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빼박 인정
“공 팀장 앞으로 더 충성해야겠네, 박 부장님한테.”
참치집 앞에서 박 부장을 택시에 태운 후 나와 장 차장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택시가 출발을 하기가 무섭게 인사부장이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했었다.
그런데 인사부장이 기다리고 있던 다른 택시에 오르면서 “내일 출근하면 인사부에 잠시 들러.” 하는 말을 남기는 순간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곧 공론화가 되겠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고, 내일이 오기 전까지 미리 혼자 쓸데없는 생각들을 전개시킬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사부장까지 택시를 타고 떠난 후 장 차장은 그제야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난 재빨리 라이터를 꺼냈고, 장 차장은 자신의 담배 한 개피를 내게 나누어 주었다.
“내일 출근만 아니면 한 잔 더 하자고 하겠는데, 시간이 너무 어중간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하자.”
“차장님은 알고 계셨죠?”
“너 차장으로 올리실 줄은 알았는데, 기태 빼고 5팀 전원 한 칸씩 올리실 줄은 나도 몰랐어. 거기다 지혜는 횡재했네.”
“어떻게 눈치 한 번을 안주셨습니까?”
“내가 해주는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 그리고 내 입장에서도 네가 차장으로 올라오는 건 선물이나 진배없어. 솔직히 김 팀장님만 믿고 가기엔 나도 많이 불안했으니까.”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노빠꾸다. 지금부터 너나 난 진짜 노빠구야.”
난 콧구멍과 입으로 동시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자리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가셨잖아. 나 그리고 너로 이어지는 라인만 가지고 가시겠다고.”
“앞으로 전 어떻게 해야되는 건가요? 벌써부터 살짝 겁나네요.”
“겁날 게 뭐가 있어,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되는 거지.”
“그게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하던대로...제가 그동안 어떻게 해왔는지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장 차장 역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처음 네가 슈즈 편집샵 아이디어를 꺼냈을 때 내가 반대했었잖아.”
“그러셨죠.”
“분명 기막힌 아이디어인데...그래서 하는 게 무조건 맞는 거 같은데, 그래도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앞으로 다가와 멈춰선 택시 한 대.
장 차장은 손을 저어 그 택시를 그냥 보내놓고 말을 이었다.
“당시 은태 너야 5팀 매출 올리는 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난 생각이 조금 달랐거든. 양 대리 조차 휘어잡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결론은 당연히 못한다였지. 그렇다고 네가 만든 아이디어를 다른 팀장한테 해보라고 줄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렇게 해버리면 내 입장에선 실적 가로채기 밖에 더 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그런데 그때 부장님이 그러시더라고. 될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게 만든다고. 그런데도 그때 부장님이 한 번 맡겨보라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 못하셨던 건 코스트, 리스크 양쪽 모두 크게 들어가는 아이템이어서 그러셨던 거고.”
당시 장 차장이 했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새 브랜드를 한 번 줘보자...였던 거야. 어떻게 해내는지 한 번 지켜보시겠다고. 그러는 와중에 어떻게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서 나크리스가 된 거고.”
“...!”
“결과만 놓고 보면 그때 내가 브레이크를 걸었던 게 맞는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그때 내가 브레이크를 안 걸고 진행되게 만들었어도 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냈을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왜 그런 거 있잖아.”
“무슨...”
“딱 자기가 볼 수 있는 만큼만 상대를 인정할 수 있다고. 아마 그때 처음 편집샵 아이디어를 꺼냈을 때 네가 그걸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건 내가 딱 거기까지 밖에 볼 수 없었던 거였고, 부장님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맡겨보자고 하셨던 건 나보다 더 크게 볼 수 있으셨던 이유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러니까 걱정하지마라. 아까 인사부장님 말씀처럼 분명 너무 빠른 승진에는 여러 부작용이 뒤따라 와. 그런데 그런 것까지 다 감안을 하셔서 내린 결정이실 거다.”
“제발 그런 거였음 좋겠네요.”
“차장 승진 확정받고 좋아하기만 해도 부족할 놈이 반응이 왜 이렇게 뜨뜨미지근해?”
“당연히 좋죠. 인정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냥 제 페이스를 계속 놓치게 되는 거 같아 살짝 걱정스럽네요.”
“페이스같은 소리하고 있다. 그 페이스는 누가 만든 건데? 상무보 봐라.”
“...!”
“네가 상무보 보다 못한 게 뭐가 있냐? 상무보한테 만토바 가서 네가 만들어낸 조건을 가지고 계약을 해오라고 하면 할 수 있을 거 같냐?”
