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57화 (57/325)

# 57

내 사무실로 좀 와주세요

전무님과 상무보가 파워게임을 했다는 이야기보다 더 놀라운 건 안낙현이 주워오는 정보들 대부분은 어지간하면 사실인 경우가 많다는 거다.

참 신기할 정도로 쓸데없는 뉴스, 하지만 모두가 안그런 척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뉴스들을 수집해오는데 도가 튼 안낙현.

전무님은 사실상 홍성 인터네셔널에서 노터치 넘버 원이다.

노터치 넘버 원은 사장님이 아니라 사실상 전무님이라고 봐야한다.

그런 전무님을 누가 감히 건들 수 있겠나.

상무보라도 무조건 전무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상무보가 사장 아들이라도 아직은, 아직까지는 비벼볼 수 없는 상대가 바로 전무님이다.

그런데 그런 전무님을 상대로 상무보가 파워게임을 시도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거기다 상무보의 한판승이다?

에이, 말이 안되지.

차라리 내가 사표 쓸 생각하고 전무님 방 앞에다가 똥을 싼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겠다.

상무보는 사장님의 갑작스런 건강악화로 전무님이 급하게 상무보 자리에 앉힌 인물이다.

물론 뭐 언젠가는 상무보를 거쳐 상무, 전무 타이틀은 그냥 건너뛰고 바로 부사장, 사장까지 차례대로 올라갈 존재임엔 틀림없지만, 나이나 경험 등을 비추어보면 사실상 전무님이 조금 빨리 상무보 자리에 앉힌 게 사실이다.

그 자세한 내막이야 자기들끼리만 알겠지만, 직원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게 정설이다.

한 달에 많으면 두어 번 정도 회사로 출근을 하시는 사장님.

그나마도 큰 미팅이 있을 때에만 오시고, 오셔도 미팅이 끝나면 바로 돌아가시는 걸로 안다.

그럼에도 주식 하락이나 주주들의 불안과 같은 회사에 큰 흔들림이 없을 수 있었던 이유엔 단연 전무님이 그 중심에 서있다.

사장님과 함께 홍성 인터네셔널을 만들고 또 지금의 홍성 인터네셔널로 키워내신 분이다.

그런 전무님을 상대로 상무보가 비벼볼 틈은 사실상 아직 어디에도 없다고 봐야한다.

그런데 안낙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또 은근히 설득력이 있다.

“상무보가 빡이 친거지, 중국 법인 때문에 말이에요. 법인장을 갈아야하지 않겠느냐고 강하게 어필을 했는데, 전무님이 일단 그 건은 잠시 보류를 하라고 했어요.”

“왜? 사실 안 대리 말만 들어보면 중국 법인은 본부장급이 문제가 아니라 법인장 자체를 갈아야 하는 거 아냐?”

양 대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니까 이제 큰 소리가 나온 거지, 전무님 방에서. 상무보가 뭘 보류를 하느냐고, 그냥 이참에 중국 법인장을 교체하고 시스템 자체를 바꿔보자고 했는데, 전무님이 계속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만 했다는 거예요.”

“에이...설마하니 상무보가 그만한 일로 전무님 앞에서 경솔하게 언성을 높히셨을까.”

“어? 진짜라니까요?”

“안 대리야.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꺼는 조금 오바다. 간극이라는 게 있잖아.”

“간극?”

“안 대리가 주재원 근무 가있는 동안 나나 팀장님은 상무보가 바닥부터 시작하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야.”

“바닥은 아니죠.”

옆에서 내가 한 마디 했다.

물론 사장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감안한다면 바닥부터 시작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 몰라도, 어쨌든 상무보는 과장부터 시작을 했다.

영업 지원팀에서 지원팀장과 나란히 책상을 쓰며 과장 업무를 시작했고, 그 후 기획전략팀 총괄을 거쳐 지금의 상무보 자리에 올라간 인물이다.

“우리 입장에서야 바닥이 아니지, 황태자 입장에선 바닥부터 시작한 게 맞는 거죠. 아무튼 안 대리가 주재원 가있는 동안 본사와의 간극이 생겨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상무보님은 인성자체가 자기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언성을 높혀가며 하실 분이 아냐. 거기다 전무님을 상대로. 그건 좀 오바야.”

그건 양 대리 말이 백 번 맞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재수없는 스타일이다, 상무보는.

다 가졌다.

배경, 인물, 능력, 거기다 인성까지.

상무보는 전 직원들을 상대로 하대라는 걸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신입사원, 계약직 직원들에게까지 존대를 하고 또 가능하면 그들의 이름까지 다 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게 가식이 아니라, 진짜 사람 자체가 그런 사람이다.

왜 어느정도 사회 짬밥을 먹다보면 그정도 쯤은 단번에 구별이 되지 않나.

