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내가 봤을 땐 그게 답이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강혜선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만날 수 있냐고.
“당연하죠. 안 그래도 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같이 밥이나 먹자고 물어볼까? 하던 중이었어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어디요? 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요?”
-네.
다행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원룸에 와보고 싶다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
만약 온다고 했음 절대 곱게 안 보내지, 나도 남잔데.
“그냥 제가 갈게요. 혜선 씨 집 근처로. 이 동네는 뭐 마땅히 먹을 만한 곳도 없어요.”
그렇게 오후 4시 정도에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강혜선을 차에 태웠다.
“그건 뭡니까?”
“엄마가 은태 씨 갖다주라고 밑반찬 좀 챙겨주더라고요.”
“...”
“혼자 살고 있는데, 잘 챙겨먹으면 얼마나 잘 챙겨먹겠냐고...부산 안 내려가신지도 거의 두 달 가까이 되잖아요. 거의 맨날 밖에 나가서 사드시고.”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형부 때는 이런 거 일절 없었어요. 엄마가...은태 씨 마음에 쏙 드신대요. 밑반찬 이거도 어제 은태 씨 식사 하는 모습 유심히 살피면서 젓가락 많이 간 것들로 챙기신 거예요.”
감사했다.
딱 그 표현이 맞는 표현일 거다.
기분이 좋다, 날아갈 거 같다...하는 감정 보다는 내가 로또라는 거에 당첨이 된 사실도 모르고 계실 건데, 정말 있는 그대로의 날 좋게 봐주신 부분에 너무 감사했다.
차 핸들을 돌리며 강혜선에게 말했다.
“저는 혜선 씨가 어머님이 쎈 분이라고 하셔서 어제 자리 끝나는 순간까지 분명히 뭐가 있을 거야, 분명히 이렇게 쉽게 허락을 해주시지는 않을 거야...하면서 괜히 마음을 졸였어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저렇게 이미지를 관리하시는 분이 아닌데, 오늘따라 왜 저러지? 하면서요.”
강혜선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제 어떤 모습을 그렇게 좋게 봐주셨을까요? 딱히 예쁘게 봐주실만한 행동을 한 건 없었던 거 같은데...”
“실은...만나기 전부터 이미 어느정도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어떻게요?”
“그야 저도 모르죠? 전 그냥 은태 씨하고 나눈 이야기들, 은태 씨한테 받은 느낌들만 있는 그대로 말해줬을 뿐이에요.”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묵직하다고.”
“묵직하다고요?”
“날리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바짝 얼어있지도 않고...그만하면 됐다, 잘 만났다...라고 하셨어요.”
평소보다 훨씬 더 밝고 경쾌한 강혜선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인다고 말했더니 자신의 부모님이 날 좋게 봐주셔서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난 그날 저녁에 강혜선의 입술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이미 마음 먹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운전 조심해서 들어가시고요.”
그녀의 집 앞.
아파트 단지 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단지 입구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있었다.
“잠깐만요, 잠깐만...잠깐만요.”
안전밸트를 풀고 있던 강혜선이 왜 그렇게 급하게 부르느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런 강혜선에게 물어봤다.
“그럼 이제 빼박 인정?”
“빼박 인정? 뭐가요?”
“아니 뭐...이미 부모님한테 인사까지 드렸고, 또 부모님 두 분 모두 오케이 하셨고...그럼 이제 빼도박도 못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결혼 말이에요.”
“...그런데요?”
난 얼굴에 장난기를 가득 걸어놓고 강혜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강혜선은 흠칫 놀라며 차창 쪽으로 몸을 뺐다.
하지만 이미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정확하게 눈치를 챈 듯 보였다.
“뭐, 뭐...그래서 뭐요?”
“뭐가요?”
“어쩌자고요?”
“글쎄요? 제가 지금 어쩌자고 이러는 거 같으세요?”
조금 더 깊게 다가갔다.
조금은 겁을 먹은 표정으로 하지만 날 빤히 쳐다보던 강혜선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강혜선이 슬며시 눈을 감아주는 것까지 확인을 하고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달콤했다.
무척 부드러웠고.
그리고 난 이 키스가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다.
조심히 내 팔을 타고 올라가는 강혜선의 손가락.
키스 중간에 잠시 눈을 떴을 땐,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강혜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올라왔을 땐 서로 눈을 뜨고 잠시 입술을 떼어낸 채 서로를 바라봤다.
조금만 더 하면 안될까요? 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이번엔 강혜선의 입술이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난 강혜선의 한쪽 볼에 손을 올려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가볼게요.”
“혜선 씨.”
차 문을 열려고 하는 강혜선을 다시 한 번 붙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저 이번에 부산 내려갈때 같이 안 갈래요?”
“...”
“같이 가죠? 가서 우리 가족들한테 인사도 드리고 또 제 친구들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혜선 씨 친한 동생도 만나고...”
강혜선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회사 사무실층 엘레베이터 복도.
커피를 사러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엘레베이터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엘레베이터 앞에 떨어진 휴지를 줍고 있는 박 부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자리에 서서 박 부장의 뒷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평소였다면 다같이 쓰는 엘레베이터 앞에 쓰레기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 어느 한 놈 줍는 사람이 없다고 씩씩댔을 박 부장.
그런데 그런 기운은 온데간데 없고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 마냥 그냥 쓰레기를 줍더니 저 멀리 창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는데도 그걸 그냥 무시하고 창가에 놓여진 쓰레기 통 앞으로 가더니 휴지를 버리고 창가에 서서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벽에 손을 대더니 그걸 만지기도 했고 또 창틀에 손을 올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사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자연스럽게 날 발견했다.
“거기서 뭐하십니까?”
다가가며 내가 물었다.
