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공 팀장, 이놈 은근히 고집 세다
“부장님 술잔 비었다.”
“아, 네.”
말이 팀장이지 이런 자리에 끌려오면 알아서 따까리 짓을 해야한다.
난 재빨리 엉거주춤 일어나 두 손으로 인사부장의 술잔을 채웠다.
자리 배치가 묘했다.
밑으로 다리를 넣을 수 있는 다다미 방.
박 부장과 인사부장이 마주보고 앉았고, 박 부장 옆으로는 내가 그리고 인사부장 옆으로는 장 차장이 앉았다.
그리고 술자리 내내 장 차장은 인사부장 몰래 내게 다양한 사인을 보냈다.
“그...이번 추석땐 인간적으로 지난 설날처럼 그런 거 좀 하지 말자.”
박 부장이 그렇게 말하자 인사부장은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그 말씀 하신다. 제가 한 게 아니잖아요. 이전 인사부장이 한 걸 왜 자꾸 저한테 그러십니까?”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지, 걱정이 되니까. 그 몇 푼이나 크게 차이난다고 요즘같은 시대에, 그것도 중소기업도 아니고 홍성 씩이나 돼서 정규직, 비정규직 명절 선물을 따로 준비하나.”
지난 설날 때 정직원들은 직급에 따라 그 금액에 조금씩 차이가 있긴 했지만 백화점 상품권이 포함된 종합 선물 세트를 받아갔고, 계약직 직원들은 달랑 참치, 스팸 세트를 받아갔었다.
“인사부에서 그렇게 해버리면 비정규직 직원들 데리고 일해야 하는 우리 입장은 계속 더 난처해져. 이유없이 미안해 해야한다니까? 가뜩이나 아무리 똑같이 대해주려고 애를 써도 스스로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애들이야. 그런데 그렇게 보란듯이 명절 선물로 차별을 해버리면 서로 입장이 뭐가 되나? 그런 걸 해소해줘야 할 인사부가 그걸 오히려 더 조장을 하고 있어. 쯧쯧쯧...”
“신경 쓰겠습니다, 부장님.”
“말만 그렇게 하지말고 정직원들 선물 코스트를 조금 줄이더라도 다같이 기분좋게 명절 보낼 수 있도록 이번엔 제대로 좀 해줘.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차별을 해버리면 선물을 챙겨줘놓고도 욕 얻어먹는다고.”
“네, 이번엔 똑같이 준비시키겠습니다.”
“자, 그런 의미로 다같이 전국주 한 번 하자고.”
“이거 아까부터 계속 저만 먹이시는 거 같은데요?”
“무슨 그런 소릴...자, 자...다들 잔 들어.”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박 부장과 인사부장이 개인적으로 한 잔.
그리고 잠시 뒤 장 차장이 또 인사부장 앞으로 자신의 잔을 들며 앞으로 박 부장이 빠진 영업부를 맡아 나가는 게 살짝 겁이 난다며 잘 좀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건배를 하자고 했고, 또 곧바로 내게 눈으로 사인을 보내 인사부장과 둘이서 술을 마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전국주라...
테이블에 깔린 참치 안주는 거의 손도 안대고 소주 두 병을 비운 꼴이었다.
각자의 잔을 눈 높이 정도로 들게 만든 뒤 박 부장이 말했다.
“이번에 H.I 준비하는데 인사부가 너무 많은 도움을 줬어.”
“에이, 저희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인사부가 한 게 왜 없어? QA부 전원 영업 5팀으로 헬퍼 띄워준 게 인사부 아냐. 그 헬퍼 없었으면 답 안 나오는 프로젝트였어,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게 어디 인사부가 한 겁니까? 다 전무님 지시사항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인데요.”
“그걸 인사부장이 정말 매끄럽게 어레인지를 해줬단 말이지, 내 말은.”
무슨 뜻일까.
장 차장이 내게 사인을 보낸다.
자신의 옆에 앉은 인사부장을 흘깃하며 고개를 털었다.
