이시지.”
그리고 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예전에 내가 술이 이만큼 취해서 부장님, 당시엔 차장님이셨지. 아무튼 부장님한테 출근하기 싫다...라고 진짜 속에 있는 말을 필터링없이 싸지른 적이 있어. 그랬더니 부장님이 뭐라고 하신 줄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럼 회사 그만두고 장사해. 개인 장사 시작하면 바로 그때부터 다시 출근하고 싶어질테니까.”
“하하하...”
“그만큼 힘든 사람들이야. 직원들 두세 명 정도 데리고 개인 사업 하는 사람들. 안 그래도 힘든 분들이신데, 우리까지 거들어서야 되겠어? 조금 귀찮더라도 직접 찾아뵙고 설득을 시켜드려야지. 그게...어떻게 보면 사장님, 전무님 두 분이서 시작한 홍성이 이렇게까지 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기도 하고.”
모든 업체들을 돌고 나니 어느덧 저녁.
간만에 울산 식당에 들러 육회와 초리구이를 시켜놓고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난 겉으론 웃으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참 싫었습니다.
당신이 무서운 걸 떠나 그냥 인간적으로 당신이 참 싫었습니다.
당신이 내 팀장이었을 시절, 사이코패스적인 당신의 모습도 진짜 진절머리가 났고, 한 번씩 당신이 한 실수를 내 탓으로 돌리는 모습에 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나...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당신이 쉬어야 나도 조금은 쉴 수 있을 거 같은데, 주말까지 반납하는 당신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대리를 달고 최연소 팀장이 된 이후, 다시 최단기간 차장 승진을 확정받은 지금에 와서야 당시 당신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당신 역시 위로부터 가해지는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걸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네요...하고 고백했다.
“돈 모아라, 은태야.”
“네? 갑자기 그 말씀은 왜 하세요?”
“너 이번에 연말 성과급 어마어마하게 나올 거다.”
“기대중입니다.”
“헤프게 쓰지말고 모아라.”
내 빈잔을 채워주며 장 차장이 말했다.
“내가 팀장으로 일할 당시가 너도 알다시피 이제 막 홍성이 대기업 반열에 오르냐마냐 하던 시기였잖아.”
“완전 2002년 월드컵 기분이었죠. 한 주 지나면 1팀이 이 브랜드 따오고 또 며칠 지나면 2팀이 다른 브랜드 하나 또 따오고...”
“그랬지. 그때처럼 희망적인 회사 분위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때만 생각하면 다들 뽕 맞은 것처럼 대형 브랜드들을 따왔었지. 진짜 분위기를 제대로 탔던 시기였어.”
“저도 그때만 떠올리면 아직 설렙니다.”
“내가 그때 팀장으로 받은 연말 성과급이 얼만줄 아냐?”
“어후...월급보다 많이 받아가지 않으셨어요?”
“7천 받았다.”
“크흐...”
정말 말이 안되는 액수인데, 당시 홍성에선 가능한 액수였다.
“성과급으로만 7천을 받았어. 내 기분이 어땠겠냐? 난 앞으로도 계속 그정도는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씀씀이가 커지더라. 그래서 실수를 참 많이 했어.”
“어떤 실수요?”
“명절에 가족들 모이면 조카들 용돈 팍팍주고, 또 부모님 새 옷 한 벌씩 쫙 빼드리고, 집 넓혀가시라고 돈도 보태드리고. 다들 그러고 싶잖아. 우리가 왜 아둥바둥하면서 돈을 버는 건데. 다 가족들한테 잘해주고싶어서 그러고 있는 거 아냐.”
“그렇죠.”
“그런데 그게 독이 되더라. 내가 조카 용돈 팍팍 줄 때, 자기 자식이 삼촌한테 용돈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 형제들은 그게 부담이 되는 거야. 동생이 자기보다 잘나가서 부모님 집 넓혀가는데 도움을 주면 그게 형 입장에선 또 소외감을 받게 되는 거고. 물론 케바케야. 우리집은 그랬다는 거야. 그래서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형제들간의 사이가 살짝 멀어졌던 시기가 있었어.”
“흐음...네.”
“지금 버는 게 네 평균치가 아니야. 명심해야된다.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 수입이 평균일거라 착각하고 소비 습관부터 키우는 사람들이 있어. 과거의 나처럼. 그럼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야. 나처럼. 크크큭...소비 습관이라는 게 키울 수는 있어도 줄이기는 힘들거든.”
물론 나와는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다.
장 차장은 현재 내가 로또로 강남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일테니.
하지만 이상하게 장 차장이 해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게 맞는 거 같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영업 기획부에 인턴 두 명이 들어온다.
1팀에 장학기라는 남자 인턴이, 2팀엔 박보람이라는 여자 인턴이 들어온다.
물론 난 그때부터 진짜 차장의 업무를 보기 위해 인턴들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며 팀장 대리들로부터 그들의 업무 적응 과정을 보고받는 게 전부였다.
“박보람은 좀 어떻습니까?”
장학기에 대해 아직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는 양 대리와는 달리 안 대리는 박보람을 무척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A급입니다. 진짜 제대로 뭘 좀 아는 친구가 들어온 거 같아요.”
“오...그래요?”
“어제 팀 회식을 하는데 기태가 보람이한테 고기 자기가 구울테니까 넌 그냥 먹기만 하라고 했어요. 이런 건 밖에 나오면 남자가 하는 거라고.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뭐라던데요?”
“혹시 선배님 결혼 하셨어요? 그래서 다들 이건 또 뭔 소린가 하면서 보니까 저도 아직 결혼 안했거든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요. 그래서 전 집에서 이런 거 잘 안해요. 엄마가 다 해주거든요. 그러니까 밖에 나와선 제가 구울게요. 고기 굽는 게 짬대로 해야하는 거라면 말이죠.”
“푸하하하...”
“쎕니다, 애가. 쎈데...밉지 않게 쎈 스타일이더라고요. 톡톡튀기도 하고 그런데도 다른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다와서 그런지 뭘 좀 압니다. 업무만 잡아주면 되지 싶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양 대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난 안 대리가 회식자리 고기 굽는 이야기 하니까 왜 이렇게 웃기냐?”
“거 참 멋모르고 했던 짓은 이제 좀 잊어주십시오.”
“내가 뭐랬어? 그냥 좀 웃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