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언제까지 내가 다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상무보가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의 정식 명칭은 운영지원 이사실이었다.
물론 그 밑으로 상무보의 이름과 상무보라는 타이틀이 따로붙어 있었고.
전무님처럼 독립된 사무실을 쓰는 게 아니었다.
사무실 자체는 독립되어 있었지만, 같은 층에 다른 이사실이 몇 군데 더 있었다.
비서들 역시 병원 데스크 같은 별도의 업무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안에 다같이 모여 개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조금 독특한 시스템이었다.
잘 올라올 일이 없는 곳이다.
아니, 처음 와보는 곳이다.
영업부의 시스템 자체가 그렇다.
워낙에 촘촘한 맨파워가 갖춰져 있다보니, 보고체계 역시 벽돌이다.
차장까지도 이 공간에 올라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장 쯤 달면 모르겠지만, 차장 역시 부장이 급한 일로 사무실을 비우지 않는다면 어지간한 보고는 부장에게 하는 게 맞는 거니까.
반투명 코팅지가 붙어있는 통유리벽.
바닥부터 위로 절반쯤 그 반투명 코팅지가 붙어있었다.
버티컬 블라인드가 천장에 붙어있는 거 같았지만, 그걸 내리고 있는 사무실은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중요한 미팅이 있거나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올 때에만 버티컬 블라인드를 내리지, 평상시엔 저렇게 개개인의 사무실을 다 오픈해놓고 업무를 보는 모양이었다.
순간 속으로 임원도 상무 전까지는 별 거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고급스럽고 위엄이 있는 공간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전무님 방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한 그 공간 속 이사실들과 상무보 사무실은 일반 사원들이 모여 근무하는 사무실에 비해 독립된 공간, 책장, 그리고 소파와 집무책상 등이 조금 다르다 뿐이지, 인테리어 소재 자체는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커피 두 잔이 올려진 테이블.
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상무보와 마주보고 앉았다.
별도의 상석은 없는 소파였다.
개별 소파 네 개가 두 개씩 마주보게 위치해 있는 공간이었다.
테이블도 무척 심플하고 작았다.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촉 말씀이십니까?”
“네, 촉. 처음 영업 지원팀에서 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몇 명이 눈에 띄더라고요. 일 참 스마트하게 잘한다. 군더더기가 없다. 움직이는 몸이 참 유연하다...그런 건 내가 꼭 회사 분위기를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어느정도 보이더라고요. 그 몇 명 중에는 공 팀장님도 포함되어 있었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그거 기억나요? 나는 아마 평생 못 잊을 거 같은데...”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복합기 카트리지 교체하는 법을 몰라서 혼자 끙끙대고 있을 때, 공 팀장님이 가르쳐주셨잖아요.”
“아...네, 저도 기억납니다.”
“그때 아마 공 팀장님이 대리였나?”
“아뇨, 그때까지는 일반 사원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행사에 들어갈 현수막 디자인을 빨리 뽑아달라고 지원팀을 찾았다가 그 장면을 봤을 겁니다.”
“그랬나? 난 그거까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는데, 아무튼 나만 놔두고 팀 전원이 외근을 가버린 상태였던 건 확실해요.”
“원래 지원팀이야 근무 절반 이상이 외근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도 좀 같이 데리고 다녀주면 좋을텐데, 뭐가 그렇게 불편하다고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하는 나만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외근을 가버리고, 또 난 꼴에 무조건 사장님 체면 깎이는 짓은 하면 안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이것저것 혼자 해보겠다고 끙끙댔던 시기였죠.”
난 알고 있다.
지금의 상무보가 있기 전 어리숙한 모습으로 처음 홍성 본사에 입성하던 그의 모습을.
사장 아들이 입성을 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참 많이 수근거렸다.
물론 나도 그 중 한 명이었고.
도대체 어떤 인물일지, 다들 얼마나 궁금했겠나.
후광이라도 있을 줄 알았던 거 같다.