아무래도 인사부장에게 한 마디 하라는 신호같았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장님. 진짜 부장님 배려 덕분에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입니다.”
“아무튼 공 팀장, 축하해. 정말 큰 일 해냈어. 나야 뭐 인사부장 발령받고 처음 본사 들어온 거지만, 그래도 나름 홍성 밥 16년째 먹고 있는 사람이야. 대형 브랜드 가지고 이정도 띄우는 것도 힘든 일인데, 홍성 자체 브랜드로 이정도 성과를 만들어냈으니 위에서 얼마나 예쁘게 보시겠나. 앞으로 기대가 커.”
그렇게 우린 다같이 전국주로 잔을 비웠고, 이번엔 박 부장이 직접 인사부장과 장 차장, 그리고 나의 잔을 차례대로 채워주었다.
그리고 내가 술병을 받아 박 부장의 잔을 채워주려고 할 때 인사부장이 손을 내밀더니 자신이 직접 박 부장의 잔을 채워주겠다고 말했다.
박 부장의 잔을 채우며 인사부장이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거 맞습니까?”
“글쎄...인사부장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그걸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어? 허허허...”
“오늘 낮에 전무님이 인사부에 잠깐 찾아오셔서 영업부 분할에 대해 넌저시 말씀을 흘리고 가시더군요.”
“그래? 아깐 우리 영업부에 오셔서는 인사부장 데리고 같이 소주나 한 잔 하라시면서 카드를 놓고 가시던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못 알아듣습니다, 부장님.”
“하긴...우리 문 부장 원리원칙, 돌직구인 걸 왜 내가 모르겠어.”
“그래도 부장님 이사 승진 하시기 전에 편하게 올라가시라고 승진턱 한 번 정도 얻어먹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죠.”
회사의 매뉴얼은 고작 부장 둘이서 작당을 한다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홍성 인터네셔널처럼 오랜 세월 바닥부터 다져진 회사일 수록 그 매뉴얼의 두께는 두꺼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엔 절대 무시하지 못할 변수가 몇 가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몇 가지 변수 중 임원 승진이 확정된 선배 부장의 요구는 사실상 회사 매뉴얼을 피해갈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일종의 예우다.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대리, 팀장, 부장을 거쳐 마침내 임원호에 탑승하는 선배에 대한 예우.
나도 잘은 모르지만 법조계에서도 그런 게 있다고 들었다.
끝발 높은 검사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맡은 첫 재판과 같은...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선배 부장에 대한 후배 부장들의 예우는 자신의 임원 승진을 위해서라도 한쪽 눈을 감게 만들 수 밖에 없다.
임원으로 승진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자기 라인이 필요하다.
임원도 따지고 보면 계약직 아닌가.
그 임원 생활을 조금이라도 오래 하기 위해선 그때부턴 자신을 끌어줄 라인 보다는 자신을 받쳐줄 라인이 튼튼해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박 부장은 그 라인을 다지고 있는 중이고.
“피엔씨(P&C - 회사가 자체 운영하는 공장)가 없는 우리처럼 패션 종합 상사 개념의 회사들 치고 영업부가 하나인 곳은 거의 없어.”
“그렇죠. 그래서 예전에 중국 진출을 준비할 때 처음엔 해외 사업부가 아니라 해외 영업부로 만들 계획이었잖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이건 그거랑은 조금 별개의 문제야. 벌써 5팀까지 생겼어. 영업 3팀까지 있을 땐 일부장, 일차장 체제가 가능했어. 아니 그게 오히려 더 효과적이었지. 그런데 지금 벌써 5팀까지 생겼는데, 이건 일부장, 일차장 체제로는 힘들어.”
“흐음...”
인사부장은 신중한 사람이다.
박 부장에 대한 예우를 지키더라도, 따질 건 따져봐야 한다는 표정으로 신중하게 반응을 하는 인사부장이었다.