“비교 대상이 잘못된 거죠. 상무보야 아버지가 회사 사장인데...”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 하잖아. 아버지가 사장인데...그거 빼면 뭐? 뭐가 그렇게 뛰어난데? 거기다 상무보 너랑 동갑 아니야?”
“저보다 두 살 많습니다.”
“그러냐? 아무튼...입사는 너보다 훨씬 늦게 했잖아.”
“그야 그렇죠.”
“페이스? 그건 네가 팀장을 달기 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평균적인 승진 페이스가 그런 거고, 상황이 바뀌었으면, 그 페이스도 알아서 바꿔야지. 지금 상무보 봐라. 훨훨 날고 있다. 물론 네 말대로 비교 대상이 잘못된 걸 수도 있어. 아버지가 사장이니까. 그런데 넌 지금 전무님 라인 제대로 타고 계시는 부장님이 뒤를 봐주겠다 하시잖아. 고작 차장 한 번 해보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겁이 나냐?”
“고작 차장이라니요, 지금 차장이시면서...”
“네가 밑에서 든든하게 날 받쳐줘야 내가 널 끌어줄 거 아니냐. 재밌지 않냐? 난 지금 상당히 흥분되는데...”
아마도 장 차장과의 괴리는 내 뒤에 버티고 있는 14억짜리 아파트 때문에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게 없었다면 지금 난 아마도 방방 뛰면서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언제부턴가 조금 편하게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 같다.
팀원들과 다같이 합을 맞추어 일을 하는 건 참 재미가 있는데, 그렇다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고싶지는 않았다.
나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 정말 너무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냥 남들 하는 만큼 적당히 열심히, 그리고 또 상황 봐가며 뺑끼도 좀 치면서 그렇게 정년까지 안전한 직장 생활을 하고싶었던 거 같다.
이미 돈이라는 건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모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겠지.
로또를 떠나서 그 로또 당첨금으로 산 14억 짜리 아파트가 지금 당장 내놓아도 16억은 받을 수가 있다.
급하게 내놓지 않고, 적당한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서 제 값에 판다고 하면 말이다.
몇 달 만에 2억이란 시세차를 본 건데, 지난 6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둥바둥 모은 돈에 비하면 너무 큰 액수다.
물론 부동산 법상 2년 안에 되팔 수는 없지만, 또 앞으로 2년 뒤엔 지금보다 더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지는 않을 거니까.
그런 이유로 차장 진급이 흥분되기 보다는 살짝 걱정스럽기 까지 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나만의 페이스가 흐트러질까봐.
여기서 더 얼마나 충성을 해야하는 것일까?
아니, 얼마나 더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걱정을 덮고도 남을 만큼 현재 영업 5팀의 맨파워를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을 받았다.
언젠간 양 대리도 팀장 승진을 하게 될 건데, 그때 과연 장향은과 언제 나갈지 모를 박기태, 그리고 정규직 전환이 불확실한 이지혜만 데리고 팀을 이끌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이지혜의 정규직 전환을 확정받은 게 무엇보다 크다.
“네, 저도 흥분됩니다. 앞으로 진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차장님.”
“내가 할 소리다. 나 먼저 간다.”
장 차장이 택시를 타고 떠난 뒤, 난 다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좋아하자.
좋아만 하자.
지금 이 타이밍에선 걱정을 하는 것 보다 좋아 미치는 게 너무나 당연한 거야.
다음날 출근과 동시에 인사부를 찾았다.
인사부 사무실 한켠에 놓인 4인용 소파.
그곳에 앉아 인사부장과 이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인사부장은 전날 술자리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달리 사뭇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지혜에 관해 몇 가지 물으셨다.
그 몇 가지 질문은 표현만 다르게 한다 뿐이지, 한 마디로 이지혜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이유를 묻는 거였다.
내겐 너무 대답하기 좋은 질문들이었다.
이지혜가 꼭 필요한 이유를 몇 가지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드리고 마지막으로 이지혜의 지난달, 그리고 이번달 특별 수당을 한 번 체크해봐달라고 부탁드렸다.
인사부 직원이 뽑아온 지난달, 그리고 이번달 이지혜의 특별 수당을 확인한 인사부장은 쓰고있던 안경을 몇 차례나 고쳐쓰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최대한 줄인다고 줄인 게 그겁니다.”
“아무리 계약직이지만, 특별 수당이 너무 많이 잡힌 거 아냐?”
“H.I 프로젝트 준비하면서 야근을 정말 밥 먹듯이 해야했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보통 계약직 직원들은 정시 칼 퇴근 시키지 않나?”
“그건 또 정직원들에 대한 역차별 아니겠습니까?”
“...!”
