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59화 (59/325)

# 59

당신은 그게 아닌 거 같아서 불안해

요즘들어 부쩍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 고민은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 그런데 나와 다른 그 사람들의 생각과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부분, 그럼에도 난 그들에게 단체 생활의 필요성을 고집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보통 샌드위치라고 하지 않나.

대리, 팀장 정도 타이틀이 생기면 중간에 딱 끼어서 위 아래 눈치를 동시에 봐야 하는데, 사실 난 영업 기획부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 부분에 대해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던 거 같다.

부하 직원들을 컨트롤 하는 요령은 부족했지만, 위에서 큰 푸쉬가 없었으니까.

운이 좋게도 팀장을 달았지만, 여전히 난 부하 직원들만 챙기면 되는 포지션이었다.

그런데 막상 영업 기획부가 생기고, 또 회사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위 아래 눈치를 동시에 봐야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이지혜 씨.”

“네, 상무보님.”

“수고 많으셨어요.”

마지막으로 상무보가 이지혜에게 금일봉을 전달할 때였다.

건너편 영업 마케팅부 직원들은 물론이고 장 차장과 박 부장까지 자리에 참석해 박수를 쳤다.

상무보 옆에서 금일봉을 올렸던 트레이를 받치고 있던 여비서가 그 트레이를 밑으로 내리며 상무보의 지시 몇 가지를 전해듣는 동안 난 타이밍을 살폈다.

그리고 여비서와 대화를 끝낸 상무보에게 은근슬쩍 회식 이야기를 꺼낸다.

“상무보님, 설마 이렇게 끝은 아니죠?”

이미 전무님으로부터 받은 지시가 있었기에 나와 상무보는 마치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조금은 편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거 같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에이...이런날 직원들 사기도 올려주실 겸 회식자리 한 번 마련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장 차장이 잘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자리로 돌아갔고, 박 부장은 저 멀리 김 팀장을 불러 함께 담배를 피러 갔다.

건너편 영업 마케팅부 직원들 모두가 다시 업무를 시작하는 동안 나와 상무보는 영업 기획부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회식 약속을 잡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들어 부쩍 회식이 잦아진 영업 기획부.

자체적으로 축하를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안 대리와 이 대리가 새로 들어오면서 따로 환영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 회식이라는 게 모두를 만족시킬 수가 없다.

어느 누군가는 마냥 즐거울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부담스러울 수 밖에.

“그럼 퇴근하고 그쪽으로 오세요.”

“자, 박수, 박수...”

나 역시 부담스러운 자리임에도 난 내가 원해서 회식을 추진하는 사람처럼 팀원들의 박수를 유도했고, 또 팀원들의 박수를 확인하면서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어색하게 웃고는 있지만 이 대리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고, 박기태 역시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눈치를 챌 정도로 내색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 경험상 그들이 현재 회식을 그렇게까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뿐이다.

그리고 난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장 차장이 얼마나 불편한 이 일을 오랫동안 해왔었는지.

부장님 회식, 이사님 회식, 그리고 장 차장 본인 주최하에 마련한 회식 등등...

새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회식자리에 끌려가며 그 회식을 유도했던 장 차장을 뒤에서 욕했던 과거 내 모습이 팀원들의 표정에 담겨있는 듯 했다.

그렇게 다시 업무가 시작됐고 난 강혜선에게 카톡을 남겼다.

-오늘 급하게 회식이 잡혔는데, 어떻게 하지?

나라고 회식이 무조건 좋을리야 있겠나.

아무리 회사가 내는 술자리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매일같이 달라지는 핑계, 하지만 막상 술잔이 돌기 시작하면 똑같은 이야기의 연속인 회식 자리는 나도 어느정도 제한을 걸어놓고 가지고 싶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부쩍 회식의 기회가 많아지는 영업 기획부였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강혜선으로부터 답장이 온다.

-바이브에요? 맨날 술이야?

-응, 난 늘 술이야, 난 또 술이야

-그러다 간에 구멍 나는 거 아님?

-오늘 금일봉 받았음

-오! 얼마?

-큰 거 한 장

-백만 원?

-응, 뭐 갖고 싶은 거 있음 말해

-와! 대박! 대박! 내 남자 완전 멋짐! 맛있는 거 사주세요!