“차장 티오를 하나 정도는 더 만들어줘야 그 안에서 경쟁이라는 게 일어나는데, 티오는 하나인데 팀장이 다섯이야. 그럼 포기할 놈은 진작에 포기를 해버린다니까? 자기 사업하겠다고 나간 정 팀장 봐라. 그놈이라고 어디 나가고 싶어서 나갔겠어? 답이 없거든, 자기가 생각을 해봐도. 김 팀장, 손 팀장이 저렇게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언제 자기한테 차장 기회가 올지 어떻게 알아?”
“그렇죠...”
“차장 티오 하나 더 만들어야 돼.”
“안그래도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습니다. 낮에 전무님도 영업부 틀을 살짝 바꿔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렇게 차장 티오로 숨통을 조금 틔워놓아야 대리들도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팀장 승진을 시킬 수 있을 거 아냐.”
“네...”
“차장 티오 하나만 더 만들어줘.”
“생각하고 계신 그림이 있으십니까? 저야 올해 막 본사 입성한 사람 아닙니까. 제가 영업부 디테일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 순간 박 부장의 손이 내 어깨 위로 올라온다.
난 화들짝 놀라며 박 부장을 쳐다봤고, 그런 날 향해 싱긋이 미소를 지은 후 박 부장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기존에 있던 영업방식 그대로 가져가는 영업 마케팅부를 하나 만들고, 여기 공 팀장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편집샵 위주로 영업 기획부를 하나 만들면 어떨까 싶은데...그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 그건 인사부에서 알아서 정하면 되는 부분 같고...”
“설마...그 새로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는 차장 티오 자리에 공 팀장을 올리라는 소리는 아니시죠?”
“내가 이 자리에 공 팀장을 왜 데리고 나왔겠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부장님. 공 팀장은 올해 막...”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겠다고 할 친구네.”
나도 놀랐다.
아니 놀랐다고 하기 보다는 순간 박 부장이 막 나가도 너무 막 나간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날 끌어주면 나한테도 그렇게 좋은 일 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차근차근 단계별로 올라가야지, 고속 승진은 끝이 좋을 수가 없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나.
더군다나 내 입사 동기들은 아직 다 대리인데 나만 벌써 차장을 단다니.
“문 부장, 이 업계가 참 좁아.”
“그야 그렇죠.”
“H.I가 신세계까지 다 깔리는 순간 헤드헌팅 하는 애들 리스트에 공 팀장 이름은 무조건 1 순위에 올라가. 얼마나 좋아? 딱 팀장이야. 차장, 혹은 그 이상의 대우를 부르면서 서로 데려가겠다고 할 껄?”
“...”
“더 나은 조건을 보장받고 옮겨가는 놈이 나쁜 놈이냐, 아님 지키지 못하고 빼앗기는 놈이 모자란 놈이냐?”
“흐음...”
“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실력이 되면 그 실력을 펼칠 수 있게 판을 깔아줘야지, 실력은 되는데 짬밥이 안된다고 그걸 못 펼치게 하는 건 회사 입장에서 어리석은 짓이야. 앞으로 H.I가 계속 치고 나가려면 현재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에서 계속 브랜드 업데이트가 되어야 돼. 트랜드 봐서 뺄 건 빼고, 또 새로 넣을 건 넣고. 그럴 때마다 브랜드 본사측에 연락을 해야 하는 건 공 팀장인데 팀장 타이틀로 컨텍을 하는 거랑 차장 타이틀로 컨텍을 하는 건 또 느낌이 다르잖아. 어디 그 뿐이야? 앞으로 백화점들이랑도 계속 접촉을 해야하는데, 팀장 타이틀은 너무 약하지.”
“하지만 전 걱정이 되는 군요. 승진이라는 것도 어느정도 빨라야말이지, 이렇게 빨리 차장을 달아버리면 분명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클 겁니다.”
“문 부장이 걱정하는 그 부작용을 구더기라고 하는 거고.”
그리고 박 부장은 날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월급받는 직장인이 못하는 건 없어야 돼. 최소한 회사가 시키는 일이라면.”
“...네.”
“그리고 또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는 게 회사 일이야. 회사는 마른 수건을 쥐어짜낼지언정, 절대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을 맡기지는 않거든.”