“저희가 무슨 철인 28호도 아니고...그리고 무엇보다 이지혜 본인이 그걸 불편해 했습니다. 특별 수당과는 별개로 할 일이 산처럼 쌓여있는데, 누가 칼퇴근을 하면서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정직원, 계약직을 떠나 같은 팀인데요.”
“흐음...”
“그리고 칼퇴근을 시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게, 현재 나크리스 핸들링 자체를 이지혜가 절반 이상 하고 있습니다. 발주넣고, 코스트 맞추는 작업은 양 대리가 하고 있지만, 그 외 매장 관리부터 인벤토리, 아웃렛 준비 모두 이지혜가 하고 있습니다. 야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참...이 계약직 시스템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지 안그래도 나도 현재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아무튼 알았어.“
“언제부터 전환이 되는 겁니까?”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 일단 현재 있는 계약 기간은 끝이 나야지.”
“에이, 그런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잖습니까.”
최대한 능글맞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부장을 살살 긁었다.
“지금 바로 올라가서 이지혜 내려보내겠습니다.”
“확답을 줘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계약직 직원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희망이 아니라 확답 아니겠습니까.”
인사부장과 면담을 끝내고 돌아온 이지혜의 두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코끝까지 살짝 붉은 걸 보아하니 어디가서 울었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신 내 앞으로 와서 고개를 숙이는 이지혜.
“시간 없어요. 얼른 H.I샵 일일 매출 뽑아줘요. 나 차장님한테 보고하러 가야돼.”
“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양 대리와 장향은의 승진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할 생각이다.
이지혜 같은 경우야 하루하루 피가 마를 것이기에 한시라도 빨리 확정난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양 대리와 장향은의 승진 사실은 묵힐 수록 맛이 있을 거 같았다.
그렇게 주말이 찾아왔고, 토요일 아침 일찍 난 강혜선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원래라면 추석에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강혜선과 시간을 맞추다보니, 아무래도 강혜선 역시 추석 명절 땐 자기 가족들과 보내고 싶어하는 것 같았고, 우리집 부모님 역시 다른 친척들을 찾아가야 하니 번거롭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절 귀성 행렬에 섞여 주차장이 될 고속도로에 갇혀있을 자신이 없었다.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매형은 없는 자리였다.
야간 근무를 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매형과는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기 전 밖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걸로 하고 매형이 빠진 상태에서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아영이에게 먼저 강혜선을 소개시켰다.
“그래, 부모님은 우리 아 마음에 든다 하시더나?”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가 강혜선에게 그렇게 물으셨다.
“너무 좋아하세요. 그리고 이번에 저 내려가서 인사드리고 오겠다고 하니까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와?”
“그냥...제가 가서 뭐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예쁘게 봐주실까...그런 걱정이 되셨나봐요.”
“아이고...별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시고 그라노. 예쁘다카더라고 전해드리라.”
“예쁘다카더라고...?”
“예쁘다고 한다고.”
“아...감사합니다, 어머님.”
우리 집에선 그냥 프리패스였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집에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를 데리고 간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해하셨다.
그리고 강혜선을 직접 보고서는 이미 그때부터 며느리로 생각을 하고 계시는 눈치였다.
당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혜선이 저녁 먹은 그릇을 자신이 설거지 하겠다고 했을 땐 모두가 손을 저으며 못하게 말렸다.
그리고 우리집 제사 이야기를 꺼내며, 이미 진작에 절에 갖다 올렸으니 혹시라도 그런 부분에 대해선 걱정을 안해도 된단 말씀까지 하셨고.
만약 여기서 결혼이 엎어지면 날 때려죽이실 거 같았다.
“그럼 저 이 사람 호텔까지만 데려다주고 올게요.”
“뭘 또 오노, 오기는...”
이런 이야기가 어머니 입에서 나오면 상당히 민망하다.
그런데 또 생각을 해보면, 그만큼 이런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셨단 반증이기도 하고.
난 어머니가 이렇게 오픈 마인드이실지 몰랐다.
사실 어머니랑 이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그동안 전혀 없었으니까.
“와야죠, 아무튼 갔다올게요.”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을 잡았는데, 거기서 체크인을 하고 방키를 받아 강혜선에게 그 키를 건넸을 때였다.
강혜선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
“빼박 인정.”
“네?”
“빼박 인정한다고요.
“그게 무슨...”
“그때 그랬잖아요. 빼박 인정하느냐고.”
“...”
“인정한다고요. 이제 이렇게 양쪽 집에 인사까지 다 드렸는데 여기서 뭘 어쩌겠어요?”
“...”
“그러니까...아, 진짜 나 혼자 여기서 자라고요? 그건 진짜 좀 아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