-먹고싶은 거 말만 하셈

-근데 그래서 오늘 영화보러 못간단 말 그렇게 둘러서 하는 거?

-사랑합니다

-실망합니다

하트 몇 개를 동시에 날려주고 강혜선과의 카톡을 접었다.

그나마 한가지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역시 강혜선 뿐이었다.

이미 같이 보기로 한 영화 티켓 예약까지 다 해놓았을텐데, 이해하고 넘어가주는 그녀의 관대함 덕에 살짝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진짜 로또는 13억 당첨금이 아니라 강혜선을 잡은 게 아닐까.

혼기가 찬 상태에서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 시작했고, 또 비슷한 나이, 사회 생활 경험이 많다는 이유 등으로 강혜선은 이해심이 참 많은 편이었다.

어쩔 땐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할 정도로 가급적이면 내게 맞춰주려고 노력했고, 그런 그녀의 노력은 내 직장 생활의 든든한 무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상무보의 주최 하에 가진 회식자리.

소고기를 먹으러 갔다.

회식 분위기는 좋았지만, 난 유독 이 대리의 초조해하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은근슬쩍 시간을 확인하고, 뭔가 말을 할까말까 속으로 갈등만 반복하는 모습이 확실했다.

“그나저나 이 대리.”

“네, 팀장님.”

“요즘 딸은 잘 크고 있어요?”

이 자리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대리가 알아서 도망칠 수 있도록 길을 살짝 열어주는 것 뿐이었다.

“네, 잘 크고 있습니다.”

“이제 걷나?”

“아직이요. 이제 겨우 뭐 잡고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리의 말에 상무보가 한마디 거든다.

“그럼 곧 걷겠네. 몇 달이에요?”

“9개월입니다.”

“아이고, 빠르네. 9개월에 벌써부터 서기 시작하면.”

“아참, 상무보님 아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머리 아파요, 벽 천지사방에 낙서를 해서 조만간 도배를 다시 해야하게 생겼어요. 그나저나 이 대리, 피곤하겠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잠은 잘 자요?”

“중간에 서너 번 정도 깹니다, 아직.”

“아니, 이 대리 말이야.”

“뭐 와이프랑 번갈아가며 일어나서 아기 다시 재우고...그렇습니다. 하하하.”

“피곤하겠네. 와이프 분은 집에만 계시고?”

“아뇨, 지난달 부터 다시 복직해서 일하러 나갑니다.”

“그럼 낮에 애는 누가봐요?”

“와이프가 출근하러 갈 때 장모님한테 맡겨놓고 퇴근할 때 다시 찾아서 옵니다.”

“그럼 이 대리가 많이 도와줘야겠네.”

“네, 뭐...같이 해야죠.”

상무보가 경험이 없지, 눈치까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회식은 고깃집에서 마무리가 되었고, 여기서 살짝 놀란 게 금일봉과는 별개로 상무보가 자신의 개인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팀원들 전원에게 5만 원권 한 장씩을 나눠주며 택시비를 하라고 하셨다.

돈 5만 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마음 씀씀이 자체가 의외였다.

지금껏 회식을 하면서 택시비라는 걸 따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비록 불금을 팀원들과 보내야했지만, 상무보라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는 계기였고, 또 그 상무보 라인에 날 태워보려는 전무님의 의중을 읽을 수 있어 마음이 든든해진 금요일.

그렇게 금요일이 가고 토요일 점심 시간때까지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을 때,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삐.삐.삐...삐삐삐...

난 재빨리 스마트 폰을 꺼놓고 눈을 감았다.

현관문이 열렸고 강혜선의 발소리가 들렸다.

워낙에 좁은 방이다 보니 눈을 감고 있어도 강혜선의 동선이 눈에 훤히 보였다.

냉장고 문을 연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고, 세탁기 문을 열어 아무렇게나 쳐박아 둔 세탁물을 확인하는 강혜선.

난 강혜선이 날 흔들어 깨우러 올 때까지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이내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난 살짝 실눈을 떠 냉장고 안으로 반찬을 채워넣고 있는 강혜선의 뒷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에휴, 귀찮아도 좀 챙겨먹으라니까 더럽게 말 안 들어.”

아마 또 반찬이 상했나보다.