특별할 줄 알았고, 그의 파워는 무한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그의 존재를 직접 본 뒤엔 실망 아닌 실망, 그러면서도 안심이라는 걸 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별 거 없잖아?
뭐야? 저런 게 사장 아들이야?
애가 조금 모자라 보이는데?
왜 저렇게 단단하지 못하고 흐물흐물해?
눈도 살짝 풀린 거 같은데?
얼었나? 왜 저렇게 뻣뻣하지?
웃는 거 바보같다...
상무보를 처음 봤을 때 내가 했던 생각들이었다.
나와, 그리고 우리와 비교했을때 크게 특별한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는 위안, 안심...그런 감정을 크게 받았던 거 같다.
아버지가 사장이니까 그 존재만으로도 특별했지만, 본인은 그걸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았고, 실제로도 그 부분만 제외하면 평범한 낙하산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물론 다른 낙하산에 비해 전 직원이 관대했던 건 사실이다.
당연하지.
아버지가 사장인데.
오히려 과장부터 시작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응원했던 것 같다.
날카롭고 예리한 이미지였다면 그나마도 부담스러웠겠지만, 워낙 뭐라도 하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들게 만드는 왜소한 체격과 항상 긴장에 싸여있는 그의 짠한 모습 때문에, 그리고 예의 바른 그의 행실 때문에 나 역시 응원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유명 연예인 커플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이혼을 하면 속으로 괜히 저럴 줄 알았어...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장면에 감정이입이 되는.
막상 유명 연예인 커플 쯤 되면 경제적 형편을 비롯해 모든 게 다 나보다 훨씬 나을텐데, 그들의 이혼 기사를 보면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를 따져보며 속으로 은근히 참견아닌 참견, 걱정을 하게 되는...
상무보에 대한 회사 직원들의 관심이 그것과 비슷했을 거다.
분명 우린 상무보를 걱정할 입장이 전혀 아니다.
어쨌든 우리보다는 나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를 상대로 짠한 감정, 응원을 해주고 싶은 감정을 들게 만들었으니, 그 얼마나 영업력이 뛰어나고 처세를 잘하는 존재란 말인가.
솔직하게 말해서 난 그 부분에 있어 상무보의 가능성, 그리고 홍성의 미래를 밝게 봤던 사람이다.
“그 나이 먹어서 복합기 카트리지 하나 교체를 못한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거야 갈아볼 기회가 없으셨을테니까 당연한 거죠.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복사, 스캔 정도만 해봤지, 직접 카트리지를 교체할 일은 없었습니다. 다 회사에 들어와서 배운 거죠.”
“나는 그때 공 팀장 보면서 맥가이버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맥가이버요? 제가요?”
“그때 카트리지를 들고 혼잣말을 막 했잖아요. 여기 복합기는 영업부 복합기랑 좀 다르네, 이건 또 무슨 카트리지가 이렇게 생겼어? 막 그렇게...한 마디로 공 팀장도 그때 처음 교체해보는 거였단 소린데, 그걸 이리저리 몇 번 뜯어보고는 곧바로 딱 성공을 시켰어요. 그게 그렇게 신기하더라고, 나는. 혼자 거의 20분 넘게 쩔쩔맸던 거였는데 말이에요.”
웃어야지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복합기 카트리지 교체 한 번 해주고 몇 년 뒤에 맥가이버 소리를 듣자니 괜히 어색하고 민망했다.
“그런데 그때도 살짝 느꼈지만, 이번에 H.I 편집샵 건 대박 터뜨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게 공 팀장님 스타일인 거 같아요.”
“제 스타일이요?”
“일을 쉽게 하는 법을 아는 거 같아요.”
“...”
“전무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요령이 붙어야 잘 하는 사람과, 그 요령이 처음부터 탑재된 사람은 시작부터 최소 10년 차이는 난다고. 그러면서 며칠 전에 저한테 공 팀장님 이야기를 꽤 오래 하시더라고요. 요령이 탑재된 몇 안 되는 인재 중 한 명이 바로 공 팀장님이라고.”