“그냥...”
뭐야?
갱년기 오시나?
왜 저렇게 나긋나긋 하시지?
엘레베이터 올라가는 버튼을 눌러놓고 물으셨다.
“어디가냐?”
그래서 난 반대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며 대답했다.
“커피 사러요.”
“커피? 커피는 탕비실에 있잖아.”
“시원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돈이 남아 나냐?”
“하하하...사다리 한 번 탔습니다, 오랜만에. 다들 너무 지쳐있어서요. 편집샵 오픈이 다가오면서 다들 야근도 잦아지고 날씨까지 더운데 몸까지 피곤하니까 날이 서있는 거 같아서요. 그래서 그냥 재미삼아 커피 내기 사다리나 한 번 타자고 했는데, 꼭 이런 건 먼저 하자고 한 사람이 걸리네요. 무슨 법칙인 모양입니다. 하하하...”
2호기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지만 박 부장은 타지 않았다.
“올라가시는 거 아닙니까?”
“같이 가자.”
“네?”
“시원한 아메리카노. 나도 한 잔 마시자고.”
“아...네.”
그렇게 박 부장과 커피를 사러 내려갔다.
담배를 피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시냐고.
“일은 무슨...격세지감. 내가 이 회사에 20년을 넘게 붙어 있었다는 게 오늘따라 실감이 난다.”
“...?”
“매일같이 다니던 이 길도, 매일같이 타던 엘레베이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다르게 보이네.”
“이사 진급 하려니까 서운하세요?”
“좋을 줄만 알았거든. 그런데 막상 20년을 썼던 영업부 사무실을 나와서 다른 사무실을 쓰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좀 묘해. 매일같이 터지는 사건사고. 그거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말이야. 이젠 시끌벅적한 이 분위기 속에서 너희들이랑 같이 지지고 볶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그제야 내 나이가 실감이 나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내가 지갑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박 부장이 먼저 지갑을 열어 자신의 개인 카드를 종업원에게 건넸다.
“아닙니다, 부장님.”
“설마 내가 너한테 커피 한 잔 얻어마시자고 같이 오자고 했겠냐?”
“그래도...”
“수고한다고. 영업 5팀 요즘 진짜 수고 많다고 한 잔 사주고 싶어서 같이 내려왔어. 다른팀 애들한테는 비밀이다? 괜히 또 알면 말 나온다.”
“...네, 잘 마시겠습니다.”
언제부턴가 내가 돈을 쓰고 싶어도 이상하게 상황이 내가 돈을 쓸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버린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함께 빨대로 아이스 커피를 빨아마시며 다시 회사로 복귀를 했고, 엘레베이터 안에서 박 부장이 같이 담배나 한 대 피자고 말했다.
그래서 난 얼른 커피만 팀원들에게 전달을 하고 17층으로 올라갔다.
“은태야.”
“네, 부장님.”
난 내가 건넨 담배에 불을 붙여준 뒤, 담배를 한 대 입에 물며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박 부장이 하는 말을 들으며 불을 붙였다.
“띄울 수 있겠냐?”
“편집샵 말입니까?”
“편집샵, 그리고 나크리스.”
“나크리스는 아직까지 긴가민가 합니다. 하지만 편집샵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해내라. 반드시 해내라.”
단순하게 영업부 전체 살림을 책임지는 부장의 입장에서 하는 말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럼 내가 영업부 사무실 떠나기 전에 장 차장이랑 너한테 멋진 선물 하나 남겨주고 갈라니까.”
“무슨...”
“나도 이제 진짜 늙었나보다. 입이 근질거려서 참지를 못하는 거 보면. 아무튼 멋진 선물 하나 해주고 가려고 준비 중이니까 열심히 하는 거 잘 알지만 끝까지 조금 더 힘내서 쥐어짜내라.”
“...네.”
“전무님 기대가 크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맙다, 은태야.”
“뭐가요?”
“주재원 말이야.”
“에이, 아닙니다.”
“손 팀장 그놈 때문에 안그래도 머리가 지끈지끈했는데, 네 덕분에 내가 그놈 주재원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무님이 먼저 꺼내셨어.”
“잘 됐습니까?”
“오늘 비자 신청 들어갔다.”
“아이고, 잘 됐네요.”
“김 팀장 밑에서 일 할 자신 없지?”
무슨 의미일까?
“아뇨? 완전 잘 할 자신 있는데요.”
“같이 일해본 적 없잖아.”
“어차피 뭐...”
“답답해서 못해. 내 장담한다. 내가 괜히 손 팀장 그 놈을 염두에 뒀던 게 아냐.”
“...”
“아무튼, 무조건 띄워라. 내가 봤을 땐 그게 답이다, 지금 너한테는.”
그 후로도 박 부장의 행동은 평소와 무척 달랐다.
생각을 해보면 박 부장이 터뜨리는 사자후를 안 들은지 꽤 오래 되는 거 같았다.
정 팀장이 퇴사를 하면서 4팀 직원 몇 명을 빼갔을 때, 그걸 보고했던 주 대리에게 했던 사자후가 마지막 사자후였던 거 같다.
평소엔 절대 들어가지 않는 팀 사무실.
각 팀별로 돌아다니며 사무실에 들어가 직원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또 개인별로 격려를 하며,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은 절대 우리가 알고 있는 박 부장이 아니었다.
“아이고 우리 양 대리.”
컴퓨터 책상에 앉아 있는 양 대리의 어깨 위로 두 손을 올려놓은 박 부장.
모두가 그런 박 부장을 불안하게 쳐다봤다.
물론 내색을 하지는 못했고.
“네, 부장님.”
“일은 할 만 하냐?”
“네, 뭐...”
“내년엔 팀장 달아야지.”