지금 이 인간이 액션을 까는 거다, 아님 사람 결 자체가 좋은 거다...하는 식의.

상무보는 좋은 환경에서, 또 인성 바른 부모 아래에서 바르게 자란 엄친아의 표본이다.

그래서 재수가 없다는 거다.

그정도쯤 되면 인성도 별로고, 개념도 조금 없어줘야 밑에 사람 입장에서 까는 맛이라도 있는데, 상무보한테는 사람이 너무 유하다는 단점 말고는 크게 잡아낼 단점이라는 게 없으니까.

“여기서 향은 씨까지는 짧게라도 다들 상무보님과 얼굴 맞대며 근무를 해 본 경험이 있지 않나?”

딱 장향은까지는 상무보가 영업 지원팀 과장으로 있을 때 같이 근무를 해본 맨파워다.

그랬기에 안낙현의 정보는 그 신빙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전무님 비서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에요. 두 분 한판 하실 때 그 옆에 해외 사업부장도 함께 있었다고 그러고.”

전무님 비서한테 직접 들었든 비서 할아버지한테 들었든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리고 그게 맞으면 또 뭐?

그게 우리랑 무슨 큰 상관이 있다고.

물론 그게 사실이면 재미야 있겠지.

말도 안되는 막장 드라마 전개를 상상하며 회사에 피바람이 불어오나? 하는 기대에.

하지만 전무님과 상무보의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런 상상마저 오래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오후에 안낙현이 가지고 온 뉴스의 사실여부를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안낙현이 준비중인 명품 아동복 편집샵 건으로 박 부장에게 보고를 하고 또 지원을 확보받을 사안이 몇 가지 있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전무님과 술을 한 잔 같이 해봤기 때문일까, 평소였다면 그냥 흥미로운 뉴스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을 그 사안이 이상하게 궁금해졌다.

그리고 박 부장이라면 정확하게는 몰라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란 기대도 있었던 거 같고.

다만 일개 팀장이 회사의 실세와 차기 사장의 파워게임에 대해 궁금해 하는 모습을 주제 넘게 보시진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될 뿐이었다.

“저기, 근데 부장님.”

“응?”

난 박 부장의 사인을 받은 서류를 챙겨 한쪽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정말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혹시 오늘 전무님과 상무보님 사이에 안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이것 봐, 작정하고 소문을 내는데, 그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있어?”

이건 또 뭔 소리야?

“공 팀장, 넌 또 누구한테 들었어?”

“저야 뭐...그냥...”

“어후, 안 그래도 지금 해외 사업부 때문에 나까지 골치 아프게 생겼다.”

“안됩니다. 그건 진짜 아닙니다.”

파티션 너머에서 장 차장이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안된다는 말만 연발하고 있었다.

“뭐가...”

“아니, 나더러 중국 법인장 자리에 2년만 가있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보시잖아. 나도 아까 불려갔었어.”

“아...”

“뭐 진짜 보내겠다고 물어보신 건 아닌 거 같고, 못가는 마땅한 이유를 만들어오란 말씀이시지.”

뭐지? 안낙현이 물어온 뉴스가 진짜였나?

“상무보 생각도 틀린 건 아닌데, 어차피 중국 법인이야 사드 이후로 완전 한 풀 꺾인 상태잖아.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고는 해도 그게 어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겠냐는 거지. 지금 당장 회사 입장에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현상 유지만 해주면 되는 곳인데, 상무보가 저렇게까지 입에 거품을 물고 사장님 입장을 대변하니 전무님도 난처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어?”

“아...사장님 입장이시구나.”

“정확하게는 사장님, 전무님 두 분 모두 회사 내에서 상무보님 입지를 다져주기 위해서 일종의 짜고치는 고스톱판에 같이 앉으신 건데, 이게 타이밍이 참 애매하게 걸렸어. 딱 내 영업 이사 진급을 앞에 두고 이런 일이 터져버렸네.”

“애매하긴 뭐가 애매합니까? 그냥 부장님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그럼 알아서 본사 해외 사업부장이 넘어가게 될 건데, 뭘 그렇게 고민을 하십니까?”

“아놔, 장 차장 저 자식은 저거는 하루종일 뭔 잔소리가 저렇게 많아? 네가 내 시어머니냐?”

“부장님 넘어가시고 해외 사업부장님이 본사 영업 이사 자리에 올라가면 죽어나는 건 남아있는 영업부 직원들입니다.”

“안다고. 나도 다 안다고.”

짜고치는 고스톱이다라...

내 상식에선 이해가 잘 안됐다.

그걸 꼭 짜고쳐야 하나?

참 복잡하게도 산다.