“과찬이십니다.”
“혹시 다른 회사로부터 최근에 러브콜 같은 거 받은 적 없으세요?”
“...있습니다.”
상무보는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한테 크게 매력적인 조건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 상무보는 내선폰으로 비서를 불렀다.
“어느정도 조건이 공 팀장님 기준에서 매력적인 조건인 건가요?”
“글쎄요...그런 부분도 크게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몇 군데에서 메일이 왔길래 확인만 해봤지, 자세히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전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
“...?”
“같이 일하는 사람들, 회사가 제게 주는 기대, 응원...지금까지 홍성 생활을 하면서 요즘처럼 자신감이 붙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부분에서 만족스럽습니다.”
“그래도 러브콜을 보내올 정도면 공 팀장님이 원하는 조건을 맞춰줄 수 있다는 말일텐데요.”
“차이가 나봤자 얼마나 나겠습니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차이가 나봤자 얼마나 나겠나.
끽해봤자 1년에 천만 원 내외일텐데, 지금의 안정됨을 포기하고 모든 게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거기다 차장 진급까지 확정이 된 마당에 말이다.
잠시 뒤 비서 한 명이 작은 트레이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올려진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저건 뭘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걸 상무보가 앉은 소파 옆 협탁 위로 내려놓는 순간, 그 위에 홍성 인터네셔널의 로고가 들어가 있는 봉투 몇 개가 올려져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상무보가 그걸 내게 건넨다.
뭔가 싶었다.
“H.I 편집샵 건으로 드리는 금일봉입니다. 영업 5팀 팀원들 것만 챙겼습니다.”
“아...네, 감사합니다.”
뭐지?
이걸 왜 이렇게 주지?
속으로 약간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 의심하지 않고 주는 봉투를 모두 받았다.
그런데...
상무보로부터 그간의 성과를 인정받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한참 듣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상무보가 뭔가를 보고 움찔한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난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반투명 코팅지가 붙어있는 통유리벽으로 시선을 돌렸고,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전무님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전무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고, 나와 상무보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뭐해?”
전무님의 질문에 상무보가 금일봉을 전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자, 전무님이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걸 왜 여기서 주지?”
“어제 전무님께서 공 팀장 따로 불러서...”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한 거지, 누가 금일봉을 따로 주라고 했나, 이 사람아.”
“...”
“금일봉을 이렇게 전달하는 경우가 어딨어?”
“...”
갑자기 싸늘하게 변해버린 전무님의 표정.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애꿎은 콧등만 긁고 있는 상무보.
순간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졌다.
“어떻게 내가 하나하나 다 말을 해줘야 하나, 이 사람아.”
“...”
“금일봉을 왜 주는 건데?”
상무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른 직원들 다 보는 앞에서 어깨에 힘도 좀 실어주고, 그걸 못 받는 직원들 자극도 좀 받으라고 주는 게 금일봉인데, 그걸 왜 이렇게 줘?”
“죄, 죄송합니다.”
“이럴 거면 그냥 월급 통장으로 넣어주지, 왜?”
“...”
“참 답답하다, 답답해, 이 사람아. 내 이상하게 이럴 거 같더라. 그래서 와본거야. 왜 내가 직접 전달 안하고 자네한테 금일봉 돌리라고 했겠어?”
“...”
“언제까지 내가 다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하아...성규야.”
“네, 전무님.”
“내가 언제까지 이런 기본적인 것들까지 일일이 다 챙겨야 되냐? 언제까지 일일이 다 확인을 해야 돼?”
“죄송합니다.”
“당장 내려가.”
“...”
“당장 내려가서 직원들 보는 앞에서 다시 돌려. 한 명, 한 명 일일이 눈 마주쳐가면서 한 마디씩 해주고. 그리고 공 팀장.”
“네, 전무님.”
“넌 분위기 살피면서 상무보 참석하는 회식자리 유도하고.”
“네, 알겠습니다.”
“하아...아, 뭐해, 지금 당장 안 내려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