“이봐요, 아저씨. 아저씨?”

“...”

“어이, 거기.”

“...”

“눈 좀 뜨죠? 지금 몇 신줄이나 알아요?”

“...”

“야.”

“뭐?”

난 한 쪽눈만 살짝 떠 지금 뭐라고 했느냐는 표정으로 강혜선을 쳐다봤다.

“이거 내가 분명히 새 젓가락으로 덜어 먹으라고 했잖아요. 또 이거 통째 뚜껑 열어놓고 먹었죠?”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냐? 일주일도 안된 게 벌써부터 이렇게 상할리가 없잖아요.”

툴툴거리며 침대 쪽으로 다가온 강혜선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파뭍었다.

“이불 한 번 빨자. 냄새 난다.”

“냄새는 무슨...”

“아, 좀 일어나봐요, 힘들어.”

그래서 난 재빨리 그녀를 내 옆으로 나란히 눕게 만들어놓고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아, 쫌!”

“아, 왜.”

“나중에, 나중에...”

“뭘 또 나중은 나중이야.”

“냄새 난다니까, 홀아비 냄새. 이거 빨래 한 번 돌려놓고 해요.”

“아아아...그냥 지금 하게 해주세요.”

몇 차례 따끔하게 내 손을 때렸지만, 이내 포기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강혜선이었다.

그리고 난 강혜선의 살냄새에 안정을 느끼고 행복했으며, 두피를 긁어주는 그녀의 가는 손길에 지난 한 주간의 피로와 업무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리고 있었다.

열심히 그녀 안에서 지난 일주일간 쌓여있던 욕망을 모두 풀어낸 후 다시 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뭍고 어린 아기가 된 듯 그녀의 모성애를 찾고 있었다.

그런 내 등을 토닥거리며 강혜선이 말했다.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니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겐 필요한 거지만...그렇다고 주객이 전도되면 안되는 거 알죠?”

“...?”

“내가 항상 1순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난 그러고 있는 중인데, 당신은 요즘 점점 그게 아닌 거 같아서 조금 불안해.”

“내가 말 했잖아, 어제는...”

“어제만 그런 게 아니라...아냐, 아니에요. 수고했어요.”

이런 부분을 가지고 절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강혜선이다.

본인 역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또 그래서 지금 내가 회사에서 얼마나 좋은 기회를 잡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혜선이었기에 오히려 긴장을 놓지 말고, 물 들어왔을 때 없는 힘까지 다 짜내서 노를 저으라고 주문을 했던 강혜선이다.

그런 강혜선이 이런 말을 하니까 전날 회식 때문에 일방적으로 깰 수 밖에 없었던 데이트 약속이 더 미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혹시 오늘 뭐하기로 했는지 기억해요?”

“...”

“흐음...”

“기,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지. 오늘 차 팔러 가기로 했잖아.”

“진짜 얄미워. 머리라도 나빴음 이럴 때 한 대 때릴 수라도 있지.”

“차 가지고 왔어?”

오늘은 강혜선의 차를 팔기로 한 날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나와 강혜선 두 사람 모두 차를 각자 한 대씩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나 뿐만 아니라 강혜선 역시 필요에 의해서 차를 사긴 했는데, 주로 출퇴근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차 한 대면 충분하다 싶었다.

장인 어른 될 분 역시 차가 있어서, 결혼을 한 뒤 살림을 합치기 전까지는 필요할 때마다 그 차를 빌려타면 될 것이고, 또 결혼을 한 뒤엔 내 차를 같이 타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올 해가 가기 전, 연식이 조금이라도 살아있을 때 후딱 팔아버리는 게 조금이라도 이익이겠다 싶어 제안을 했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차를 팔아서 만든 돈으로는 신혼집 살림을 채우는데 보태기로 했다.

그래서 난 어제 상무보에게 받은 금일봉을 그대로 강혜선에게 전달했다.

“오늘 서비스 좋아서 팁 주는 거야. 다음에도 서비스 잘 해 달라고.”

“요즘 점점 말하는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거 알죠?”

“뭐 어때, 내 껀데.”

“뭐가? 내가?”

“아냐?”

“이야...얼굴 표정 하나 안 변하고...요즘 진짜 물 제대로 올랐네.”

“그래서 말인데, 한 번 더 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