어차피 머지않아 상무보가 부사장 자리에 올라가고, 그 뒤에서 전무님이 버텨주실 건 누가 봐도 당연한 건데.

그런데 박 부장의 설명을 들으니까 어느정도 이해는 갔다.

전무님 역시 아무리 길어도 앞으로 10년이란 소리.

그런데 그 10년을 어떻게 지금처럼 에너지를 풀가동해서 회사를 이끌겠냐는 부분에서 이해가 갔다.

적당히 기회를 제공하고, 상무보가 실력으로 전무님을 뛰어넘는 그림을 그려주는 것 역시 홍성에 대한 전무님의 의리라는 말씀에 저기까지 올라가면 그런 그림도 볼 줄 알아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명품 아동복 편집샵에 관한 프리젠테이션을 하게 된다.

사장석을 비워두고 그 옆으로 전무님과 상무보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비어있는 사장석의 다른 옆자리엔 상무부터 다른 임원진들이 서열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고, 부장급들은 배석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임원들 앞에서 두 번째 하는 프리젠테이션이라 그런지 처음 했을 때에 비해선 긴장이 덜했다.

그렇다고 아예 편안했던 건 아니고.

원래라면 안낙현에게 프리젠테이션을 넘길 생각이었다.

안낙현의 아이디어였고, 어쨌든 팀장 대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니.

하지만 박 부장에게 커트를 당했다.

자기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에는 모르겠지만, 임원들이 참석하는 자리에선 최소 팀장급이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게 기본 예의라면서 말이다.

백옥같은 피부.

참 서른 중반의 남자를 두고 백옥같은 피부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도 우습지만, 상무보를 보면 어쩔 수가 없다.

남장을 한 여자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딱 전형적인 샌님의 느낌.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영락없는 선비다.

나름 타고난 기질이 있어 꼬장꼬장한 면도 있지만, 겉모습만 놓고 보면 날카로움은 있을지 몰라도 파워는 부족한 사람.

그게 바로 상무보다.

전무님이 손가락으로 체크해주는 부분을 열심히 읽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엔 특유의 미소로 눈까지 찡긋거려주셨다.

그냥 전무님과 상무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들과 아빠같다.

내가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는 동안 상무보의 눈빛은 몇 차례 크게 번득였다.

특히 루가노의 폭스타운에서 받을 수 있는 마진율을 이야기 할 때엔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무보의 질문.

“저기, 공 팀장님.”

“네.”

“근데 루가노는 물건 공급이 대체적으로 불규칙하지 않나요?”

“아동복 쪽은 큰 문제가 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습니다. 폭스타운이 아웃렛 소매와 함께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쓸만한 물건이 빨리 빠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러피언 특유의 소비형태가 있다보니 아동복 쪽은 거의 창고 수준입니다. 물론 조심은 해야합니다. 그래서 링겐 쪽으로도 동시에 발주를 넣을 생각이고요.”

“링겐 쪽 다른 아이템은 어떤가요?”

“다른 아이템이라고 하시면...”

“그럴리야 없겠지만, 사실 만토바도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물건을 끊어버리면 우리 입장에선 꼼짝마라 되는 거 아닌가요?”

“아, 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링겐 쪽에 다른 파이프 하나 정도는 꽂아두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미처 그 부분까지는 고려를 못했습니다.”

“슈즈 편집샵 쪽으로 새 브랜드 하나 추가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링겐 쪽에 파이프 하나 대세요. 지금 이 프리젠테이션 내용과는 별개이긴한데, 그래도 여유 있으면 그 부분도 같이 체크 해봐요. 우리가 어디 루트가 없어 물건을 못 판 적 있어요? 다 공급이 끊기거나 마진 장난 때문에 접어야 했던 거지.”

“네, 조만간 그 부분은 따로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상무보가 이런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체크를 할 수 있다는 부분에 먼저 놀랐고, 내게 지시를 내리는 능숙함에 또 한 번 놀랐다.

예전의 상무보였음 어떻게하면 최대한 부드럽게, 그리고 예의 바르게 주문을 할까를 고민했을 거다.

하지만 어느덧 상무보에게선 더이상 오래전 영업 지원팀 종합복합기 앞에서 낑낑대며 카트리지를 직접 갈던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큰 문제없이 프리젠테이션을 모두 끝냈을 때였다.

전무님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그를 시작으로 전 임원진이 나쁘지 않은 프리젠테이션이었단 반응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난 안낙현과 함께 비어지는 회의실 안에서 발표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공 팀장님.”

벌써 나간 줄 알았던 상무보가 다시 회의실안으로 들어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네, 상무보님.”

“그거 하고 있는 거 다 끝내놓고 내 사무실로 좀 와주세요.”

“...”

“천천히...하는 거 다 해놓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