그리고 다시 인사부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양 대리는 상반기 인사때 팀장 달아줘야 돼. 그런데 양 대리가 차장으로 올라갈 김 팀장 말을 듣겠냔 말이지. 김 팀장? 양 대리 컨트롤 못해. 내가 그걸 2년 봤다. 양 대리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김 팀장을 말이야. 그리고 이제 막 자리를 갖춰가는 H.I 편집샵 프로젝트에 양 대리가 빠지면 공 팀장 혼자 힘들어. 힘들어서 못해. 그렇다고 팀장 둘을 앉힐 수는 없는 거 아냐.”
한참동안 고개만 끄덕이던 인사부장이 슬며시 미소를 띄우며 날 쳐다봤다.
“흐음...공 팀장 좋겠네?”
여기서 난 무슨 대답을 해야하는 것일까.
나도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아직 분간이 안되고 있었다.
“지금 당장 할 필요는 없고, 내년 상반기 인사 때 맞춰서 그렇게 진행을 해주면 고맙겠어.”
“네, 뭐...그림 자체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잡음도 크게 없을 거 같긴 합니다. 어차피 김 팀장이 차장 올라가고 손 팀장 중국가면 팀장 티오 2개 비는 거고, 또 그렇게 차장 티오 하나 더 만들면 자연스럽게 팀장 티오까지 하나 더 생기는 거니 대리급에서도 반기면 반겼지 인상 쓸 일은 없겠네요. 그런데 승진턱을 이만한 일로 벌써 내시기엔 조금 아깝지 않으십니까? 하하하...이건 사실 그냥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셨어도...”
“그리고...”
박 부장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표정으로 인사부장을 향해 자신의 술잔을 올렸다.
인사부장은 재빨리 술잔을 들어 박 부장의 술잔에 붙였다.
“H.I를 신세계까지 확장을 시키려면 5팀에 맨파워 보충이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전무님이 말씀을 하셨어.”
“그야 당연하죠.”
“근데 공 팀장 이놈이 괜찮다고 해버렸어.”
인사부장은 미간을 좁히며 날 쳐다봤다.
“왜?”
“그야...”
내가 마땅한 핑계를 갖다붙이려고 하는 찰나.
“뻔하지 뭐. 현재 데리고 있는 애들 한 칸씩 올리기 전엔 안 받겠다 그거 아니겠어?”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과연 박 부장의 정치력이 이정도였단 말인가.
그리고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인사부장은 또 뭐란 말인가.
정말 장 차장이 그때 울산 식당에서 내게 했던 말처럼, 위에 있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볼 수 있는 건가?
“양 대리야 어차피 올려야 되는 거야.”
“그렇죠. 양 대리 이야기는 예전부터 하셨죠.”
“그리고 향은이도 대리로 올릴 때 됐어. 이미 동기 중에 먼저 대리 단 놈도 있고 또 차례대로 한 칸씩 올라갈 때에 향은이 정도되면 거기에 포함시켜도 충분할 만큼 제 몫은 하는 애야. 어차피 공 팀장이 차장 달고 계속 양 대리를 데리고 가려면 향은이가 대리를 달아야 돼.”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혜 말이야.”
“지혜? 지혜가 누굽니까?”
“그 왜 공 팀장이 데리고 있는 계약직 여자애.”
인사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을 보면 모를까 이름만 가지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걔 정규직 전환까지만 좀 어떻게 힘 좀 써줘.”
“아이고, 부장님도 참...그 계약직 관한 부분은 사실 제가...”
“공 팀장 이놈부터 시작해서 양 대리, 향은이는 내가 그냥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거고. 진짜 이 승진턱은 그거 때문에 사는 거야, 지혜.”
“...!”
“잘해. 잘 하는 애야. 그리고 내 장담한다. 공 팀장 이놈 그거 해결 안나면 맨파워 보충 필요없다고 계속 고집부릴 거야. 공 팀장, 이놈 은근히 고집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